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이제 잊을란다!!

임병기(선과) 2016. 6. 5. 08:25
300x250
300x250

 

함양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답사 목적으로 들린 고장이다.

답사기를 들추어 보니 현재까지 거의 40편 가량 올렸고...

 

함양초교 교정의

배례석과 석탑면석에 관한 글

2012년 처음 올렸다.

 

 

 

함양군청 앞 학사루. 정확한 건립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시대에 고은 선생이 여기에 올라 시를 읊어 루대 이름이 학사루로 명명된 것으로 미루어 동시대 이전에 존재하였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조선 숙종 18년 (1692)에 군수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그후에도 객사 등의 동헌 부속거물과 함께 남아 있었다.1979년 함양초교에서 현위치로 이건전까지 학사루는 보존되어,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이다.

 

1993년 함양 답사길에 들려 현판 글씨, 석등, 군청 느티나무를 찾은 듯한데 대학노트에 기록한 답사기에는 남아 있지 않아 의아스럽다.  당시에는 사진도 찍지 않았으니 본래는 답사기 업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다시 준비했다. 함양읍내로 들어오면서 해설사분에게 학사루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우리가 알고 있는 유자광의 현판에서 비롯된 점필재 김종직과의 무오사화의 단초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조선성리학의 맥의 중심축에 자리한 김숙자 선생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배푼 자취가 여기저기 보인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또한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 백성들이 특산물세인 차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을 맞바꾸어 납부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감면해 주기 위하여 휴천면 엄천에 토지대금을 백성들에게 보상해주고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대신 납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함양읍성의 담장이 240간이나 되는데 그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어 해마다 군민들이 부역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것을 기와로 바꾸어 민폐를 덜어 주는등 선정을 베풀었다.


1970년대 옛날에는 함양국민학교 안에 있었으며, 군립도서관으로 이용하였다.
1970년 함양초교 교정의 학사루, 군립도서관 현판도 걸려 있다...출처/함양군청

 

해설사분이 설명한 무오사화의 단초에 대하여 더 깊게 살펴보자. 함양군청 함양의 전설에서 옮겨왔다.

 

지금부터 500여년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와 있을 당시 유자광과의 사이에 생긴 이야기다. 유자광이 종의 몸에서 천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조에게 특채되어 당시의 훈구파에 정치적 뿌리를 박고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이 바뀔때마다 줄타기를 잘 해서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그의 고모가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천대와 설움 속에서 살아온 서자이기에 입신양명하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어 고모에게 인사차 함양을 들렀던 것이다.

함양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고을 원님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김종직은 그렇지 않아도 유자광이를 기피해야 하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함양에 온다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라는 직위는 군수보다 높은 자리다. 함양에 오게되면 관찰사에게 깎듯이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야 되었다.
김종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 보나 유자광에게 굽신거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자 출신의 쌍놈 주제에 뭣하러 이곳에 온담. 내 어찌 그에게 고개를 숙이리.’
하고 중얼거리며 아전에게 명하였다.

“관찰사가 이곳에 오거든 군수는 지방 순행차 출장하고 없다고 여쭈어라.”

“어디로 가시렵니까? 사또.”

“등구 마천을 거쳐 수구실로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일러라.”

김종직은 유자광을 만나게 되면 난처하였다.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명을 받들고 공무로 오는 것도 아니고 제 사사로운 일로 오는데 구태여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관아를 비우고 이곳 이은대에 와서 숨어버렸다고 한다. 관찰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피한 것이다.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

함양초교의 학사루 느티나무...점필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유자광이 함양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이 산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이다. 마음놓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서정적인 고장이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한 수의 시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에 올랐다. 그리고 아전에게 필묵을 준비해 주도록 하였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있느냐.”

잠시 후 유자광이 시 한수를 읊었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사사로운 볼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목적지인 고모댁으로 떠났다. 유자광이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김종직은 관아로 돌아왔다.
그 후 학사루에 올라보니 새로운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상히 생각한 김종직은 아전에게 물었다.

“여봐라, 저기 새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관찰사 유자광 사또께서 걸어놓고 가셨습니다.”

“무슨 현판인데.”

“네,시를 한수 읊어 현판으로 걸어놓은 것인 줄로 아옵니다.”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내려라.”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내려서 어찌하리까?”

“아궁이에 넣어버려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해 버렸다. 말은 날개가 돋히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날아가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이야기가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으리, 나으리의 시가 함양의 학사루에 걸릴 자격이 없다하여 김종직이가 그 현판을 철거했다 하옵니다.”

유자광은 그 말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출신이 떳떳하지 않아 열등감에 쌓여 있는 유자광이고 보면 그럴 수 있다.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흔히 말하기를 이 현판 철거사건이 후에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데 김종직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가졌다.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확실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이에 유자광은 벌떡 일어나며

'난 글을 모르는 무관 아닌가? 자네 같은 선비가 짓는 시를 내가 어이 짓겟나. 어허 고인한 손이로고...'

하면서 총총히 사라졌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기를 쓰고 빌미를 찾아 무오사화를 발생시켜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함양초교, 현관 바로 앞에 석탑재가 조경석으로 사용되었다. 화단을 조성한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데 지금이라도 들어내어 다른 곳에 전시 보관하였으면 좋겠다.

 

 

아래 사진 배례석 크기로 미루어 3층탑 초층 탑신 면석 부재로 보인다. 한 개 면석에 두 면의 우주를 모각한 형태의 석탑 부재로 보인다. 함양읍내 이은리, 보림사, 함양중, 함양교 등의 석불과 연관성을 면밀히 조사하여 한 곳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탑신재 바로 옆에는 안상이 새겨진 배례석으로 추정되는 석조물이 놓여 있다. 상부의 흔적은 훼손되었지만 연화문이 곱게 핀 석탑 앞에 놓였던 배례석이 분명해 보인다. 공사를 시공한 업체 관계자를 탐문한다면 어디서 가져 온 것인지 쉽게 추적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해인사 원당함 다층탑 앞 배례석

 

함양초교 정원의  배례석도 훼손되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빠른 조사가 시급히 진행된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를 본래의 위치로 옮겨야 한다. 관광 함양의 명성과 전통과 문화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은 이런 작은 일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함양군청 등 지자체에서 주저하면 함양의 의식있는 민초들의 적극적인 결단을 기대해 본다.

2012.02.24

 

 

그리고

함양박물관이 개관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거의 방치되어 있는 옛문화재가 안타까워 2014년 11월 정책 제안을 하였다.

 

그 땐 젊었었나?

전국의 지자체 문화재 담당자와 언성을 높힌 것이 부지기수였다.

 

제안, 건의

모두 불채택되었다.

 

지금은

달관의 경지?

그냥 포기하고 산다.

 

함양 대덕리 마애불 가는 길

함양박물관이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뇌리를 스쳐가는 함양초교 석탑재

박물관으로 옮겼으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국민신문고를 두드렸다.

 

제안인 입력사항
제안인정보 테이블
제안신청번호 1AB-1411-006038  신청일 2014.11.23. 15:13:57 
제안인성명 임병기  연락처 (010-) 
주소 [704-868]  대구광역시 달서구 ,  
이메일 lbk0202@hanmail.net   기여도 100 
공개여부 공개
진행상황통보방식 이메일
※ 본 제안은 ‘채택여부 심사’시에 검토의견이 이메일로 직접 발송됩니다.
제안신청내용
제안정보 테이블
제안제목

함양초교 교정의 비지정문화재 함양박물관 이전 건

 

개요

우리문화유산 답사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간 함양은 수차례 다녀왔으며 함양의 지정은 물론 비지정 문화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11월 22일 안의면 대대리마애여래 입상 답사후 몇몇 함양의 문화재를 다시 둘러 보았습니다. 마침 대덕리 마애불 답사를 위해 가는 도중에 함양 박물관이 조만간 오픈 한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습니다.

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함양 군민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몇 점 문화재에 대하여 박물관 야외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해줄 것을 건의 합니다. 여러 문제를 예상하여 당장 옮겨도 문제가 없을 함양초교 교정 화단의 석조물 2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위치:함양초교 교정 화단(학사루 횡단 보도 건너 함양초교 교실 전 좌측 화단에 위치)
2. 종류
-. 석탑 면석(우주가 한개 새겨져 있음) 1개 / 첨부 1
-. 석탑 배례석(장방형 석재로 상부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음)
-.시대:나말여초 추정 / 첨부2
-.기타:화단을 조성한 사업자를 수소문하면 원위치 및 더 많은 석조부재 확인 예상 됩니다

그외에도
휴천면 운서리 운암마을 석조여래좌상(첨부 3)과 광배, 장기적으로는 상림, 함양고교 및 함양중교의 석불좌상도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현황 및 문제점

소중한 불교문화재가 함양초교 교정에 방치되어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도난의 우려가 큼 이번에 개관되는 함양박물관 야외에 전시 희망

개선방안  
기대효과 석탑배례석은 함양에서 처음(?) 알려진 문화재로 보여 함양의 불교문화재 위상을 제고 할 수 있으며, 함양군민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관람 할 수 있어 관람객의 호응도가 좋을 것으로 사료됨.
첨부파일 첨부파일 운암5.JPG [1 MB]
첨부파일 함양초3.JPG [1 MB]
첨부파일 함양초2.JPG [1 MB]  

 

학사루

 

 

함양초교

 

 

배례석

면석

 

2014.11.22

 

 

그리고

2014년 12월

함양군청문화관광과에서

아래 내용의 기가 막힌 불채택 회신이 왔다.

(담당자는 밝히지 않는다)

허공을 향하여

자동소총을 난사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미친게 분명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왜 이 지랄부루스 일까?

 

 

환장 하겠더라!!!

함양과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다시

화를 억누르고

재심사 요청을 하였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죄 때문에....

 

=====================================================================================================

 

***재심사 요청 사유

 

불채택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무성의한 기가 막힌 답변입니다.

군청 바로 옆에 있는데 혹 가보시고 하신 답변인지 묻고 싶습니다.

화단을 조성한 업자가 석탑부재인줄도 모르고 조경 목적으로 사용한 것을 학생들의 교육목적으로 사용한다구요?

함양초교 교직원은 물론 졸업생 중에도 이부재가 석탑 부재인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자리에 있었던 부재라는 말씀 어이가 없습니다.

심지어 함양초교 향토자료관에 보관중이던 유물도 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그자리에 두고 교육목적 활용?

지금까지 문화재인 줄도 모르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주변 부지가 협소하다는 말씀?

정말로 석탑재를 보신 분의 말씀이신지요?

자리가 넘쳐도 넘쳐 납니다.

자리가 없다면 지하 수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도난 방지를 위해서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신문고에서 주관하시면 신문사 기자. 박물관 학예연구사.답변 주신 분. 교장선생님,

제가 직접 현장에서 직접 만나서 탑부재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

 

회신이 왔다.

소관부서 없이 회의개최?

1차 심의 회의를 개최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밝히는 내용이다.

 

 

그리고

2016년 5월 21일

박물관으로 옮겼겠지라는 기대감으로 함양초교 교정에 가보았더니.

그냥

그자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순진했나 보다.

 

마지막으로

박물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데스크에 여성 근무자만 있었으며

학예사와 관장님은 체험 학습 인솔하러 출타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내명함을 건내주며

전화를 부탁드렸지만, 아직 묵묵 부답이다.

 

함양군수님께

전화 한 통 때리고 싶었지만

이제

포기 할란다!!!

 

우리 비지정 문화재 현실인 것을...

 

나 같은 놈이 뭐길래!!!

 

2016.06.05

 

*참고로

함양에 남아 있는

승안사지 석탑. 벽송사 석탑. 상무주암 석탑. 등구사지 석탑. 금대암 석탑

그 어느 탑 앞에도 배례석은 없다.

 

함양초교 석탑 배례석

하한선이 고려 중기 이전인 함양 유일의 배례석이다.

하지만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

도난의 위험에 노출 된 상태로...

300x250
300x250

'경상남도 > 함양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양...덕봉사지 부도전  (0) 2016.06.07
함양...도천리 소나무  (0) 2016.06.06
함양...엄천사지 부도  (0) 2016.06.04
함양...영은사지 석장승  (0) 2014.12.18
함양...운암마을 석불좌상  (0) 2014.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