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산청군

산청...단속사지

임병기(선과) 2016. 5. 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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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초입

남명의 시비가 발길을 잡는다.

 

언제 처음 연을 맺었던가?

아마 마지막은 5~6년전 우리  카페회원들과의 산청답사 이었겠지?

 

2001년 봄에도 들린 듯

몇 줄 글귀가 보인다.

 

斷俗 
俗世間의 緣을 끊고 

俗離 
火宅을 벗어나고 

極樂이란 말인가? 

묻힌 金堂 
흥건히 고인 사람의 情 


살맛나는 娑婆의 香인가? 

병든 지붕돌 추녀 
허허로운 風磬의 그림자 

덧없음의 劃을 탓하는 것인가? 

2001.봄 

 

 

단속사

"삼국유사에는 단속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 신라 경덕왕 22년 계묘(763년)와 당唐 천보天寶 7년 무자(748년), 두 개의 설이 실려 있다. 전자는 효성孝誠 - 경덕왕조의 인물인 신충信忠이, 후자는 경덕왕대의 직장直長 이준李俊이 단속사를 발원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충은 삼국사기에 경덕왕 16년(758)부터 22년까지 상대등을 지냈다고 했고, 이준은 같은 책에 등장하는 대나마 이순李純과 동일인물로 보이는데, 일찍이 나이 쉰에 출가해 절을 짓겠다는 서원을 따라 조연曺淵에 있던 작은 절을 크게 중창한 것이 바로 단속사이며, 이준 자신도 공굉장로라는 이름으로 승려로써 20년을 머물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단속斷俗이라는 이름에는 신충의 입산과 관련해 '세속(과의 인연)과 절연한다'는 뜻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때의 유명한 화공 솔거가 그린 유마거사상維摩居士象 단속사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당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선사  신행이 혜공왕 15년에  단속사에서 입적하였으며, 헌덕왕憲德王 5년 계사(813년)에 당시의 병부령 김헌정이 비문을 지은 신행의 비석이 세워졌다(비석 자체는 후에 유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속사가 위치한 골짜기 입구에는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과 함께 최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그 독서당은 훗날 고려 시대의 고승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의 영당影堂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대감국사비는 고려의 평장사 이지무가 비문을 짓고 탄연 자신이 글씨를 쓴 비석이었다. 이 밖에 한림학사 김은주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도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惠諶의 비문에는 혜심이 고종 7년(1220년)에 단속사에 주지로 머물렀던 적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세종6년(1412년) 당시 단속사는 원속전 1백 결에 주석하는 승려가 1백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강회백(姜淮伯, 1357 ~ 1402)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면서 심었던 매가 경내에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강회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의 이름을 따서 정당매政堂梅라 불렀는데, 매화나무가 말라 죽으면 그 후손들이 그 자리에 다른 매화를 이어 심었다 한다.단속사는 조선 후기에 폐사되었다."

 

위의 글은 위키백과에 등재된  단속사지 설명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답사매니아들이 인지 하고 있는 고려 무신정권과, 폐사의 관한 글은 누락되어 있다.

 

고려 무신정권 시절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진각국사 호시탐탐 권력을 탐내는 아들들을 멀리하려는 의도로 자신이 기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인 만종(萬宗.최우)과 만전(萬全) 두 아들을 수선사로 보내 혜심의 제자가 되도록 했다.

그들은 얼마 뒤 선사禪師에 제수됐고 거처를 단속사와 쌍봉사로 각각 옮겨갔다. 하지만 그들 형제는 사찰에서 고리대금 등 사업으로 경상도 농민을수탈하여 재산을 축적해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샀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단속사 폐사의 원인은 무엇일까?

임란, 병란 등의 전화도 입었지만 가장 직접적인 연유는 숭유억불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유생들의 종교관이었다. 

1568년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 성여신成汝信과 유생들에 의하여 사찰의 불상과 불경, 판목 등이 불살라짐으로써 단속사는 급격히 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전한다. 

 

사찰 폐사를 꿈에도 생각못했던 남명선생은 탁영이 지리산을 기행한 지 70년여 년이 지난 1558년. 그리고 제자에 의해  단속사가 폐사에 길로 접어들기 10년 전 시 한 수를 읊었다.

   

솔 아래 천년 옛 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망칫돌이 대신했네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우리에게 가장 빈번하게 회자되는 단속사지에 관한 자료는 김일손의 속두류록(, 1489)일 것이다. 탁영은 1489년(성종 20년) 4월14일~4월 28일 지리산 기행을 하였으며 단속사에는 4월 16일에 들렸다. 당대 대유학자의 불교관과 단속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해석본을 다음에서 검색하였다.

 

(16일, 갑진일)  

이튿날 천령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말을 타고 1리쯤 갔다. 큰 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모두 엄천(巖川)의 하류였다. 서쪽으로 푸른 산을 바라보니 봉우리가 겹겹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모두 두류산의 지봉(支峯)들이었다. 정오에 산음현(山陰縣, * 산청군)에 이르렀다.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았다.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물은 저렇게 밤낮없이 유유히 흘러가는구나하는 감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골라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장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계승할 수 있으랴.  

 

산음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렀다. 지나온 산천마다 맑고 빼어나며 밝고 아름다웠으니, 모두 두류산이 간직한 운치이다. 신안역(新安驛) 10리 지점에서 배로 나루를 건너 걸어서 단성에 들어가 투숙했다. 나는 이곳을 단구성(丹丘城) 이라고 바꾸어 부르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 단성의 수령 최경보(崔慶甫)가 노자를 후하게 보내왔다. 화단에 오죽(烏竹) 1백 여 그루가 있어, 지팡이 될 만한 것을 골라 두 개를 베어 백욱과 나누어 가졌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맑고 시원한 시냇물이 들판의 서쪽으로 흘러들었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 3, 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었다. 계곡에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광제암문(廣濟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의 피어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를 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 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였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속에 절이 있고, 지리산 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문 앞에 비석이 서 있는데, 고려시대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대감시명(大鑑師銘, * 대감국사 탄연의 비명)이었다. 완안(完顔)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니 오래된 불전(佛殿)이 있는데, 주춧돌과 기둥이 매우 질박하였다. 벽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쓴 두 영정(影幀)이 그려져 있었다. 이 절의 승려가 말하기를,  “신라의 신하 유순(柳純)이 녹봉을 사양하고 불가에 귀의해 이 절을 창건하였기 때문에 단속(斷俗)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비루하게 여겨 초상을 살펴보지 않았다.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 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고풍스러웠다. 들보와 기둥이 모두 삭았으나 그래도 올라가 조망하고 난간에 기댈 만하였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한다.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의 조부 통정공(通政公, * 여말 선초의 문신 강회백)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그루를 심었다.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자손들이 대대로 북돋워 번식시켰다고 한다.  북문으로 나와 곧장 시내 하나를 건넜다. 덤불 속에 비석이 있는데 신라 병부령(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었다. 당나라 원화(元和) 8년(813)에 세운 것이었다. 돌의 결이 거칠고 나빴으며, 높이는 대감사비에 비해 두어 자나 낮고,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북쪽 담장 안에 있는 정사(精舍)는 주지가 평소 거처하는 곳이었다. 정사 주위에는 동백나무가 많았다. 그 동편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세상에서 치원당(致遠堂)이라 전해온다. 당 아래에 새로 지은 가설물이 있는데, 매우 높아 5장(丈)의 깃발을 세울 만하였다. 이 절의 승려가 수놓은 천불상(千佛像)을 안치하려는 것이었다.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石佛) 5백 구가 있는데, 하나하나 둘러보니 그 모양이 각기 달라 그 기이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주지가 거처하는 정사로 돌아와 고문서를 뒤적거리며 살펴보았다. 그 중에 한지 세 폭을 연결한 문건이 있었는데, 정결하고 빳빳하게 다듬어져 요즘의 자문지(咨文紙)같았다. 그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國王王楷)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인종(仁宗)의 휘(諱)이다. 둘째 폭에는 고려 국왕 왕현(高麗國王王睍)이란 서명이 있으니, 곧 의종(毅宗)의 휘이다. 이 둘은 고려 국왕이 대감국사에게 보낸 문안 편지였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이라 씌어 있고, 황통(皇統)이라고도 씌어 있었다. 대덕은 몽고 성종(成그 시대를 고찰해보면 합치되지 않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황통은 금(金)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다.  

 

이를 보면, 고려 인종, 의종 부자는 이미 오랑캐의 연호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들이 선사(禪師)와 부처에게 이처럼 정성을 기울였건만,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에게 곤욕을 당했고 의종은 거제(巨濟)에 유배되는 화를 면치 못했으니, 부처에게 아부하는 것이 국가에 이익 됨이 없음이 이와 같도다.   좀먹은 푸른 비단에 쓰인 글씨가 있었는데, 서체는 왕우군(王右軍, * 왕희지)과 유사하고 필세(筆勢)는 놀란 기러기 같았다. 내가 도저히 견줄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이하도다. 또 노란 명주에 쓴 글씨와 자색 비단에 쓴 글씨는 자획이 푸른 비단에 쓴 글씨보다 못하였고, 모두 떨어져나간 간찰(簡札)이어서 문장도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육부(六部)에서 함께 서명한 붉은 칙서(勅書) 한 통이 있는데. 요즘의 고신(告身) 과 같은 것으로 절반은 없었다. 그러나 옛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보고 싶어 할 만한 물건들이었다.  

 

 

백욱이 발이 부르터 산에 오르길 꺼려해서 하루 쉬기로 하였다. 석해(釋解)라는 승려가 말벗이 되었다. 저물녘에 진주 목사 경태소(慶太素)가 광대 둘을 보내 각자 지닌 재주로 산행을 즐겁게 하였다. 또 공생(貢生) 김중돈(金仲敦)을 보내 붓과 벼루를 받들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  여명에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쓰고서 길을 떠났다. 광대가 생황과 피리를 불면서 앞장을 서고, 석해는 길잡이가 되어 동네를 벗어났다. 돌아서서 동네를 바라보니, 물이 감싸고 산이 에워싸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아늑하였다.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승려들이 사는 곳이 되었을 뿐 덕이 있는 고사(高士)들이 사는 곳이 되지 못하였구나!  

 

그런저런 기록이 남아 있는 단속사지에는 동서 삼층탑과 당간지주 만이 옛영화를 전하고 있다.

 

 

단속사지 동삼층탑

2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하기단은 면석과 저석이 일석이며 4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갑석은 4매 부재로 상부에는 2단 괴임이 조식되어 있다. 상기단 면석에는 1개 탱주, 양우주가 표현되었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만 보인다. 옥개석 물매는 급하지 않으며, 층급은 5단, 절수구를 두었고 풍탁공이 남은 모서리에 전각이 반전이 있다.상륜에는 노반과 보주, 앙화가 남아 있다. 탑신괴임은 위로부터 1.1.2개를 두었다.

 

 

 

 

 

 

 

 

단속사지 서삼층탑

 

2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하기단은 면석과 저석이 일석이며 4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갑석은 8매 부재로 상부에는 2단 괴임이 조식되어 있다. 상기단 면석에는 1개 탱주, 양우주가 표현되었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만 보인다. 옥개석 물매는 급하지 않으며, 층급은 5단, 절수구를 두었고 풍탁공이 남은 모서리에 전각이 반전이 있다.상륜에는 노반과 보주, 앙화가 남아 있다. 탑신괴임은 전층 2개이다.

 

 

 

 

 

 

 

 

석탑 앞쪽 송림사이의 당간지주

 

 

 

당간지주

지주 외연에는 윤곽대가 양각으로 둘 러져 있으며, 상부는 호형으로 다듬었다. 지주에는 방형 원형 방형 3개 간주공이 관통되어 있다.간공으로 미루어 석탑과 같은 9세기 초반의 석탑으로 생각된다.

 

 

 

 

 

 

그리움

그리움이겠지.

 

단속?

세속의 연을 잇고 싶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동서 삼층탑이다.

 

201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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