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의정부시

의정부...도봉산 망월사

by 임병기(선과) 2015. 10. 6.
728x90
728x90

 

 

대구에서 경기북부 답사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강화에서 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역마살을 주체 못하고 여러번 답사하였다. 누구나 그러하듯 원거리 답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산정상의 가람, 마애불 등 왕복 몇시간이 소요되는 곳에 계시는 옛님들이다. 그렇게 섭렵한 문화재는 늘 가슴 한켠에 아쉬움과 회한으로 자리하게 된다.

 

기실 망월사도 몇 년전 절 초입에서 포기하고 돌아섰던 절집이었으며 이번 경기 북부 동선에도 포함되지 않았었다. 마침 동행한 동호회원이 혜거국사 부도를 추천하면서 20분이면 충분하다는 달콤한 유혹에 산길을 접어 들었다. 결국 왕복 2시간 이상 소요된 보람찬(?) 답사가 될 줄은 꿈에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이름없는 폭포

아니지 이름 없는 폭포가 어디 있으랴?

추억 한자리 새겨 두라는 듯 포토존이 설치 되어 있건만

명경지수의 소를 바라보고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산악인 엄흥길 옛집터를 지나면 큰바위가 참배객을 맞이 한다.

2개 바위에 각자된 글씨는 관세음보살觀世自在菩薩. 안국安國.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다. 불교적 교리로 해석하면 향 우측에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 명문이 있을 듯 하나 보이지 않아 오히려 국가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긴 암각문으로 생각된다.

 

 

가경병자嘉慶丙子 경흔경각慶欣敬刻

가경은 청나라 인종(1796~1820)조의 연호로 가경병자는 1816년이며 경흔경은 각자한 사람을 의미한듯 하다.

 

 

안국

 

 

관세음보살

우측하단에도 명문이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 즈음 해탈문이 반긴다.

 

 

물 한모금 들고 싶었으나 가뭄에 산속 절집은 감로수의 참맛을 일깨어 주려는 듯 말라 버렸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639년(선덕여왕 8) 해호()가 창건하였으며, 망월사라고 부르게 된 고사가 전해진다. 선덕여왕은 해호를 존경하여 측근에 머물게 하고자 하였으나, 해호는 사양하고 홀로 이 산중에 암자를 지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해호가 머물렀던 동대()의 옛 산성 이름이 망월성()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성 이름을 따서 망월사라 하였다.

 

신라 말기 경순왕의 태자가 이곳에 은거했다고 하며, 1066년(문종 20) 혜거국사()가 절을 중창하였다. 그 뒤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14차례의 병화와 전란으로 절이 황폐해졌다가 1691년(숙종 17) 동계()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영월()이 수십 년 동안을 이 절에 머물면서 1779년(정조 3) 선월당()을 세웠고, 1800년 선월당을 옛 영산전(殿) 터로 이전하였으며, 1818년(순조 18) 칠성각을 신축하고 1827년 절 전체를 중수하였다.

 

1880년(고종 17) 완송()이 중건하였고, 1882년 완송이 영산전을 다시 세웠으며, 1884년 인파()가 독성각()을 건립하였다. 1885년 완송이 약사전(殿)을 건립하였고, 1901년(광무 5) 인파가 큰방을 보수하였다. 1906년 회광()이 선실()과 설법루()를 중수하였고, 1941년 김응운()이 약사전을 중건하였다. 1969년 주지 춘성()이 퇴락한 선실을 철거하고 2층의 석조건물을 지었다. 1972년 주지 도관()이 본래 있던 염불당과 낙가암()을 헐고 현대식 건물의 낙가암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의 현존하는 당우로는 상층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하층을 선실로 사용하는 석조전(殿)을 중심으로 영산전·칠성각·낙가암·범종루 등이 있다. 망월사는 이름 있는 선원으로서 매우 전통이 깊고, 근대의 고승인 만공(滿)·한암()·성월() 등이 후학들에게 선을 가르쳤으며, 많은 선객들이 수도를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췌

 

 

천중선원

 

 

 

문수굴 아래 천봉선사 부도와 부도비

 

 

 

천봉당태흘선사 부도비

태을선사 입적후 3년 후인 1797년(정조 21년) 조성한 부도비로 방형 기단위에 비신과 옥개석을 올렸다. 비문은 이충익이 글을 짓고 썻다. 후면에는 동문.제자. 신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천봉당 태흘 부도望月寺天峰堂泰屹塔 

조선후기 승려 천봉당 태흘(17101793)의 부도이다.  태흘은 16세에 출가하여, 명탁의 제자가 되었고, 도원으로부터 계율을 받았다. 20세에 호점에게서 불경을 배워, 배천의 호국사에서 깨달음에 이르렀으며, 정조 17(1793)84세로 입적하였다.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 기단을 올렸다.  팔각 기단 모서리마다 다섯 개의 연주문을 새겼다.

 

 

탑신에는 서산오세손西山五世孫  천봉당태흘탑 天峰堂泰屹塔 숭정기원후 삼갑인 모춘하완립崇禎紀元後 三甲寅 暮春下浣立 음각되어 있다. 숭정기원후 삼갑은 1794년(정조 8년)이다. 서산대사의 많은 제자 중의 어느 법손의 맥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길쭉한 팔각타원형 탑신 아래에 앙련을 새기고 윗부분에는 큼직한 잎을 가진 복련을 둘러 새겼다. 팔각 지붕돌 지붕돌과 내림마루는 두텁게 표현하였다. 상륜에는 연꽃을 새긴 복발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두었다.

 

 

부도 뒤편 부도건립 시주자 명문

 

 

 

 

 

영산전을 돌아서면 망월사의 하이라이트 혜거국사 부도를 만나게 된다.

 

 

 

탑신부를 제외하고는  8각원당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3단의 각형괴임이다. 팔각의 기단 상부에 음각선을 돌렸다. 홈위에 올려진 원구형 탑신의 하단에는 복엽16판의 앙련을 조식하였는데,  연판 사이에는 간엽을 표현하였다. 옥개석은 상륜부까지 1석이며, 옥개석의 하면에는  각형 3단 받침을 조출하였고, 상면의 합각선은 두툼하며  귀꽃을 조식하고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연화문대 상면에 연주문대를 두른 후 보주올렸다. 부도의 전면 배례석에는 혜거이라 음각되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초기에 조성한 부도로 전한다.

 

근데

혜거선사는 고려초의 스님으로 알려져 있어 당시의 부도 양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숨은 내력은 무엇일까?

 

 

 

 

 

 

또다른 부도의 옥개석?

 

 

스님의 예불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후기에 조성한 목조여래삼존불은  조용히 한 컷

 

 

 

고불원의 목조삼존불

스님의 예불, 보살님들의 간절한 예배

무례를 범하고 한 장....

 

 

 

 

1층 낙가보전

2층 적광전

 

 

무위당

강진의 무위사가 오버랩 되었지만

느낌은 무위!!!

 

 

무위당 툇마루 한켠에 가을볕을 쬐고 있는 나이 든 동종

1786년 주종장 이영희, 용재가 주종한 동종으로 단룡의 음통이다. 하대에는 덩굴문으로 장식하였고 종신 중앙에는 횡대 아래에는 장인, 화주 등의 명문을 새겼다. 횡대 상부에는 유곽속에 9개 유두, 보살상, 인왕상,전패를 조식하였으며 위에는 범자문과 낮은 견대를 표현하였다.

 

 

 

 

금강상?

동종에 이런 작례는 처음(?)인 듯 하다

 

 

 

 

무위당 측벽의 벽화

용과 호랑이 와불 정제되지 않아 더욱 정감이 가는 불화

 

 

내려오는 길

작별을 아쉬워 하듯 열반에 드신 스님이 배웅한다.

조선후기 망월사에 주석하셨던 월조당 계총부도로 방형 기단에 종형부도 측면를 평편하게 하였고 옥개석과 상륜은 일석이다.

 

 

 

 

 

자연재해로 생을 마감한 전나무의 변신

누군가를  위해...

 

 

우리는...

 

2015.10.02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