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영주시

영주...유석사

임병기(선과) 2014. 4. 22.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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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 창락리 산 36  영주 유석사. 풍기읍에서 소백산 죽령 방향 국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우측으로 진입한다. 예상보다 경사가 급하고 좁은 산길이기 때문에 운전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사찰 소속의 차량이 주차해 있었지만 절집은 적막 강산이었다.

 

유석사留石寺 사찰 유래를 보자. 신라 의상조사가  절 앞 느티나무 아래 반석에서 수행하고 간 일이 있다고 하여 유석사라고 불리는 설과,  근처의 소백산  희방사를 희사한 경주의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두운조사와의 인연을 간직하기 위하여 창건한  절로  유석사兪碩寺라고 붙였졌다고도 한다.

 

 

 

희방사 창건설화 속에 유석사 의 창건 설화도 전해온다.

 

신라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두운조사가 태백산 심원암에서 수도를 하다가, 지금의 풍기읍 희방사가 있는 소백산으로 자리를 옮겨 초막을 짓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 어느날, 조사 앞에 암범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조사가 자세히 살펴보니 산기가 임박해 있으므로 조사의 도움으로 범은 새끼를 낳았다.  초봄이 되자 밤은 새끼를 데리고 나갔다.그후  어느 날 저녁 문밖에 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범이 와서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무엇을 호소하는 듯 하였다.

 

조사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서 입을 벌려 보라"하고 입안을 살펴보니 목구멍에 커다란 은비녀가 걸려있지 않는가? 이것을 본 조사는 크게 꾸짖으며 "너같은 날랜 짐승이 무엇이 먹을 것이 없어 이런 못된 짓을 하느냐? 하면서 은비녀를 빼주고 두 번 다시 이런 것을 먹지 말라"고 타이르니 범은 사과하는 듯 사라졌다. 며칠 후, 이번에는 문 밖에 쿵하는 소리가 나므로 내다보니  범이 큰 산돼지 한 마리를 갖다 놓고 조사에게 드리려는 눈치였다. 범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인줄 알았지마는 조사는 "내가 술과 고기를 금하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 이런 부정한 물건을 가져왔느냐? 이런 짓을 할려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아라"하고 야단을 쳤더니 범은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지 사라졌다.

 

어느 달 밝은  밤, 범이 또 찾아와서는 문을 흔들었다. 조사가 문을 열자 장삼을 물고 당기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앞산 큰 바위 밑에 혼수상태에 빠진 한 처녀가 누워 있지 않는가? 조사는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는 18,9세쯤, 된 녹의홍상에 곱게 단장한 절색이었다. 그는 급히 움막으로 처녀를 옮긴 뒤  정신을 차리게 한 후  연유를 물은 즉 "저는 경주 계림에 사는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로서 오늘 결혼식을 치른 후 저녁에 막 신방에 들어가려는 찰나, 불덩이 같은 것이 몸에 부딪히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을 느낀 후에는 어떻게 된지 모르겠사옵니다"고 하였다. 여기서 경주는 4백리가 넘는데 비호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로구나, "너희집에서 얼마나 걱정하겠느냐? 며칠 쉬었다가 곧 돌아가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그 뒤 조사는 그 여자에게 남복을 입혀 총각처럼 꾸며 경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유호장은 며칠을 두고 딸을 찾았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온 집안이 머리푼 초상집 같았으나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왔으니 온 집안이 기쁨의 울음바다로 변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유 호장은 조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죄송하오나 조사님은 딸의 죽은 목숨을 살려 주신 은인이니 불민한 것이오나 거두어 인연을 맺게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고 은근히 사위 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조사는 "나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산중에 들어가 수도하는 몸이요, 이미 따님과는 남매의 인연을 맺었으니 그런 당치도 않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시요"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유호장은 조사의 수도생활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조사에게 큰 절을 지어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신라의 휼륭한 문화의 자취와 고적이 많으니 한 3개월 동안 조용히 순례하면서 유해 주시오." 간청하므로 그는 순순히 응락했다.

 

2,3개월이 자나자 화창한 봄날이 왔다. 유호장과 조사는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풍기읍에서 소백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은 새로 닦은 큰 길이 되었고 동구 앞 여울에는 쇠다리까지 놓아졌다. 그 뿐만 아니라 조사가 살던 초막은 없어지고 단청도 새로운 큰 법당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이 즐비하였다. 그제야 유호장은 사람을 보내어 3개월 동안 절을 지어 놓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전 가족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희방사喜方寺라 절 이름을 지었고, 저 아래 다리는 수철교水鐵橋, 풍기 서문 밖에 놓은 다리는 유다리兪다리라고 이름하였다."고 했다. 또 유호장은 조사와 인연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도솔봉 아래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유석사兪碩寺라고 하고, 토지 백여 두락 사서 공양미를 드리게 했던 것이다.

 

 

석탑재는 절 주차장 앞쪽 화단에 위치한다. 본래 유석사 석탑 부재 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탑재는 탑신석(본래 부재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한 개, 뒤집혀진 갑석, 옥개석 2개가 쌓여 있다. 옥개 받침은 3단이며, 아래위 옥개석의 물매가 서로 맞지 않다. 고려후기 석탑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 시절(1868) 중수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 조성된 탑 아니었을까?

 

 

 

새벽 대구에서 출발하여 달려왔더니 산아래  풍기와 멀리 영주 시내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않았다.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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