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집으로 혼자 숙박하기에는 불편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 5시30분 차량으로 매표소를 통과하여 복천암까지 속리산을 나혼자 차지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 답사도 쉽지 않았다. 절집은 너무 조용하여 발걸음 옮기기 조심스럽고 열린 법당문 출입도 자유롭지 않았다.
결국 법당의 전등도 켜지 못하였고 나한전은 들어갈 엄두도 못 내었다. 설상가상으로 복천암 답사의 주목적으로 꼭뵙고 오겠다고 가는 길까지 인지하였던 수암화상(신미대사) 부도와 등곡대사 부도는 까마득히 잊고 암자를 내려 왔다. 발품을 팔지 않고 차량으로 이동한 업보 아닐까? 다음에 문장대 산행 기회가 오면 중사자암 부도와 더불어 인연 지어야겠다.
복천암.
조선 세종 31년(1449)에 신미선사가 중수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다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1735)에 탁융선사가 소실된 것을 재창하였으며 순조 3년(1803) 취준사가 중수하였다. 세종대왕이 신미선사의 한글창제의 보답으로 아미타삼존불을 불사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현재의 아미타삼존불은 새로 복원한 불상이다.
복천암의 신미대사와 한글창제에 관한 글을 가져 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1C15455432359E0C?download", "훈민정음과 신미대사.
지주석.
극락보전. 다포계맞배지붕임에도 측면에도 공포를 두었다.
아미타삼존불과 삼세불화
복천암 극락전의 주불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다. 이 불상은 법당이 1733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1735년부터 1737년까지의 중창불사 때에 법당과 함께 조성된 상이다. 1737년(건륭 2년)에 이루어진 복장 발원문은 다시 불상에 봉안되었는지 조사 때에는 볼 수 없었고, 『寺誌』(충청북도, 1982. P.254)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불상을 만든 조각장은 演機, 斗策, 守性, 超鵬, 守堅, 廣鵬 등임을 알 수 있다.
석불좌상
복천암 주변이 밝아 오지만 내마음은 아직 캄캄한 어둠이다.
2015.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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