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무위 도제조 민겸호 영세불망철비

임병기(선과) 2016. 5. 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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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제조민겸호영세불망비武衛 都提調 閔謙鎬 永世不忘碑

산청읍 차탄리 농공단지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다. 현위치에 본래부터 서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차탄리車灘里를 단서로 불망비의 유래를 추적하였지만  냇물이 수레바퀴처럼 빙빙 돈다고 하여 "수레여울" 이라는 순우리말의 한문식 표기임을 알았을 뿐이다.

 

 

명문에 대한 자료가 없어 짧은 실력에 대형 옥편을 들고 머리에 열이 나도록 씨름하였지만 음차와 해석은 자신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중앙

무위도제조민겸호불망비武衛 都提調 閔謙鎬 永世不忘碑 도제조 민겸호는

 

좌측 상하단

세목정봉 稅木精捧 세목을 정확하게 징수하고

정비엄칙 情費嚴飭  정비를 배제하고 (*情費: 조세를 바치 때 관행으로 세리에게 주는 몫)

 

애민혈구愛民恤救(?) 백성을 사랑하고 구휼하였으며

지주일국砥柱一國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지녔다.

 

우측 상하단

하외소읍遐外小邑 멀리 벽지 산청고을에

편몽은덕偏蒙恩德  특별히 은덕을 베풀었다.

 

만구성비萬口成碑 여러 사람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계산생색稽(?) 山生色 머리 조아려 은공을 갚고져 한다.

 

후면

신사사월일 입辛巳 四月 日 立 1881년 4월 세움

상납색리 오재기上納色吏 吳在基  물품조달 아전 오재기

감동색리 조광원 監董色吏 曺光元 감독 아전 조광원

 

도제조 민겸호가 산청에서 발생한 어떤 연유로 인해 세금을 감면해준 것을 기리는 불망비로 해석된다.

 

1881년 민겸호가 대동법 주무부서인 선혜청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공물로 징수하던 미곡을 감해주었던 것 같다. 따라서 1880년 산청에서는 가뭄, 태풍 등의 자연 환경으로 인해 흉년이 들었음을 추측해본다(물론 구체적인 자료 검색 없이 개인적인 추측이다)

 

 

민겸호가 누구인가? 

민겸호(閔謙鎬,1838-1882)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외척이다. 돈령부판사 민치구의 셋째 아들이며, 민승호의 친아우이다.여흥부대부인의 친동생이자 명성황후의 친척 오라버니이며, 흥선대원군의 처남이다. 고종의 외삼촌이다. 민영환, 민영찬 형제의 아버지였다. 형조판서, 이조판서, 어영대장, 병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민씨 세도의 지도자였으며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도를 초빙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차별대우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미루다가 14개월만에 지급했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임오군란 (1882)때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는 윤익이고 시호는 충숙공이다. 

 

그런데

1880년 가을(벼농사 흉년 시기)~1881년 4월(비석 건립시기)은 민겸호가 정치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 와중에 자리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 시기에 한양에서 천리 먼 길 떨어진 산청까지 선혜청 도제로 벼 작황을 살피기 위해 순시 하였을까?

(별게 다 궁금한 중생이다)

 

 

 

 

세목정봉 稅木精捧 

정비엄칙 情費嚴飭  

 

하외소읍遐外小邑 

편몽은덕偏蒙恩德 

 

 

애민혈구愛民恤救(?)

지주일국砥柱一國 

 

만구성비萬口成碑 

계산생색稽(?) 山生色

 

 

우리나라의 철비(목록,사진)

http://cafe.daum.net/moonhawje/MebK/321?q=%EC%9A%B0%EB%A6%AC%EB%82%98%EB%9D%BC%EC%9D%98%20%EC%B2%A0%EB%B9%84(%EB%AA%A9%EB%A1%9D%EA%B3%BC%20%EC%82%AC%EC%A7%84)



 

 

신사사월일 입辛巳 四月 日 立

 

 

상납색리 오재기上納色吏 吳在基  물품조달 아전 오재기

감동색리 조광원 監董色吏 曺光元 감독 아전 조광원

 

 

 

2016.05.11

 

*답사를 도모하는 사람은 도로와 철비 사이 도랑을 조심하기 바란다.

공단에서 흘러 나온 돌가루와  물이 혼합된 돌가루물(?)이 퇴적되어 있어 발목이 빠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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