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옥천군

옥천...대성사 석불입상

임병기(선과) 2016. 4. 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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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성면 도장리 대성사

대성사 진입직전 국도변을 여러번 왕래하였고, 지난해에도 청성면사무소 석탑재를 비롯 옛님과 조우했었다.

그런데

다시 또 나투시는 옛님

비지정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완형 석탑,석불은 모두 뵈었다는 나의 건방진 자만심을 한방에 작살내려는 듯 그렇게 다가오셨다. 그러기에 옛님은 화수분이다!!!

 

 

스님을 찾아 뵈었다.

아니

오랫만에 들린 순례자가 반가운듯  스님께서 요사에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라신다.

 

무애스님

(우리 카페에 무애라는 비인간적인(?) 닉의 화상이 있는데...)

선친도 대성사의 주지로 계셨으며 스님의 속가 성씨가 옥천 육씨라고 소개하시며 불상의 내력을 간단히 말씀하셨다.

 

석불에 대한 유래는 전하지 않으나 옥천 육씨 족보에 성종 22년(1491년)에 석불이 있었다는 내용이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즉 그 이전에 석불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귀한 사료이다). 대성사가 위치하고 있는 대장리(예전 행정구역은 마장리)조선 성종 때 제주목사를 지낸 육한陸閑(조선왕조실록에 여러번 등장하는 인물이다)이 낙향하면서 제주도 조랑말을 가져와 길러 마을 이름이 마장리馬場里가 되었으며 옥천 육씨 집성촌이라고 한다. 육영수여사의 선조들도 이 마을이 본향이며,석불에 대한 감정은 오래전부터 친분을 쌓은 정영호 박사가 해주었으며 조만간 다시 내려온다는 말씀을 첨언하셨다.

 


 옥천 대성사 석조여래입상. 3월 4일 충북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89호로 지정되었다는 신문기사로 처음으로 접하였다.

 


첫인상?

와이키키 해변의 하반신이 늘씬한  팔등신 서양아가씨처럼 보였다면 불경일까?

그도 그런 까닭이 약 4미터에 이르는 큰 키 때문일 것이다. 화강암 2매를 상하로 붙여  입상을 조성했다. 선각으로 처리한 통견의 법의, 머리에 벙거지형 관모를 쓰고 있는 흔치 않은 석주형 불상이다. 원만상호에 백호공이 보이고, 반달형 눈썹, 지긋히 감은 눈, 오독한 코, 일자형 입,귀에도 귀걸이 홈이 남아 있다.


왼손은 가슴에 두고  오른손에는 연봉(?)을 지물로 든 수인이다. 즉 미륵불로 조성된 석불로 판단 된다.

1491년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절대년도 때문에 15세기 초반 불상으로 알려진 광주민속박물관 십신사지 석불입상과 친연성이 있을 것이다.


 

 

 

 

 

  

 

요사에서 스님과 대화


-.스님. 하반신 위에 어떻게 상반신을 올렸을까요?

-.내 힘으로 못해!!!( 본래부터 나누어진 불상이 아니지)

-.?? 아 예!!


-.스님. 상호는 왜 저렇게 뽀얄까요?(세안을 언제 했냐교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했다)

-.ㅎㅎ 오는 사람마다 그걸 물어. 본래 저 모습인데.(그래서 영험한 부처님 이니라!!!)

-.?? 아. 그러시군요.


참 정겨운 대화 아닌가? 

 

 

이 곳 지명이 불당골이어서 석불 입상으로 인해 유래된 지명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조성 목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을 부연 하자면...


우선. 민불, 사찰이 아닌 민간에서 조성된 불상으로 보기에는 조성시기, 크기 등으로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문화재 지정 기사에는 민불이라고 하였다)


둘째. 옥천 육씨 민묘 원당 사찰에 모셨던 불상. 실제 지근에 민묘들이 있으나 원당사찰에 불상을 모셨던 기억이 없다. 물론 왕릉 근처의 두부를 잘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는 널리 알려 졌지만, 개인적으로 민묘의 원당사찰로 추정(근거 없음)하는 절집에 남아 있는 불적은 춘천 월송리 석탑이 유존하는 조면사지造麵寺址만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옥천군청 홈페이지 마을 유래 검색중에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다.


은천원(銀川院)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 말바탱이에 있었던 조선시대 설치된 원으로 조선시대 마장리의 행정구역은 옥천군 청성, 청산면은 청산현 소속이었으며 마장리(馬場里)는 오가는 역마들이 쉬어 갈 때 이곳에 말을 메어두는 곳인 말바탱이에서 유래하였다. 은천원은 옥천고을-안내 화인역-안남 싸리재-은천원-청성 산계리 오곤원-청산현을 이어주는 그 당시 국도인 소로와 청주목-보은현-원암역-청산현-영동현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 가게 되었다.

동서남북으로 교통의 요충지인 보은 원암역(원남)과는 불과 5리정도 떨어져 있으며 조선중기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산현조 역원편에는 청산현 서쪽 19리에 있다고 기록되고 호서승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폐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 마장리에는 말바탱이, 원넘어, 말무덤 등 말이나 원과 관련한 지명이 남아있고 비석거리에 비석, 비각이 남아 있다."

교통의 요충지에 역과 원이 있었는데 원은 옛날부터 국가관리나 여행객들이 여로에 쉬거나 숙식처로 이용되었으며, 어느 학술대회에서 직지사 주지스님은 원에는 큰절이 있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실제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동 제비원, 충주 미륵대원 등 많은 원院에는 불상이 있다.


이러한 사례로 판단컨데 대성사 석불입상도 조선초기 은천원에 속했던 지역에 여행객, 공무집행, 상거래, 과거 등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된 불상이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근거 없는 나의 썰이다.

 

 

문화재로 지정 되었으니

문화재청, 옥천군청에 등재 및 대성사에 문화재 안내 입간판을 조기에 설치하였면 좋겠다.


201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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