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부산시

부산...금정산 범어사

임병기(선과) 2015. 12. 1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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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1982년, 1984년 순례

 

그리고

2003년 우리카페 부산 씽비개님 주선으로 원효암까지 답사

2006년 우리카페 유현님의 주선으로 부산님들과 답사.

 

오늘은

가산리 마애불 답사 후, 휴휴정사의 고려시대 석탑을 뵙기 위해 들렸다.

 

2003년의 글로 답사기를 대신한다.

귀차니즘 보다는 당시의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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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하필이면 근무하는 토욜 전날 목요일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는 호기로 판단하고 2주 전부터 마누라 공략에 서서히 눈치채지 못하게 전력투구를 하여 윤허를 받아내었다.  울산 근교를 목표로 하였으나 간월사지 찾아가는 길이 자신감이 없어 부산의 씽님께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흔쾌히 동행하겠단다.

금정산 초입은 이른 아침부터 나이 드신 보살님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히치하이킹을 하시는 일행을 태웠더니 어허! 무려 6명의 보살님이 차에 타시고는 나에게 덕담을 하신다.

"주사! 복 받을겨!"
매표소 입구에서 차를 막고 주차료 입장료를 징수하시는 분이 다가오자 6분이 약속이나 하신 듯 "절에 가는데 무슨 입장료를 내!!!" 그 참 복이 바로 오네......

아직 일행이 보이지 않아 주차장 아래의 돌구시로 다가갔더니 이상하게 배수구가 보이지 않는다. 돌구시가 잘나가던 시절에 주석하시는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하는 쌀을 씻기위한 용도일텐데 배수구가 없다면? 아마 순수하게 수조의 용도로만 쓰였으리라 생각하며 마치 입상삼존불처럼 보이는 돌구시 뒤의 장송 3그루중 가운데의 고사목이 돌구시의 영욕과 오버랩되어 뒤쪽의 당간지주 마저 희미하게 시야를 어지럽힌다.

혼자 들어갈 수 없어 일주문 밖을 배회하는 중에 씽님이 4명의 꽃띠 처자와 짠 모습을 나타내신다.
범어사 일주문은 고건축의 불가사의로 여겨질 만큼 특이한 구조로 배흘림의 석조기둥 위에 어떠한 고정장치도 없이 짧은 목조기둥을 올려놓았지만 숙종이래 비바람에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으며 어느 사찰과 달리 일주문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일주문은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져 일명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주문은 하양의 환성사 일주문으로 2m 높이의 석조기둥만 남아 있어 내내 궁금하던 기둥하부의 홈의 용도를 알 수 없었기에 유심히 범어사 일주문을 보아도 단초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며 한 분의 스님을 떠올려 본다.
`광덕스님` 나에게 법명을 주신 분이다. 광덕스님의 스승이 근세에 범어사에 선풍을 불러 이르켰던 동산스님이기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맘의 예를 갖추며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의 하나였던 범어사가 오늘날 선종사찰로 바뀐 사연을 곱씹어 본다.

일주-천왕-불이문을 지나 보제루 앞에서 뒤를 돌아본다.
김봉렬 교수가 극찬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근히 굽은 동선과 화엄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입구의 산만한 흐름을 배제하고 정신 집중을 유도하는 낮은 담장의 곡선과 오름을 눈에 담으며, 해인사 부석사 화엄사 등 화엄종찰의 진입공간을 머리에 그리며 우두커니 서있는 나에게 동행한 어느 님이 사찰의 대나무에 대해 질문을 하여 민간신앙,민화,풍수 에서 대나무의 상징성에 대해 이빨을 풀며 범어사 가람배치 종축의 끝 비로전 마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오늘은 사찰의 10재일의 하나로 관음재일과 더불어 가장 신도가 많이 모이는 지장재일 이라 절집이 시장통이다. 지장재일은 음력 18(?)일날 올리는 재로 몸과 맘을 정갈히 하여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재일인 것이다. 보제루 측벽의 십우도에 눈길준 후 종각 범종의 유두 유방 유곽에 대해 설명해도 태연한 처자들의 모습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강도를 더해서 오늘날 우리의 종은 거의 신라의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을 모방한 것이며 두 개의 종은 여러 차이가 있으나 상원사종은 입술이 많이 간 아줌마의 젖꼭지고 성덕대왕신종은 아직 입술이 닿지 않은 처녀의 젖꼭지라 해도 묵묵부답이라 내가 더 당황스럽다.

비로전 영역은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전형의 가람배치와 차이가 보인다, 즉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체우용의 기준으로 보면 비로전, 미륵전이 좌체이므로 종각은 우용 즉 현 위치와 반대쪽에 있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참(眞)이 체(體)라면 아름다움(美)은 용(用)이요, 참이 깨침(頓悟)이라면 아름다움은 딲음(漸修) 이니라"

더욱더 눈길을 끄는 것은 통일신라 전형에서 다소 약화되고 크기가 줄어든 신라하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탑과 석등의 위치이다. 물론 주전각을 중심으로 탑이 비켜서 있는 가람은 많이 있지만 이는 대부분 풍수에서 허한 부분을 비보하기 위한 방편, 강한 부분을 누르기 위한 염승의 목적이지만 범어사는 도선에 의해 이 땅에 풍수지리가 도입되기 전 (물론 자생풍수도 무시 못한다..... 감응사지에서 나타나는 태극문양, 탑의 상징 등)임을 감안하면 시차가 있다. 물론 도선 이후에 세워진 탑으로 풍수의 영향인지 난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팔각원등의 석등도 탑의 위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를 풀 단초는 비로전과 미륵전에 있지 않을까? (탑은 본래의 위치라는 전제하에) 빈약한 설로 소설을 그려보면 언제가 어떤 연유에선가 미륵전 더 진도를 나가보면 범어사가 화엄사찰임을 감안하면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이 주전각이 아니었겠는가?
아무튼 비로자나불의 수인도 반대로 되어있고 미륵불도 전각의 구조적 문제로 보이지만 측면에 모셔져 있어 이채롭다.

이런저런 그림을 머리에 그리며 소맷돌의 투구를 쓴 모습의 사자(?)의 배웅을 받으며 동선이 횡축으로 바뀌는 대웅전 영역에 이르면 기단의 돋을 새김된 꽃 문양, 창살이 화려하게 반겨주지만 법당 안은 신도들로 넘쳐나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궁궐이나 민가 창살에서 꽃문양을 본 적이 있던가? 오직 사찰에서만 보이는 꽃문양은 진리를 상징하며 문은 통로이기에 진리로 들어가는 문 곧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문의 의미이며 장엄의 뜻도 있겠지만 빛이 바래 속살을 드러낸 나뭇결의 완숙미를 난 즐긴다.

대웅전 벽의 호랑이, 의성 고운사의 호랑이처럼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동자가 따라오는 호랑이를 살펴보라고 동행한 님들에게 말하며 고건축의 음양에 대해 마치 전문가인양 손가락을 짚어가며 요란하게 헛소리를 토해내었다. 산지중정의 공간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몰라도 독성각도 나한전 명부전(?)과 한 전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령각은 별도의 전각으로 모셔져 있고 독성각의 아치형 문얼굴의 연귀 모서리에는 비구 비구니 상이 두 손을 들고 전각을 받친 듯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독성각을 소제하시는 보살님께 슬쩍 물어보았더니 "전각이 무거워 무너질까봐 그러겠지요"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전등사의 나녀상처럼 설화를 만들고 산청 율곡사, 내소사 단청쟁이 도편수를 떠올리는 건방진 알량한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멋진 답이지 않은가?

동행한 님들이 아니었다면 분주함이 싫어 난 벌써 범어사를 벗어났겠지만 사람의 정이 최고이기에 "선과님 물 조~치요"를 연발하는 씽님의 우스개도 싫지 않아 머무름을 즐기며 움직일 동선을 의논하는 중에 절집에서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통도사로 방향을 잡으며 산문을 나섰다.

2003.07.17

 

아래 사진은 2015년 12월 5일에 촬영하였습니다.

 

 

당간지주

 

1982년

 

 

수조

일주문

보제루 현판.석동산스님의 글

 

영주선재

금정산 신선사상과 불교의 만남을 상징?

사마천의 사기?에는 삼신산을 봉래 방장 영주라고 했던가?

동행했던 달넘새님의 영주는 우리나라를 뜻한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비로전 삼존

지권인 수인의 왼손, 오른손이의 위치의 의미는 무엇일까?

미륵전

삼층석탑

 

 

 

 

 

 

 

 

 

 

 

 

 

 

대웅전 삼존

대웅전 측벽 호랑이 벽화

팔상전.독성전.나한전

 

독성전

 

 

지장전 천장벽화

지장전

 

 

 

 

휴휴정사 석탑

 

범어사를 여러번 다녀오신 분들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선방 뒤뜰에 위치한 탓도 있지만

2009년 종적을 감추었고 2011년 기장 고불사에서 "고불사 석탑"으로 문화재로 들록되었었다고 한다

우역곡절 끝에 다시 옛집을 찾아와 "범어사 고려삼층탑" 명찰을 달고 있는 탑이다.

 

 

 

하기단저석과 중석이 일석이며 중석에는 탱주와 양우주를 새겼다.

현재는 뒤집어진 상태이다.

기단갑석에는 우동마루가 뚜렷하고 호각의 탑신괴임을 두었다. 아래의 호형이 상층 각형에 비해 두텁게 표현하였다.

상기단 면석은 감입식이며 하기단 면석처럼 탱주와 양우주를 모각하였다.

 

 

 

상층기단 갑석도 하기단 갑석과 유사하다.

탑신석은 초층만 남아 있으며 양우주을 모각하였다.

초층 옥개석은 결실된 상태이며, 옥개받침은 3단, 절수구가 보인다.

옥개석 낙수면의 물매가 깊고 현수곡선이 뚜렷하다. 상륜은 결실되었고 올려진 자연석은 후보물이다.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 탑으로 전한다.

 

 

다음에는

느긋하게 박물관도 둘러보아야겠다.

1982년 부터 동행하였던 많은 분들이 파노라마로 스쳐간다.

연락처도 모르는 님들도

잘 계시리라.

 

201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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