경상남도/함양군

함양...덕봉사지 부도전

임병기(선과) 2016. 6. 7.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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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사지

병곡면 광평리 산69-1 주소만 입력하고 무작정 찾아 갔다.

무작정이라는 의미는 그만큼 자료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내비가 멈춘 곳에서 차에서 내려 돌아보니 멀리 천왕봉이 아득하다.

 

하지만

여기서 덕봉사지를 수배하는 것은 서울땅에서 김서방 찾는 거랑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때

모내기 준비를 마친 어르신이 내려오시며 외딴 곳에서 만난  승용차와 나에게 경계심을 숨기지 않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준신다. 하지만 익숙치 않은 억양, 사투리 짙은 어투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바쁘신 분을 잡고 반복해서 질문할 수도 없으니...

 

 

답사 후 찾아가는 길을 재구성 하였다..

맨위의 사진을 촬영한 단독 주택의 주소지가 병곡면 묘동길 43-91이다.

여기서 진행방향 50미터 전방 두 갈래 길에서 우측 방향으로 진입하면  20미터 좌측에 퇴비, 비료 등을 야적한 장소가 있다. 농사에 방해가 되니 주차를 금지한다는 안내문도 있었다.(하지만 여기에 잠시 주차해야 한다)

 

주차후 좌측 11시 방향 개울의 화감암 조각으로 쌓은 둑을 따라 내려가서 개울을 건너 좁은 산길 10여미터 진행하면 민묘 2기가 있다. 덕봉사지는 민묘 뒤쪽에 올라서면 바로 눈에 들어 온다. 결론적으로 나는 덕봉사지 답사의 정상적인 동선이 아닌 뒤쪽으로 진입하여 부도를 뵈었으며 앞쪽에 넓게 펼쳐진 석축  등의 사지는 살피지 못했다.

 

 

문화재청 한국의 사지의 덕봉사지 등재된 글을 발췌했다.


"창건과 폐사시기에 관련된 문헌은 확인되지 않지만,조선 전기의 문인 김종직의 시와 기행록을 통해 당시에도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신동국여지승람 범우고 여지도서 기록과 해동지도 여지도 광흥도 등에 ‘덕봉사’의 위치가 장수와 함양의 경계부인 곡면에 표기되어 있는 것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장 사정과 매치되지 않은 '한국의 사지'의 덕봉사지 소개 글 때문에 무척 헷갈렸다.


즉, 오늘 찾은 덕봉사지는 병곡면에 위치한 고도서에 보이는 덕봉사지가 분명하다.

하지만,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등재된 덕봉사와는 별개의 사찰로, 선생의 지리산 기행문에 등장하는 덕봉사는 마천면 덕전리 마애불 인근으로 생각된다. 다시말해 조선후기에 병곡면과 마천면 두 지역에 2개의 덕봉사가 운영되었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위에 언급한 '한국의 사지' 책자에도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부근을 덕봉사지로 비정한 글도 보인다.

 

"덕전리사지는 마천초등학교 뒤편에 위치하는 현 고담사 일원이다. 이곳은 지리산 자락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 중앙에 조성된 나지막한 구릉지대로 동쪽에는 창암산, 서쪽에는 삼정산, 북쪽에는 백운산이 있고 임천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추정사역은 1977년 보고서에덕봉사지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폐허가 되어 마애불을 제외한 사지관련 흔적은 확인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남북방향으로 긴 장방형 대지로 좌향은 지형상 남동향이다. 남쪽은 현재 고담사가 건립되어 있고 북쪽은 마애불이 조성되어 있다."

 

점필재의 유두류록의 덕봉사 관련 부분을 보면, 덕봉사의 해공스님이 산행 가이드였음을 알 수 있다.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선생의 덕봉사 시편도 보인다.


덕봉사 찬바람 속에 술에 취해 나와서 金地寒飇中酒出
깊은 골짝 지는 해에 꿩고기 먹고 돌아왔네 嵌巖落日割鮮還
해마다 한 차례씩 매양 이와 같이 하거늘 一年一度每如此
태수가 한가롭지 못하다고 그 누가 말하는고 誰謂遨頭不得閑

 

 

그렇게 찾은 덕봉사지의 조선 후기 부도 4기

예전에는 많은 부도가 유존 했지만 도난, 반출, 훼손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주민들은 이곳을 부지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마 부처 또는 부도에서 그 어원이 유래되었을 것이다.

 


당호를 알 수 없는 부도

기단석이 본디 부재인지는 확인 불가하며, 탑신과 보주는 하나의 부재이다.

석종형 탑신의 한쪽면은 인위적으로 훼손되었고, 높은 괴임위에 보주가 표현되었다.

탑신 상부에는 연화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묵담墨潭(?)

예전에는 희미하게 묵담 명문이 보였다고 하지만 현재는 육안 판독은 불가하다.

별개 지대석,석종형 탑신, 벙거지형 옥개석과 보주가 일석이다.

 


흔치 않은 상부의 벙거지형 옥개석 상부에 연화문이 조식되었고,그위에 괴임을 표현하였으며 상부에는 연주문을 새겼다.

 

 

 


추월당 학훈秋月堂 學訓

석종형 탑신, 지대석이 별개이며, 중앙에 “秋月堂學訓大師 당호를 새겼다.

탑신 상부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고  연봉형 보주가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성봉당聖峯堂

팔각탑신으로 보았는데 사진상으로는 육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부가 파손된 옥개석은 사모지붕형이며 보주가 절병통 느낌이다.
팔각형 탑신은 세장하며 명문은 희미하다.

 

 

 

 

낫을 소지했다면

주변정리를 깔끔하게 하였겠지만...

 

 

오늘 뵌

산청 시천의 지리산 보암사지 부도전

그리고

덕봉암지 부도전

억겁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어찌 나에게 나투실 수 있었을까?


그나저나

왜 그리 찔레향은  찐하고 뻐꾸기는 슬피우는지...


201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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