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산천재.남명 묘소.덕천서원

임병기(선과) 2016. 5. 9.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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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이들이 초교시절이었으니 20년도 더 지난 시절에 첫인연을 지었었다.

그후에도 대포리석탑,내원사, 삼장사지석탑,대원사 길목에 위치하여 숱하게 스쳐 지났지만 동선에 쫒기어 눈인사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나홀로 들린 오늘은 느긋하게 완상하였다.


 

멀리 천왕봉이 아득하다.


남명 조식

연산군 7년(1501)~선조 5년(1572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출처/다음 백과사전

 

산천재山天齋

61세 되던 1561년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여기에서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이곳에서 수학한 정인홍, 곽재우 등의 제자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활동하게 된다.


 

산천재()..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전면에는 퇴칸을 두었으며 양협실 앞에는 평난간을 둘렀고 측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측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전서채의 산천재’ 편액은 송하(松下) 조윤형(1725~99) 글씨이다.


송하 조윤형(松下 曺允亨/ 1725∼1799)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의 스승인 백하 윤순(白下 尹淳)의 사위이다. 또 시, 서, 화의 삼절(三絶)로 불리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의 장인으로 첩파(帖派)의 맥을 이은 조선 후기의 명필이다.


그는 본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글씨로 1766년에야 벼슬길에 올랐는데 임금의 지우를 입어 예조정랑, 책례도감상례, 안악군수, 성주목사, 호조참의, 공조참판, 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송하는 어려서 원교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체의 글씨에 능했는데, 그 중에서도 시체(時體)를 본받아 획법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원교를 본받은 초서를 특히 잘 썼으며 팔분(八分)에도 장기가 있었다고 한다. 글씨로 벼슬을 할만큼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송하는 당시 공관의 금석과 편액을 도맡아 썼다고 하는데 사찰 편액으로는 공주 마곡사 <심검당>, 김천 직지사 <황악산직지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산천 山天

주역의 대축계로大畜卦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라고 안내문에는 설명되어 있다.


대축계大畜卦

"주역』에서 ‘대’는 양(陽)을 가리키고, ‘축(畜)’은 ‘축적(蓄積)’과 ‘차지(沮止)’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전(大象傳)」에서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大畜)이니 군자가 대축괘의 상을 본받아서 앞의 말과 지나간 행동을 충분히 알아 그 덕을 쌓는다.”고 한 것은 전자의 경우이며, 효사는 후자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내괘인 건은 외괘인 간(艮)으로부터 저지되어 행위를 자제하며, 외괘는 내괘를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간(艮)과 건(乾)은 모두 양괘(陽卦)이기 때문에 양이 양을 저지하는 ‘대축(大畜)’이 된다. 


이 괘는 산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하늘의 기운을 저지하는 형상이며, 동시에 하늘의 기운이 산에 막혀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산 속에 축적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학문과 도덕이 내면에 온축되어 있는 군자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괘사에서 “대축은 올바름을 지켜야 이롭다. 집에서 먹지 말아야 길하니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고 했는데, 이 말은 군자는 이단(異端)에 빠지지 말고 올바른 학문을 축적해야 하며, 학문이 축적되었으면 집에 머무르지 말고 천하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내괘인 건(乾)은 강력한 상향성을 갖기 때문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해 재앙을 가져오기가 쉽다. 그러므로 초구에서 “위태로울 것이니 그치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다.또한 응효(應爻)인 육사(六四)에서 “어린 송아지의 빗장이니 크게 길할 것이다.”고 하여 송아지 뿔에 나무를 가로 대서 받는 것을 억제하듯이 초기에 적절히 제지(制止)해야만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그러나 대축이 극치인 상구(上九)에 오면 “사통팔달(四通八達)한 하늘 길이니 형통할 것이다.”고 하여 모든 제약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극측반(極則反)’의 역리(易理)인 것이다."...출처/다음 백과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남명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디인들 향기로운 풀 없을까마는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다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라네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얼 먹을 것인가?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有餘  십리 은하 같은 물 마시고도 남겠네


 산천재 주련


춘산저처무방초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디인들 향기로운 풀 없을까마는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다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라네

 

 

백수귀래하물식白手歸來何物食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얼 먹을 것인가?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有餘  십리 은하 같은 물 마시고도 남겠네


 

천장의 수복강녕 글씨


 

토벽에 그려진 복원 벽화

남명의 은일 사상을 함축한 벽화이다.


바둑두는 4명의 처사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산시성 산상에 은둔한 동원공.하황공. 가리계.녹리선생이 세상사를 잊고 바둑을 두며 초연하게 살아갔다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윤이 밭가는 그림

맹자에 나오는 "이윤이 유신의 밭에서 밭갈며 요순의 도를 즐기었다."는 기록을 그린 그림

이윤은 탕임금을 도와 폭군 걸왕을 멸하고 은나라를 세웠다.


 

허유가 귀 씻는 그림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하자, 받지 않고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며 영천에서 귀를 씻고 기산으로 은거하였다는 고사도이다.


 

목판각

남명선생문집책판南冥先生文集冊板

선조 37년(1604)에 선생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에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후 산해사오연원록, 연보, 언행록등이 추가로 간행되었다. 또한 고종 31년(1894)에 이들 문집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이 간행하였으며, 광무 1년(1897)에 선생의 연보를 수정, 보완하여남명선생편년을 간행하였다.


 

남명南冥梅

450전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산천재에  심은 매화로 단속사지 정당매, 남사마을 원정매와 더불어 산청 3매로 불리운다.


우음偶吟 우연히 읊다...남명


주점소매화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고성독제요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서경)을 읽는데...

창명성두근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은 밝아지고

강활수운요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물 위에 떠 있는 구름이 아득하구나



 

남명기념관

예전에 보지 못했던 건물로, 산천재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으나 기념관 내부는 건너 뛰었다.

 

남명기념관의 남명신도비


남명선생신도비. 남명선생의 신도비는 처음에는 내암 정인홍이 지은 것이었으나 인조반정 후 철폐되었고,  약 60여년 후에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문을 받게 되었다. 이 가운데 미수가 지은 글이 신도비로 서게 되었고, 우암의 글은 남명선생을 모신 합천 용암서원 묘정비로 세워졌으며, 조용주의 글은 비석으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수의 글로 세운 신도비가 철폐되고, 현재의 신도비는 우암이 지은 글로 세운 비석이다.



남명 묘소

1572년 음력2월 8일 72세로 별세하자 3개월 빈장 후 선생이 생전에 터를 잡은 산천재 뒷산인 이곳에 모셨다.

 

남성묘소 묘비

 

남명 묘소 묘비

징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남명조선생지묘

徵士贈大匡輔國崇祿대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

 

1956년 3번째로 세운 비로  권창현權昌鉉의 글씨이다.

귀부는 본래의 귀부처럼 보인다.

 

* 징사徵士: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은 선비

 

 

귀부

난해한 귀부이다.



남명묘소 아래에 3기의 비석.

이 비석들은 남명과 두번째 부인 은진 송씨의 묘비로, 마모되고 깨어져  다시 갈아 세우기 이전의 비석이다

작은 비석은 숙부인 은진 송씨 묘비이며, 바깥쪽은 대곡 성운선생이 지은 묘갈명을 탁계 전치원의 글씨로 처음 세웠던 비석이며, 안쪽에 있는  큰 비석은 현재 묘비가 세워지기 전에 서 있었던 것으로 한국전쟁의 상흔이 배여 있다.

 

 

원 묘비

징사증대광보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남명조선생지묘

徵士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

 

친구 大谷 成運(대곡 성운)이 찬撰하고제자인 濯溪 全致遠(탁계 전치원)의 글씨

 

 

2번째로 세운 묘비.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숙부인 송씨 묘비.

현재 묘비 이전의 원묘비이다.

글은 둘째 아들인 차마가 지었으며, 장자 차석이 대부 벼슬을 지내, 숙부인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좌우의 망주석

 

 

 망주석 상부

 

 

좌측 망주석 세호

 

 

우측 망주석 세호  

 



남명 묘소 앞 숙부인 은진 송씨 묘소이다.

정경부인 남평조씨의 묘는 김해 산해정 앞산에 있다고 한다.


숙부인 은진 송씨.

남명의 부실副室로 송린의 따님이다. 송씨는 남명이  50세 때 19세의 나이로 부실이 되었다.

남명은 서울서 내려와 자굴산에 머물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에 있는 처가로 이사를 하였다. 45세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상 후 홀로 부모의 묘소가 있는 고향 합천 삼가로 돌아왔다. 삼가로 와서 선비 송린(1509-1573)의 딸을 부실로 맞이했다고 한다.

 

 

덕천서원 홍살문 옆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덕천서원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로는 사당, 신문, 강당, 동재와 서재, 외삼문 등이다.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시정문(외삼문)


시정문時靜門 현판은 서원 강당인 경의당  현판을 쓴 약헌(約軒) 하용제(1854~1919)의 글씨로 추정한다. 산청(단성면) 남사마을 출신인 약헌은 무과 급제 후 벼슬을 하기도 했으나 면우 곽종석의 가르침을 받으며 유학에 천착한 인물로, 1919년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했다가 투옥된 뒤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금년 31살인 큰딸이 초교시절 가족여행 중에 처음 들렸던 덕천서원. 그때의 글 몇 줄이 남아 있다.


"소위 우리나라의 5대 서원이라는 안동 퇴계의 도산서원, 서애의 병산서원, 풍기 안향의 소수 서원, 안강 회재의 옥산서원, 현풍 한훤당의 도동서원과 마찬가지로 남명 조식을 향사하는 덕천 서원도 낮은 야산을 등지고 덕천강이 앞에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에 자리잡고 있다. 공립 중등교육 기관인 향교가 고을의 중심부에 있는데 반해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이며 고을 외곽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통이며 풍수의 길지를 고려한 입지 선정인 것이다. 

길옆 서원목인 은행나무는 남명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 오는 400년이 넘은 수령에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으며 남명 사상의 핵인 경, 의를 품은 교육 공간인 경의당은 단촐하고 수수하며 수더분하나 마지막 처사 남명의 기가 스린 듯 범접하지 못 할 묘한 기류가 가득하다.평지에 자리한 서원의 전형배치인 전학후묘의 구조에 충실하여 잔디가 깔린 경의당 뜰에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고 강학 공간 뒤로는 남명과 제자 정인홍을 배향하는 숭덕사당이 조용히 앉아 있다. 철저히 장식을 배제하여 희생단, 정료대도 보이지 않는 덕천서원은 중종 비인 문정왕후가 전횡을 부리던 시절에 왕후를 한낱 과부 몰아부친 그 유명한 단성소의 기개를 간직한 채 무심히 답사객을 바라보며 오늘날의 세태에 한숨 짓는 듯해 마음이 아리다. 

남명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까닭인지 사림의 유학자, 특히 불의에 항거하여 임란시 곽재우 정인홍등 의병을 유난히 많이 배출하지 않았는가?  군사부일체이거늘 사도가 짓밟히고 지식의 전달자로만 스승이 인식되어지는 우리 교육 현실을 산천재 맞은 편 야산에 잠든 남명은 무어라 할 것인가? 

털자! 
털어 버리자! 

덕천서원 앞 덕천강가에 자리 잡은 정자 "洗心亭"에 올라 사악한 맘 씻어 버리고 산천재에서 천황봉 바라보며 어머니의 품안을 되새기며 가족들과의 길고도 짧은 산청 답사길을 마쳐야 겠다. 아이들의 느낌은 훗날의 숙제로 남겨 두어야 겠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여행기를 여기에 올리지 못 함이 못내 아쉽다."


 

 

덕천서원(德川書院)’ 편액은 모정(慕亭) 배대유(1563~1632)의 글씨라고 한다.

학자이자 문신인 모정은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초서·예서에 뛰어났다.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는 ‘도동서원’ 사액현판이 그의 글씨이고, 내암(來庵) 정인홍(1535~1623)이 지은 남명 신도비명 글씨도 모정이 썼다. 모정은 내암의 제자이다. 

 

 

강학공간인 경의당敬義堂

약헌(約軒) 하용제(1854~1919)의 글씨. 외삼문인 시정문 글씨도  그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경의당 측면 

 


경의당 좌우 협실 정면

 

 

경의당 후면

 

 

 

東齋동재. 修業齋수업재

일반적인 서원배치에서 동재는 강당을 등지고 좌측에 자리하지만 덕천서원 동재는 우측에 위치한다.

 

 

西齋서재.進德齋진덕재

 

 

사당 내삼문

 

 

숭덕사.

남명과 내암 정인홍을 모신 사당이다.

 

 

숭덕사 어칸 창살

 

 

숭덕사 측면 호랑이 벽화

일반적으로 좌청룡 우백의호 방위 개념, 벽사의 상징, 풍수 비보책 등으로 조성된다.

 

 

숭덕사 축면 용 벽화

 

 

망료위望燎位? 

제향을 지내고 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망예위라고도 한다. 도동서원에는 담장에 설치 되어  '차"라고 불리우며 왕릉에는 정자각 뒤에 '예감'이라는 동일 목적의 시설물이 있다.

 

 

세심정 


남명의 유명한 단성소丹城疏의 일부를 옮기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신 조식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60에 가까웠으나 학문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兵科)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쇄소(灑掃)의 일도 맡기에 부족합니다. …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해,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나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100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해 지탱해 나갈 수 없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은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산만 불리는데도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은 자기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로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소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은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출처/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영남일보.
김봉규기자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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