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천시

영천...횡계서당. 모고헌. 옥간정

임병기(선과) 2016. 3. 1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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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고헌 초입 도로변의 귀촌하신 동호회 묘각님 사과 과수원

제방 건너 과수원이 금년에 새로 구입한 400평

금년에는 답사 자주 못 올듯...

 

늘 닫혀있었던 횡계서당,모고헌, 옥간정

묘각님의 주선으로 까치발로 만족했던 곳을 대문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횡계서당橫溪書堂

 1737년 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을 배향하는 서원을 건립하려 했으니 서원남설을 막는 시대적 상황으로 개설을 하지 못했다. 그후1760년 사교당에서 두 분의 향사를 올렸다.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23년 횡계서당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강학공간과 동재만 남아 있다. 횡계서당 현판이 걸린 강학공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중당협실형으로가운데 3칸의 마루방, 양 옆을 온돌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동재는 정측면 3칸*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횡계서당 향나무.

정각사의 스님이 형제에게 나누어 준 두그 루 향나무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 그루는 대전리 종택에 심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청송 주왕산에서 가져온 묘목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수령 300년으로 전하며 생육 상태는 양호하다.향나무 열매로 떡을 해 먹으면 전염병이 예방되며, 제사 때 나무의 향을 사용하면 인간과 신이 더욱 가까워진다고 하는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예전에는 향나무가 잘 자라기를 기원하며 막걸리를 향나무 주변에 뿌려 주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런 제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고헌慕古軒

횡계구곡의 3곡(홍류담紅流潭)의 계류변의 암반위에 있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정규양이 1701년(숙종 27)에 태고와太古窩로 건립하였다. 그후 1730년(영조 6) 수리해서 모고헌이라 하였으며 건물에는 태고와 현판이 남아 있다.


태고와太古窩: 아득한 태고적을 그리워 하며 지은 집, 정규양 선생이 그리는 이상향이었을까?

고헌慕古軒:옛날을 사모하는 사람이 모이는 집, 1730년 후학들이 정규양선생을 그리며 새긴 현판?


정규양: 1667(현종 8)∼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 영천 출신. 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형 만양(萬陽)과 함께 수학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정치·경제·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하였다. 당시 사림들이 이들 형제를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 문하의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하였다.


퇴계학에 전념하면서도 이형상(李衡祥)·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 등과도 학술 토론을 전개했고, 학파를 초월해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14년(숙종 40) 학행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형 만양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 명을 모아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그 뒤 이남산(尼南山) 밑에 육유재(六有齋)·진수재(進修齋)·옥간정(玉磵亭)·태고와(太古窩, 慕古軒)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 :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정)와 투호(投壺 :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넣는 유희)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주(主)요, 기(氣)는 자(資)라 정의해 형 만양의 논리와 일치하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형 만양과 함께 「훈지악보(塤篪樂譜)」를 지었다. 모든 저술을 대부분 형제가 같이 해 『심경질의(心經質疑)』·『치도의설(治道擬說)』·『의례통고(疑禮通攷)』·『개장비요(改葬備要)』·『경학연원도(敬學淵源圖)』·『상의치심단(上醫治心丹)』·『선천심법도(先天心法圖)』·『대학차록(大學箚錄)』 등 외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출처 다음백과사전

 

 

횡계서당 맞은편 횡계천 암반에 세운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이며 횡계서당에서 바라보면 단층 전각이나 계곡에서 바라보면 중층 누각이다. 위층에는 중앙에 온돌방 한 칸을 두고 사방으로 반 칸의 퇴를 두었다.횡계천 쪽에는 퇴를 내고 계자 난간을 설치했다.


 

중앙 온돌방 아궁이


 

중앙 온돌방

대가야님의 "35금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도원동桃苑洞 각자

 


횡계구곡가...제3곡 태고와

삼곡심제가범선()   셋째 구비 깊은 물에 배 띄우고 놀만한데
와중태고시하년()   태고와에 깔린 태고 어느 적 태고인고.
진수일사수상면()   마음 닦는 한가지 일 모름지기 권해야지
다소영재아최련()   내 가장 사랑할 손 저 수많은 영재라네.

 

옥간정玉磵亭과 풍뢰정

모고헌과 더불어 정만양,정규양 선생이 후학 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자.

횡계구곡의 4곡으로 돌사이로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는 암반(영과담)위에 지은 정자를 이르며, 건너편 바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송대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표현한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유래된 제월대霽月臺. 광풍대光風臺와 격진병隔塵屛, 지어대知魚臺 각자가 있다고 한다.


정만양(鄭萬陽):1664(현종 5)∼1730(영조 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오천(烏川, 迎日).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기암(企菴)·정재(定齋). 영천출신.아버지는 생원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옛날 정호(程顥)·정이(程#이96)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도 학술토론과 서신왕복이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1724년(경종 4)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명을 모아 아우 규양으로 하여금 의병장을 삼고 규율을 모두 갖추었는데, 관군이 토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이남산(尼南山) 밑에 옥간정(玉磵亭)·육유재(六有齋)·태고와(太古窩, 慕古軒)·진수재(進修齋)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 선경 속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는 한편,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투호(投壺)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학론의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훈과 지는 피리에 속하는 악기 이름으로, 형은 훈을 불고 아우는 지를 불어 서로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에서 아우 규양과 함께 〈훈지악보 塤#지30樂譜〉를 지었으며, 모든 저술을 대부분 같이하여 〈곤지록 困知錄〉·〈이기집설 理氣輯說〉·〈가례차의 家禮箚疑)·〈개장비요 改葬備要〉·〈의례통고 疑禮通攷〉·〈상지록 尙知錄〉·〈심경질의보유 心經質疑補遺〉·〈계몽해의 啓蒙解疑〉·〈외국지 外國誌〉·〈산거일기 山居日記〉 등을 남겼다.문장이 전아(典雅)하고 순실(醇實)하며, 글씨에도 전서(篆書)가 핍진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영천의 횡계서원(橫溪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훈지문집》 62권이 있다."


 


 

옥간정은 변 암반 위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4.5칸의 ‘ㄴ'자형 맞배집으로 우측에 풍뇌정이란 건물과 함께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취하고 있다. 경내 북쪽과 서쪽은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다. 도로에서 두 칸 대문채를 들어서면 먼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풍뇌정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풍뇌정을 돌아 들어가면 옥간정이 계변에 걸쳐 있다.


도로변에서 바라보면 2층 누각을 살필 수 없다.


 

옥간정과 뒤편 풍뢰정

 

풍뢰정




두 선생의 광풍대,제월대,지어대, 격진병 싯구


광풍대光風臺

우후천광정雨後天光淨비 온 뒤에 천광이 깨끗하니

대변월색신臺邊月色新 제월대 가에 달빛이 새롭네

염계천재의濂溪千載意 염계가 가졌던 천년 뜻을

요득갱수인料得更誰人 어느 누가 다시 헤아릴까


제월대霽月臺

대유음변록臺柳吟邊綠 광풍대 버드나무 내 곁에 푸르고

광풍면상상취光風面上吹 광풍이 얼굴 위에 불어오네

자가이회처自家理會處 자신이 이해한 것들은

요향고인지 要向古人知 고인이 알았던 것이네


지어대知魚臺

호상관어락濠上觀魚樂 물 위에서 물고기 바라보는 즐거움

천추지자수千秋知者誰 천 년의 세월에 아는 이 누구인가

양망역불가兩忘亦不可 둘이 잊는 일을 또한 할 수 없으니

어락아능지魚樂我能知 물고기 즐거움은 내 능히 알겠네


격진병隔塵屛

연계주굴곡沿溪周屈曲 시내 따라 굴곡을 두르고

촉촉취병개矗矗翠屛開 우뚝 솟은 취병이 열리네

성시풍진창城市風塵漲 성시엔 풍진이 넘쳐나는데

회두격기회回頭隔幾廻 머리를 돌리니 막힘이 얼마인가



 

옥간정 정면

 

 

좌측 옥간정, 우측 풍뢰정 후면


옥간정 평면은 나란히 배치된 누각형 건물에 직교해 방과 서고가 풍뇌정 배치와 같은 향으로 놓인 ‘ㄴ'자형으로 되어 있다. 누각형 건물은 두 칸 대청 우측에 한 칸 온돌방을 드린 다음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편당형이다. 대청 좌측 칸 북쪽에는 직교해 온돌방 두 통칸 뒤로 서고 한 칸이 있다. 건물의 전면 계곡 쪽에는 퇴 칸 가장자리에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고 나머지는 쪽마루를 부설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청방 간에 모두 삼분합 들문을 설치해 유사시에 넓은 공간이 창출되도록 했다.

대청 우측의 방 전면과 측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두었고 배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두었다. 한편 대청 북쪽의 두 통칸 방은 측면에 외여닫이문만 부설했다. 서고는 동쪽 면에만 외여닫이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된 서고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옥간정

진입은 배면 진입으로 대청 우측 칸의 배면 판벽에 외여닫이 판문으로 진입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방과 퇴 칸 모두 원주를 세워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누하 공간은 천석으로 축대를 쌓고 건물 측면 앞쪽을 돌담으로 막았다. 또 온돌방의 함실아궁이 양 옆도 바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돌담을 쌓았다.


횡계구곡가...제4곡 옥간정玉磵亭

四曲光風霽月巖 사곡이라 광풍대 제월대 바위이니

巖邊花木影毿毿 바위 가에 꽃과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欲知君子成章事 군자가 글을 이루는 일 알고자 한다면

看取盈科此一潭 이 못에서 물이 채워짐을 보아야 하리라



 

횡계구곡

1곡 쌍계雙溪, 2곡 공암孔巖, 3곡 태고와太古窩, 4곡 옥간정玉澗亭, 5곡 와룡암臥龍巖, 6곡 벽만碧灣, 7곡 신제新堤, 8곡 채약동採藥洞, 9곡 고암高菴


 

답사후

보현산 미나리

문경 약돌돼지고기 삼겹살

포항의 회가 어우르진 옛님의 시간을 가졌다.

 

답사는 情입니다.

 

2016.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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