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영은사지 석장승

임병기(선과) 2014. 12. 18. 07:47
300x250
300x250

 

장승

늘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어린시절

나의 고향에서 뵙지 못했지만

시장 간 할머니를 기다리던

고향 동구에서 함께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데자뷰???

 

 

경상도의 사찰 석장승은 흔치 않다.

함양 영은사지

창녕 관룡사

의성 대곡사

상주 남장사

양산 통도사

 

2014.11.22

 

 

 

 

 

 

2014.11.22

 

 

백전면 백운리 옛영은사터에 자리한 장승이다. 본래의 위치라면 영은사는 이보다 윗쪽 현재의 백운사가 아니었을까? 가까운 남원에는 석장승이 많이 분포되어있지만 함양 벽송사 목장승 처럼  경상도의 사찰 석장승은 드물다. 예를 들면 사찰 경계석인 통도사 석장생.창녕 관룡사.의성 대곡사.상주 갑장사에 조성되어 있다.

 

답사기에서 여러번 기술했지만 장승 조성 목적은  위치에 따라 경계석. 이정표.당산.마을 지킴이. 고을막이.산천비보.수구막이 기능을 가진다.뿐만 아니라 민속에 있어서는 기자설의 대상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영은사지 석장승은 사찰 경계석과 더불어 사악한 무리의 절집 출입을 단속하는 목적으로 세웠을 것이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변강쇠의 고향이 함양 아니었냐라고 넌지시 묻자 해설가 답게 변강쇠와 옹녀의 해후 과정을 재미있게 이야기 했다. 아래 글은 2008년 나의 벽송사 답사기에서 언급했던 가루지기타령의 안태고향이 함양이라는 관련자료 이다..

 

"요즈음 지자체의 전시행정이 난무하고, 돈으로 떡칠하는 소모성 축제와 일과성 감각적인 오락위주 놀이문화가 만연하는 트렌드에서 지리산 자락 소읍 함양군이 변강쇠와 옹녀 부부가 살던 곳이 함양이라고 주장하며 가루지기타령의 안태고향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다른 지자체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신재효의 여섯 마당 판소리 중 가루지기타령(일명 변강쇠가)은 사설에는 들어있으나 실제 창으로는 전수되지 못하고 구비문학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루지기타령의 주인공 변강쇠와 옹녀 부부가 살던 곳이 함양이라는 증거를 잡았다는 것이다. 함양군 기획감사실(박영일 실장)은 성두본 변강쇠가를 분석, 지정학적인 위치가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인 오도재 일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 청석관에서 만나 도방살이(도회지 삶)를 하게 되며, 옹녀는 소박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 들기름장사 등 행상을 하나, 천하잡놈 변강쇠가 살림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늘 술타령을 하고 싸움질 하고 강간을 일삼아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어렵다.

이에 땅이 순후하고 생리가 좋다는 지리산을 찾아오게 된다. '지리산중을 찾아가니 첩첩한 깊은 골에 빈집 한 채 서 있으되, 임진왜란 8년 동안 어떤 부자가 피난하여 이집을 지었는지 오간팔작 기와집이 다시 사람 살 일 없고 흉가로 비어있어서 누백년 도깨비 동청이요, 묏귀신의 사랑(舍廊)이라'. 변강쇠 부부가 산속의 빈 기와집에 들어가 살게 될 집에 대한 표현이다. 군은 '누백년 도깨비 동청'과 '묏귀신의 사랑'은 다름 아닌 오도재의 산신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산신각은 천수백년 전부터 오도재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70여 년 전에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던 것을 지난해 복원했다.

또 군은 이외에도 변강쇠전의 배경이 함양군이라는 근거로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면서 '등구 마천 백모촌'의 초군들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을 들고 있다. 이들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을 지칭한 것으로 '등구'는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등구마을 일대를 지칭하고, '마천'은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가흥리 군자리 일대를 말하며, '백모촌'은 마천면 백무동의 옛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 변강쇠가 나무는 하지 않고 나무 대용으로 장승을 뽑게 되는데, 그 장승이 서있던 곳이 '등구마천 가는 길'에 서있던 장승이며 그 장승은 변강쇠에게 불 태워지게 되자 억울한 귀신이 돼 대방전 장승(인간세계의 임금에 해당됨)에 변강쇠의 악행을 고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는데, 성두본 원문에 '소장(小將)은 경상도 함양군에 산로(山路) 지킨 장승'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변강쇠가 불로 땐 그 장승의 신분은 함양군의 산로를 지키는 장승, 즉 함양군의 지리산 가는 길을 지키는 장승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변강쇠전에 등장하는 초군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저 건너 행화촌'이 나오는데, 오늘날 살구징이라고도 불리는 행화동을 일컫는 것으로 오도재 정상으로부터 600여 m 아래에 실존하는 마을이다. 박 실장은 "변강쇠전은 인문학적으로 소중한 함양군의 지적 재산"이라면서 "앞으로 변강쇠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화관광, 식료품 관련 사업들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함양군은 지리산조망공원내 성문화공원을 만들어 변강쇠를 테마로 한 장승을 비롯한 성문화 시설물을 선보였다."

 

우호대장군.  몸에 새겨진 글씨로 미루어 사찰 경계석 의미보다는 호법신장 기능의 석장승으로 판단된다.얼굴형이 뚜렷하고 상투를 얹은 듯한 머리. 왕방울눈. 주먹코. 다문 입.수염을 길게 표현하여 남성상으로 보이며 신장의 강한 인상보다는 우리 나라 여타의 다른 장승처럼 오히려 소박하고 익살 스럽다.

 

좌호대장군. 조형상의 특징은 우호대장군과 차이가 없다. 다만 남성 상징의 우호대장군의 여성파트너로 조성되었을 것이다.신체 아래에 영조 41년(1765년)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영은사의 화려했던 시절이 영조재위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사진의 현재 백운암의 목조아미타, 동종도 동시대의 작품으로 보이고 그 시절 주석했던 스님들의 자취는 부도로 전해온다.

 

 

 

 

백운암 목조아미타불.동종...출처/다음카페 상구보리하화중생 

 

 

 

백운암 부도(영은사지 부도)..출처/다음카페 상구보리하화중생

 

여기를 통과하여 백운암 까지 달리고 싶었지만 눈길이 염려되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과유불급을 되내이며 백운암 부도.동종.목조아미타불과의 인연은 미루어야했다. 이리 좋은 사람들과 동행이라면 꽃 피는 춘삼월. 녹음 짙은 여름날. 덕유산에 만산홍엽이 절정인 만추. 삭풍이 살을 애는 엄동설한. 어느시절인들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2012.02.04

 

 

300x250
300x250

'경상남도 > 함양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양....이제 잊을란다!!  (0) 2016.06.05
함양...엄천사지 부도  (0) 2016.06.04
함양...운암마을 석불좌상  (0) 2014.12.17
함양...대덕리 마애보살입상  (0) 2014.12.16
함양...학사루.함양초교 석탑재  (0)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