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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홍성군

홍성...성산문 유허지

by 임병기(선과) 201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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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유허지

홍북면 노은리. 유허지에는 노은단, 사당인 충문사, 노은서원 유허비, 성삼문 유허비가 있다.노은리는 선상문 선생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성삼문 선생은 여기서 태어 났다. 또한 고려말 명장인  최영장군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숙종 2년(1676)에 읍사 이량이 선생의 옛 집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사육신을 같이 모실 것을 청하자, 나라에서 녹운서원이라 하였고, 뒤에 노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후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고, 후에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노은단이라고 하고 제사를 지냈다.

 

노은은 민진후(인현황후 오빠)와 우암 송시열은 이 동네를 노산(魯山:단종의 왕호)의 노(魯)자와 은의(恩義)의 은(恩)자를 따서 노은(魯恩)이라 호칭하였는데, 1709년(숙종35)에 노은서원으로 개칭되었다. 노은서원 옆에 별사(別仕)를 세워 성승(성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1687년에 봉안하였으나 1871년 노은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철거되었다.

 

 

성삼문 유허비각, 노은서원 유허비

 

성삼문.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槿甫)ㆍ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아버지는 도총관 승(勝)이다. 외가인 홍주(洪州) 노은골에서 출생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가 3번 들려서 삼문(三問)이라 이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세종의 명으로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ㆍ신숙주ㆍ최항ㆍ박팽년ㆍ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차례나 왕래하며 정확한 음운(音韻)을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오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큰 공헌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능지처형(凌遲處刑)을 당했고 집안도 멸문(滅門)의 참화를 당했다.1691년(숙종 17)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성삼문 유허비

조선 현종 9년(1668) 선생이 태어난 이곳에 비를 세워두었으며, 현재는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송시열이 지은 글에, 김진상의 글씨로 하여 비문을 새겼다.

 

 

노은서원 유허비

 

 

노은단

노은단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노은서원이 훼철된 후 성삼문 선생을 비롯한 사육신의 위패를 묻은 단소壇所이다.

 

 

충문사. 성삼문 사당.

 

2015.10.18

 

***이 글을 읽은 박철희님께서 아래와 같은 글을 주어 부연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성삼문 유허비는 1668년 민유중의 청으로 송시열이 짓고, 민감사가 이임하여 오랜세원 후 1744년 이기진 목사의 지시로 윤봉구가 그 간의 사유를 추기하여 뒤에 붙이고 이제야 유허비를 세웁니다. 비 음기가 2분의 글이 앞 뒤에 동시 게재되어 세워진 비입니다. 참고가 되고 오류가 바로 잡히기를 기대합니다. 김진상, 유최기 글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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