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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정부시

의정부...도봉산 회룡사

by 임병기(선과) 201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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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다시 방문하기 쉽지 않을 경기서북부 답사. 동행한 주말부부인 동료에게 미안하여 이제 회룡사를 마지막으로 차후를 기약해야겠다. 점심 시간이 지난 시간임에도 서울에서 접근성이 용이한 탓에 등산객 행렬이 산정상 보다 오히려 더 만산홍엽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회룡사 길이 일부를 제외하고 포장되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1785년 번암 채제공의 회룡사관폭기에는 힘든 여정임을 묘사하고 있다. 번암은 여름날 수량이 풍부한 회룡폭포를 바라본 듯 하다. 또한 일행중에 승려가 한 분 포함되어 있지만 폭포 바로 위에 위치한 회룡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어 사회상의 일면을 짐작할 것 같다.

 

회룡폭포

 

도봉산 회룡사 폭포에 담긴 뜻(回龍寺觀瀑記)...채제공(1720~1799)

                                                                    

『을사년(정조 9, 1785) 여름, 나는 양주楊州 홍씨洪氏의 집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 집은 도봉산 아래에 있었다.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밤새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에야 비가 그칠 기색이 있었다. 회룡사 앞 폭포가 매우 장대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렵게 가마를 준비하여 물을 건너 넝쿨풀을 잡고 올라갔다. 날리는 포말이 사람을 쏘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폭포 왼쪽 길을 따라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버리고 떠나가는 듯하였다. 가볍게 올라가니 원류를 만나게 되었다. 그다지 세차게 흐르지는 않았다. 비로소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물을 건넜다. 벼랑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오른편으로 폭포를 끼고 바위 위에 앉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도봉산에서 발원한 물이 10여 리쯤 흘러내리다가, 여기에 이르러 갑자기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는 높이가 거의 56길 정도인데 물이 부득불 출구를 다투다 보니 다발로 묶인 듯 흐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물이 뛰어올라 흩어지는 것도 있고, 서서 뛰는 것도 있으며, 넘어져 옆으로 떨어지는 것도 있고, 빠르게 곧바로 쏟아지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빙빙돌기도 하고, 어떤 것은 치면서 부서지기도 하였다. 수량이 풍부한 것은 수천 말의 용기에 담겨 있는 구슬과 같고, 소리가 요란한 것은 만 개의 우레가 치는 듯하였다.

 

따라온 자들이 모두들 기이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 또한 마음과 눈이 깜짝 놀랐다. 한참 후 조용히 생각해보았다. 하늘이 물을 만들 때 어찌 이와 같이 만들었겠는가? 물의 본성은 그저 아래로 흘러갈 뿐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차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순리를 좇기 때문에 흐르지 못하게 하여도 흘러가는 것, 이것이 바로 물의 상도다. 지금은 물이 바위에 속아서, 그 기세가 크게 다투어가는 듯하고, 그 모습이 크게 미친 듯한 것이다.

 

사람들 중에 이를 보는 자들은 물이 본성을 잃은 것이 개탄할 만한 일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박수를 치면서 기이하다 하니,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내 보니,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을 보존할 수 없는 이가 많다. 폭포여, 폭포여. 내가 너에게 무엇을 탓하랴. 마침내 감개하여 글을 적는다. 함께 간 이는 아들 홍원弘遠, 서자 홍근弘謹, 생질 이유상李儒尙, 문인 권필전權弼銓, 겸인傔人 김상겸金相謙, 승려 경총敬聰이다.

 

 

회룡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절의 창건에 관해서는 신라 때 초창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서로 다른 주장이 전해지고 있다.

1977년 봉선사에서 발행한 <봉선사본말사약지>에는 절이 681년(신문왕 1)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되어 법성사(法性寺)라고 불려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서는 의상이 도봉산에 법성사라는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권상로가 편찬한 <한국사찰전서> 하권의 회룡사항에는 한결같이 무학대사에 의하여 1984년(우왕 10) 또는 1395년(태조 4)에 처음 창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 기록은 그대로 믿어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중동국여지승람> 권11의 양주목 불우(佛宇)조에 망월사, 영국사 등과 함께 도봉산에 있는 절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서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1398년(태조 7)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있던 왕사 무학을 방문했다. 무학은 1394년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이곳 토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 때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881년(고종 18)에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에 전하고 있다.

이와는 연대는 달리하여 함흥에 내려가 있던 태조가 1403년(태종 3)에 환궁한 뒤 이곳에 있던 무학을 찾아 왔으므로 무학대사가 태조의 환궁을 기뻐하여 회룡사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이와는 달리 1384년(우왕 10)에 이곳 도봉산에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창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했는데, 이성계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성이 가까이 있는 무학골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 라는 직책을 맡고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했다고 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와서 무학을 찾아보고 절 이름을 회룡사로 고쳤다고 한다.

 

 

부도전. 회룡사 초입 우측에 크기와 형태가 비슷한 원구형 부도 3기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 ‘비구니 임보성(比丘尼 任寶成)’부도, 중앙  ‘비구니 서도준(比丘尼 徐道準)’부도, 왼쪽 ‘비구니 배혜주(比丘尼 裵慧珠)’부도이다.

 

설선당

석탑부재 그리고?

 

석불 대좌. 옥개

 

 

도문화재 자료 117호 현재도 사용중인 석조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으로 제작되었다. 이석조는 전체길이 224cm, 폭 153cm 깊이 67cm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에 현존하는 석조중 대형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석재를 잘 다듬어 표면이 매끄럽게 처리 되었고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내곡을 이루어 시각적으로도 안정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주구의 홈과 끝부분도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리하여 석조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서산 보원사지 석조에 버금 갈 만한 규모와 솜씨를 지니고 있어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규모는 물론 만든 솜씨도 뛰어나 조선새대 석조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중심 전각

 

 도유형문화재 186호 5층석탑

5층 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6년(632)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 했다는 전설을 지닌탑이다. 단층기단위에 오층탑신을 올린 높이 3.3m 규모의 일반형 석탑이다. 지대석과 기단의 상면에는 단엽 복판의 연화문을 조했고 면석의 각면에는 장방형의 구획을 나눈후 모두 안상을 새겼다.

 

1층부터 3층까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별개의 석재로 4층 이상은 탑신과 옥개석을 동일석으로 조성했다. 탑신석의 각면은 직사각형의 맥으로 삼등분했으며 옥개석의 이면에는 각형3단의 옥개받침을 조철했다.

 

 

복원한 오층탑 옆 석탑 부재(1)

 

 

석탑부재(2)

 

 

회룡사는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선 태조의 회가를 기념해 주창이 이루어지고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석탑은 왕실의 발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5세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근자에 중건한 대웅전

 

 

석가모니불. 관세음,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셨다.

 

신중탱

도문화재자료 118호 신중탱

가로 219.5cm 세로176cm인 그림 화면의 위쪽에는 제석천과 범천이 있고 아래쪽에는 위태천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주위에는 제석천과 범천의 권속과 팔부중이 시립한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들의 모습은 늘씬하면서도 경직된면이 보이는 신체와 19세기말에 유행하던 특유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옷은 분홍색에 가까운 옅은 붉은 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는데 군청과 녹색이 약간씩 첨가되어 19세기 후반기의 신중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내고 있다.특히 서울 근교의 불화양식이 잘 표현되어있는 이신중도는 서울 동작구 지장사신중도와 친연성이 짙은 것으로 당시의 신중도 중 대표 적인 예이다.

 

관음보살

 

절집, 시골 마을의 감나무에도 이제 까치밥은 드물다. 물질이 풍족해지고 삶이 윤택하여 수확을 포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지만 김남주 시인의 읊은 조선의 마음이라는 까치밥이 사라지는 것과 비례하여 우리의 정신문명도 황폐화 되는 것은 아닐런지. 이틀동안 함께한 동료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과 동료 부인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옛마을을 지나며 ...김남주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2010.11.14

회룡사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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