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진주시

진주...명석 자웅석

임병기(선과) 2016. 5. 1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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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면 신기리 도로변 작은 전각이 보인다.

 

 

명석각鳴石閣.

운돌?

돌이 울었다?

 

 

암수바위이다.

숫돌은 귀두가 볼록한 남근 형상을 하고 있다.  암돌은 족두리를 쓴 여자 모습이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하천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으며 1970년 삼짇날(음력 3월 3일)에 옮겨 1973년 명석각에 봉안하였다. 지금도 음력 삼짇날 정오(낮 12시)에 명석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제례를 지낸다고 전한다.

 

 

청동기시대 거석으로 조성된 듯 보이며, 진주읍지 등에 실린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자웅석을 숭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석면鳴石面 지명도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 같다.

 

"1231년(고려 고종 18)에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일설에는 고려 공민왕 때 여진 및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쌓을 때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 지역 광제암(廣濟庵)의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급히 걸어오는 한 쌍의 돌을 만나서 “무령석물(無靈石物)이 어디로 가느냐?”하고 물으니 돌들이 “진주성 부역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려고 성 돌이 되고자 갑니다.”하고 답하였다.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하자 돌들이 애석하여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더니 그 자리에 섰다. 그 뜻이 가상하여 이 자웅석을 ‘운돌’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또 스님이 감복하여 “거룩한 보국충석(輔國忠石)이여!”하며 아홉 번 절을 하였다고 하여 그 위 골짜기를 구배곡(九拜谷) 또는 구복곡(九伏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국가 대사가 있을 것 같으면 운돌의 눈물인듯 암석 표면에 물이 흐르며 예언의 징조를 보인다고 한다." ...한국민속신앙사전

 

 

자웅석찬雌雄石讚...두사충杜思忠

 

뇌뢰유석磊磊維石 크나큰 그 돌

낭랑기명琅琅其鳴 낭랑한 그 울음이여

기명굉대其名宏大 그 이름의 크고 장하여

어천만령於千萬齡 천만년 빛나리라

 

*두사충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명나라 장군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한 인물이다. 대구에는 그를 모신 모명재가 있으며, 대구에서 가장 큰 행정구역인 남구 대명동大明洞 유래를 낳게한 인물이다(옛님의 숨결 262 참조)

 

두사충杜思忠

대구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 사람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다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 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시의 내용은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접 받는 자웅석이 아닐가?

이것이

민초들의 심성이다.

산업화, 세계화도 피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어찌할 것인가?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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