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울주군

울산...망해사지

임병기(선과) 2016. 1. 3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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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

 

개운포(開雲浦)로 가는 길은 ‘개운’치 않다. 울산의 ‘처용로’에 들어서면 온산공단에서 퍼져나온 매캐한 화공약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게다가 간밤에 귀가한 남편의 눈앞에서 역신이 아내를 범하는 모습이 펼쳐졌다는 향가 ‘처용가’는 신라의 망국을 부른 타락한 사회상을 대변해줄 뿐 아닌가. 귀족들의 호화와 사치가 판치고 농민폭동으로 나라정세가 불안했던 당시인데도 불구하고, 개운포에 나들이 나온 신라 49대 헌강왕의 ‘여유’는 더더욱 개운치 않은 대목이다.

경주의 외항, 지금의 울산시 황성동 세죽마을에 들어섰다. 개포만 끝으로 저 멀리 큰 화물선박이 정박해 있다.천년 전 서역과 중동, 일본과 중국의 문물이 드나들었던 국제무역항이었음이 실감났다. 가까이 가보니 그러나 영 딴판이다. 거대규모의 포크레인이 포구를 가로막고 서서 콘크리트로 바닷물을 메워가고 있었다.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뒤덮여 길을 잃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지만, 현재는 시멘트 먼지와 돌 깨는 굉음으로 요란하기 짝이 없다.

개운포가 준 ‘실망’에 고개를 돌리면 가까이에 처용암(巖)이 앉아 있다. 울산 공업단지 앞바다에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는 처용암은, 뭍을 향한 그리움에 서라벌로 머리를 튼 거북의 형상이다. 자욱한 구름안개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자 동해용이 변괴를 일으켰다고 믿은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지으라”고 명했다.

영축산 망해사(望海寺). 품이 넉넉하고 숲이 깊은 영축산의 망해사 대웅전에 들면 헌강왕이 망해사를 짓겠다고 동해용과 약속하는 형상이 연기설화로 그려져 있다. 망해사엔 또 60년대까지만도 용 형상의 귀면도가 출토됐고 용왕당도 있었다고 한다. 솔나무·밤나무가 우거진 절 뒤뜰에 오르면 석조부도 몇 기만이 무심히 처용암 개운포를 바라보고 있다.

처용(處容)은 누굴까.
처용암을 서성이고 망해사에 오르면서 천년 전 처용을 상상한다. 사람인가, 귀신인가, 신라인인가, 이슬람 상인인가. 처용의 존재부터 그의 노래까지 수백편의 논문이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다지만, 아직도 분분하다.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를 보면 처용이 동해용의 아들로 묘사됐다.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고 왕은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이고 벼슬까지 내줬다고 한다. 그런데 처용 아내의 미모를 탐낸 역신이 그녀와 통정하다가 그 현장을 처용에게 들키고, 처용은 노래부르고 춤추면서 물러갔다.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미덕에 감복했고,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서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런 일을 맞아들였다 전한다. 두 남녀의 타락과 그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좌절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 사유를 후세의 신라인에게 경계시키기 위해 만든 노래. 그것이 처용가라고 ‘유사’는 전한다.

망해암을 거쳐 다시 처용암을 향했다.
처용이 나왔다는 바윗덩이가 처음에 만날때완 다르다.

‘서라벌 밝히는 달이여/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사 자리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래 내 해이지마는/ 빼앗음을 어찌 하리오……

’ ‘내 해’라는 나의 집착과 ‘뉘 해’라는 다른 누구의 집착이 부딪치다
결국, ‘빼앗음을 어찌하리오’란 초탈로 이어지는 처용은 번뇌의 원인을 스스로 소멸하는 중생의 지혜를 발휘한다.

그래선가, 차라리 춤추고 노래 부르는 처용은 아내의 불륜을 이끈 세계에 대한 강렬한 항의로 보인다. 용으로 상징화한 비불교 신앙세력이었다가 불법에 귀의하여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자가 바로 처용이라는 국내의 한 국문학자의 처용론도 귀기울여 볼만하다.

총명하고 후덕한 왕으로 알려졌었던 당시의 헌강왕이 왕권에 맞서는 귀족세력에 힘이 부치면서도 개운포에 놀러와 동해용을 만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가 구름 쌓이고 안개가 자욱한 개운포에서 동해용의 변괴를 겪지 못했다면, 망해사를 짓지 않고, 처용을 못만났다면, 울산은 폐탑과 폐불 속에 희뿌연 매연만이 남아 있었을 게다...불교신문

 

일견 동자석으로 보았는데

 

네이브 블로그 황준구님의 장승, 벅수, 솟대 포스팅에는 벅수로 이야기 합니다.

 

"석인상’(法首) 한 점(基)이 세워져 있다. ‘얼굴’의 모습은 완벽하게 뭉그러져 있고,- ‘명문’銘文도 겨우 확인 할 수 있다. '가슴'에는,- <‘청량내율거홍유복포석’青良內栗居洪有卜抱石>이라고, ‘오목새김’이 되어 있다. <‘청량’의 ‘내율마을’에 사는, ‘홍유복’이 ’돌’을 세웠다.>라는 내용이다.

‘홍유복’이라는 사람이,- ‘내율마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은 되지만, ‘벅수’를 세운 자세한 내용(이유)은 알 수가 없다. ‘자연석’에 ‘사람’의 형태를 거칠게 ‘조각’을 하였고,- 키는 72cm이며, 너비는 28cm다. ‘배’(船舶)가 드나드는 ‘포구’에 세워진, ‘계선주’繫船柱를 뜻하는 ‘배맷돌’을 무척 닮아 있다. 하지만,- ‘절집’의 어귀에 세워져 있어, ‘절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의 ‘법수’ 임에는 틀림이 없다."

 

 

 

 

석불좌상.

사진 엉망. 엉망이 아니라 늘 그러하다. 사진과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첫느낌?

"우리카페 달넘새님이 수인이 법의에 감추어진 석불 작례에 포함하겠군" 이었다.

즉 답사매니아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불상이라는 의미이다.

 

상호가 결실되었지만

통일신라 불상을 계승한 고려불상 아닐까?

 

 

지금까지의 답사동선과 달리 이희득님의 안내로 몇몇 석조부재를 만나러 대웅전 중정을거쳤다.

 

 

석탑면석

우주가 무척 넓다.

 

부도 옆의 석탑재와 비교하면 조성시기가 가능할까?

 

 

석탑재, 석등재가 혼합된 부재

 

 

석탑재?

 

 

 

 

 

부도전

부도일까?

결론적으로  부도로 지정되어 있다.

 

근자에 석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2004년 우리카페에서도  이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 옮겨 왔다.

 

"정삿갓님의 글을 읽은 라피오님의 글

 

부도가 확실히 맞다고 하셔서 기대했는데 일반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부도가 아니라는 의문점들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먼저 망해사지 부도 바로 위쪽에 1962년 부도 복원때 시굴한 결과 금당지의 유구들이 나왔습니다. 물론 발굴이 아닌 시굴이었기 때문에 좀더 정밀한 발굴이 필요하겠지요 지금은 토사가 밀려 내려와 완전히 언덕이 되어 버렸지만 그 뒤가 강당 터 이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제가 도면을 그려 본결과 완연히 통일신라의 쌍탑 가람 배치인 구고현법에 의한 배치였습니다. 일 예로 부도의 지대석의 면적을 도장찍기 하여 앞마당에 찍으면 딱 드러맞거든요.

그리고 부도를 뜯어서 살펴보면,

상륜부에 찰주가 꽂혔던 찰주 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망해사 대웅전 계단옆에 상륜부 장식돌이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 장식이 없어졌다고 하셨는데 아직 남아 있습니다. 찰주가 꽂혀 있던 부도를 저는 아직 본적이 없어서요, 마감장식돌이 아닌 상륜부 장식돌인 보개 보륜 앙화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굉장히 커다란 귀꽃은 석등에서는 자주 사용되지만 부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 크기 또한 어느것보다 크고 그 조각 기법도 뛰어나 웅장하게 보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통일신라인 9c세기에 재작 된것으로 보고 잇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도가 844년에 제작되었으며 근처에 있는 석남사 도의선사 부도가 880년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때 망해사지 부도가 부도라면 10세기 초기까지 볼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관리국은 9세기라고 단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더 많은 의문점들이 있으나 너무 전문적이면 토론에 객관성이 없어져 버리니.

제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망해사지 석조물이
부도일때 - 제작시기가 10세기 고려 초기라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일 예로 부도에 사리공을 만들고 안치한게 고려시대부터이니까요.

석탑일때 - 문화재 관리국에서 9세기 작품이라고 본다면 부도는 절대 될수 없습니다.
미술사적인 이론과 선불교의 유입등 시대적으로 전혀 맞질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정답이 아니니까요..^^
토론은 언제나 즐겁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 나눠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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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오님 글에 대한 답글...선과

 

 폐사지 답사의 맛!!!
볼 수 없는 것을 가슴으로 볼 수 있고, 보이는 것을 눈으로 즐기고, 머리로 그림을 그리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 절정을, 오르가즘을 만끽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부도로 봅니다.
아래글은 님의 견해에 반론이 아니라 저의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이해해주세요.

삼국통일 후 신라의 가람배치의 전형인 쌍탑 1금당 배치로 본다면 석조물을 부도로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신라의 통일은 672년이라 망해사가 헌강왕(875-886) 시절의 가람이라면 그 패러다임이 붕괴되고,기존의 문화사조가 신라불교의 절정기인 8세기를 지났기에 쌍탑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왕족중심의 기존 화엄사상의 교리에서 백제,고구려의 옛고토에서는 민중중심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이 도입되어 구산선문이 개창되는 시기 였습니다. 물론 기득권의 반발로 서라벌까지 선종이 도입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되었을 것이며 망해사지 역시 서라벌 권역으로 보면 도입이 늦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연대는 모르지만 울산 학성공원에 있는 석종형 태화사지 부도는 8세기로 알고 있어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님이 탑으로 보는 견해로 망해사지 석조물이 일반적인 부도와 다르다는 찰주공,큰 귀꽃,345비례의 구고현법(저도 깊은 이해는 없습니다)을 말씀하셨지만, 크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귀꽃은 분명 제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떠오르지 않네요. 석탑으로 볼 수 없는 양식도 있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실상사 백장암 탑을 시원으로 하는 이형의 석탑은 선종과 도입과 그 시기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지만,망해사지 석조물울 탑으로 본다면 이형이 아닌 파격으로 그 예를 찾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우선 탑신,기단을 옥개석을 음수로,층수를 양수로 조성하는 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3,5,7의 층수가 모호하며. 오히려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원당의 통일신라 전형의 부도와 일치하고, 좁은 산지중정의 입지를 고려하더라도 석탑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지 않나요?물론 상륜부가 있지만은,감은사지 탑 13m 이래로 략화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강우방 교수의 이론인 기단부 끝단을 1층 탑신 끝의 가운데와 삼각형으로 연결한 높이가 금당의 넓이의 1/10이라는 논리에 적합한지는 차치 합니다)

물론 님이 말씀하신 9세기냐,10세기냐 9세기면 부도가 될 수 없다는 견해도 문화재청이 9세기의 부도로 보는 사실에 대한 판단의 안목이 제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부도에 사리공이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는 님의 말씀은 처음 접한 내용이라
알아감의 즉 앎의 희열이 넘칩니다.

그럼 저의 견해는 뭐냐고요?

편년이 9세기말 또는 10세기 초,중반인지는 저의 상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부도로 보며 풍수적해석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물론 엉터리의 극치며,아무런 근거와 자료도 없습니다. 어쩌면 망해사 사세 때문에 석탑불사를 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선종과 거의 동시대에 도선에 의해 유입된 풍수적 비보사찰로 보는 겁니다.(경산대 최창조 교수님은 도선 이전에
신라의 자생풍수가 있었고 감은사지 태극문양,쌍탑을 용의 어금니로 보더군요.)

말하기도 너무 엉터리 같아서 겁이 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운주형 형국으로 탑 미조성--계속되는 망해사의 우환--풍수적 재해석--쌍탑 조성의 필요성
--사세로 인해 석탑불사 지연--선종의 도입 부도 조성 유행(?)--부처의 진신사리 수습의 어려움--마침 입적한 스님의 사리수습 쌍부도 조성--쌍탑의 대체

엉터리죠?
그래도 폐사지에서는 자기만의 픽션을 전개해보는 것도 유쾌하잖아요?                   

 

라피오님 글에 대한 최성호님의 답글

 

 RAPIO님 귀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상상을 할 계기를 마련해 주어 늘 즐겁습니다.

우선 망해사의 배치에 대여는 자료가 충분치 않아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자료를 보내주시면 제가 한번 검토하여 보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고구현법이라는 단어에 대하여는 한가지 덧붙일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구현법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3:4:5의 직각삼각형을 그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삼각형을 만들면 쉽게 직각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예전부터 사용되어오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건축에 이용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이것이 배치의 기법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없습니다. 제가 조금 연구해본 불국사의 경우도 고구현법을 사용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감은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였을 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사항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하여는 좀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상륜부의 찰주공에 대한 의견입니다. 석탑의 경우 찰주는 목탑 심주의 변형이라고 생각됩니다. 찰주는 심주의 변형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륜부를 안정되게 보존하기 위한 기능도 있습니다. 대개 석탑의 경우 상륜부가 높고 세장하기 때문에 찰주가 없으면 제대로 위치를 잡기가 힘들 것입니다. 후기에 내려와 상륜부가 약화된 탑의 경우 찰주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도의 경우 대개 찰주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찰주공인지는 확실지 않지만 옥개석 상부에 구멍이 있는 예(징광사지석조부도/신라와 고려시대 석조부조/엄기표저/209쪽)도 있습니다. 부도에 찰주가 없는 것은 상륜부가 그리 높지 않아 고정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상륜부를 높게 만들었다면 찰주를 설치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음으로 귀꽃에 대한 의견입니다. 귀꽃의 사용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도에도 귀꽃의 사용 예가 많이 보입니다.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887년경)나 봉림사진경대사 보월능공탑(깨져서 귀꽃의 흔적으로 추정하고 있음/923년), 지증대사부도(883년) 그리고 개인적으로 현욱의 부도라고 생각하는 고달사지부도에서 이미 귀꽃 사용의 예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단부에 사용된 예로는 국보 58호로 지정된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長谷寺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망해사지 부도의 경우 기단부에 사용되었으니 장곡사의 예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귀꽃의 문제가 이것이 석탑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대의 구분에 대하여는 저는 문화재청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10세기를 넘어가면 삼국은 극히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에까지 그야말로 혼란기였지요 그래서 좋은 예술품을 만들 겨를이 없어집니다. 저는 망해사지부도에서 강한 힘을 느낍니다. 이러한 힘은 여유가 없으면 나타나기 힘듭니다. 그러한 점에서 10세기가 넘어간다면 후반기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기 힘든 부분은 연꽃이나 안상의 형태가 신라시대의 형식에 가깝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만들었다고 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다면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 시대를 낮추어 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석탑인가에 대한 문제 분명한 것은 전체 발굴이 이루어진 후에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됩니다. 쌍으로 된 부도가 고려시대 말 보제존자의 사리탑인 영전사부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부도는 탑형식으로 되어있어 처음에는 탑으로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를 보아 부도형식의 탑이 없으란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석의 핵심에는 아무리 시대의 정신을 거슬러 행동한다고 하여도 부처를 과연 선사의 수준으로 격하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있습니다.

부도는 선사의 무덤입니다. 탑은 부처의 상징입니다.

선사의 격을 높여 부처의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어도 부처를 선사의 반열로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망해사의 부도가 쌍으로 만들어졌고 금당 앞에 놓여졌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망해사는 돌아가신 선사를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화에 용을 위해서 지었다고 하는데 용이 선사일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망해사지 부도를 탑으로 보는 것은 아직 섣부른 예측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왕에 글을 쓴 김에 873번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한가지 더 할까 합니다. 이거사지에 대한 글에서 옥개석의 구멍이 사리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국미의 재발견 탑(강우방,신용철저/솔/68-72)편에서 보면 사리공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합니다. 감은사의 경우 찰주가 끝나는 삼층 몸돌에 위치하던 것이 차츰 변화하여 1층 또는 기단부까지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치도 지붕돌에 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부에 사리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돌의 경우도 상부에 사리공이 있었습니다. 이거사지의 경우처럼 지붕돌 하부에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저는 이거사지의 지붕돌의 구멍이 사리공이라고 하여도 몸돌에 사리공이 있고 여유를 두어 상부에도 사리공을 더 뚫어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선 사리공이 지붕돌에 만 있다고 하면 공사상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붕돌에 사리장치를 넣기 위하여 지붕돌을 뒤집어 놓고 사리장치를 뒤집어 설치하고, 사리장치가 빠지지 않도록 강회 또는 기타의 접착제로 고정한 후 바로 세워 탑 위에 놓아야 하는데 귀한 사리 장치를 뒤집어 설치한다는 것은 당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아래 몸돌에 사리장치를 올려놓고 지붕돌을 덮는 방법이 있는데 이 것은 더욱 힘든 방법입니다. 사리장치를 건드리지 않고 올려놓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지붕돌을 올려 놓고 정확히 자리를 잡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사리장치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도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으로 말해서 지붕돌 위에 있는 구멍은 사리장치가 아닌 몸돌의 촉과 연결하기 위한 장치이거나 또는 사리장치 위에 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홈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른 견해가 있으시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탑'이라는 책을 보실 때 30쪽의 심주에 대한 구조적인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책의 설명에는 "건축적으로 기둥 위에 세워진 목조부재(공포 부재)들이 각 층의 수직력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라면, 수평을 지탱해주는 중심 기둥으로서의 구조적 기능을 하는 것이다. 만일 목탑에서 심주가 없다면, 여러 층의 누각의 건물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건축물의 수직하중은 기둥이 부담합니다.

공포는 기둥에 직접 전달되지 않는 곳의 수직하중을 받아 창방에 전하고 창방이 이 하중을 기둥에 보내어 집의 하중을 처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주는 단순히 상륜부의 하중만을 전달할 뿐입니다. 책의 설명대로 하면 모든 중층건물에는 반드시 심주가 서야합니다. 그러나 탑 아닌 어떠한 중층건물에도 심주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금산사의 용화전도 3층의 건물이지만 심주가 없습니다.

수평하중 예를 들면 풍하중이나 지진하중과 같은 수평하중에 대한 것은 창방과 인방등이 담당합니다. 탑에서의 심주의 경우는 상징성이 오히려 강합니다. 심주가 중요한 구조재라면 어떠한 경우도 반드시 기초에 올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쌍봉사 대웅전이나 최근에 지어진 보탑사의 3층 목탑, 그리고 일본의 많은 목탑들이 2층 내지는 3층의 보위에 올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하부에 법당을 설치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만큼 심주에 걸리는 하중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라피오님의 글에 대한 유현님의 답글

 

역사에 빈약해서 자료를 뒤지지 못했습니다.

먼저 진전사지의 부도와 보림사(체징)와 실상사(홍척과 수철)의 부도 건립 연대를 알아보고 그 다음엔 망해사지의 부도 건립연대를 확인해야 하는데. 덧붙이면 여주 고달사지의 부도도 건립연대를 알아보면 더 좋구요. (고달사지 부도 만큼 당당함이 넘치기에)

최성호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탑은 부처의 무덤이요 부도는 선사의 무덤입니다. 조금 더 깊에 들어가면 탑은 교종에서 중시하는 것이요 부도는 선종에서 중시한 것이 됩니다. 교종은 신라왕실과 경주 중심의 사상이라면
선종은 지방호족과 경주에서 떨어진 곳의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도식 하에....

제가 역사적인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상상하는 이유는 망해사지의 부도가 건립될 시기에 이미 부도의 양식이
하나의 유행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진전사지, 보림사, 실상사 등의 부도 건립연대를 확인한 이후 망해사지의 건립연대를 보면 아마도 망해사지가 이들보다 늦은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교종이 득세하고 왕실의 권위가 살아있는 신라의 경주에는 부도라는 놈이 좀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지 않았을까요? 경주에서 가까운 울산도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럼 유행을 타고 있던 부도의 양식을 본 떠 탑으로 대체하고자 한 발상은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제작에 따른 기법이나 형식은 부도이지만 위치한 자리나 의미는 탑이라고 본다면... 물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지리적인 영향 그리고 교종과 선종의 상호 유입 등 밝혀야 할 점들은 많지만 이들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이런 점도 가능하리라는 상상에...

 

라피오님의 마무리

 

안녕하세요.~ 이렇게 온라인으로 인사 드려 죄송합니다.
정말 귀한 얘기 잘 들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가람배치에서 불교미술의 기본인 좌우대칭때문에 구고현법을 사용했습니다. 석탑의 중심에 꼭지점과 금당의 후면 중앙에 꼭지점을 연결한 선이 대각선이 되고 동탑과 석탑의 연결선에 중심에 점, 그리고 다시 탑의 중심점 이렇게 연결하면 직각 삼각형이 됩니다. 이러면 쌍탑가람에 좌우대칭이 정확하게 표현 됩니다. 직각 삼각형 두개가 모여 이등변 삼각형을 만들어 그 안에 금당과, 탑파를 배치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가람이 이런형식을 취한것은 아닙니다.

말씀해 주신 징광사지석조부도를 확인해 본 결과 찰주공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런것들이 함께 나누는 의견들로 얻어보는 기쁨인거 같습니다. 저도 언제 만들어 졌느냐에 중요한 함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대적인 문화의 흐름속에 이형적인 면이 분명히 강한 망해사지 석조물입니다.

그래서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다시한번 귀한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현욱의 부도라고 생각하시는 고달사지부도에 대하여 시간 나시면 말씀 부탁 드립니다. 너무 궁금합니다. 함께 나누는 마음을 조금만 베풀어 주시면 어떠실런지...

번거 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탑으로 보는 사람들의 논지는

부도가 금당터 정면에 위치한 점, 찰주공, 풍탁공, 부도를 쌍으로 같은 장소에 모시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감은사지와 너무나 흡사한 지형과 형국으로 미루어 비보 목적의 용의 양어금니를 상징한 부도로 본다.

즉, 대왕암과 처용암. 이견대와 망해대. 감은사지 동서삼층탑과 망해사지 동서부도의 구도도 동일하지 않은가?

물론 근거 없는 픽션이다.

 

 

서부도.

옥개석 파손과 상륜부 결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4매 방형지대석위에 팔각하기단석 면석에는 안상을 표현하였다. 하대석 상기단에는 복련과 모서리에 귀꽃을 배치하였으면 4단 괴임을 조출하였다. 팔각 중대석에는 우주를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3단 받침을 두고  앙련을 새겼다.

 

동부도와 다르게 서부도 별석 탑신 괴임에는 1단의 괴임대와 안상이 장식된 하부에 1단의 받침이 있다. 탑신석 각 면에 우주를 조출하고  4면에 문비를 표현하였으며, 상부를 호형으로 하였다. 옥개석 층급은 3단으로 좁은 각형 1단, 넓은 호형 1단, 맨아래에 각형 1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면은 정상부에서 내려오면서 급경사를 이루다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처마쪽으로 내려간다. 처마 끝에는 풍탁공이 남아 있다.

 

 

 

 

동부도

서부도와 유사하지만  동부도에는 탑신아래에 각형 1단의 괴임대와 안상이 장식된 하부에 1단의 받침이 생략되었다.

 

 

 

 

여유롭다.

말없는 부도 만큼이나...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

넋을 놓고 칭찬받는 이란성 쌍둥이 곁에서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문의 부재들

석탑 기단갑석으로 추정한다.

 

 

 

 

 

돌고돌아

12년만에 다시 찾은 망해사지가 낯설었지만

그냥

우리는 즐기면 된다.

 

아는 것 보다

좋아하는 것이 낮고

좋아하는 것 보다 즐기는 것이 참으로 믿기에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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