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괴산군

괴산...공림사 사적비.부도

임병기(선과) 2015. 5. 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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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계곡에서 자동차 20분 거리. 공림사-도명산-마애불-화양계곡 등산로를 이용하는 코스와 역코스를 등산 애호가들이 즐긴다고 한다.

 

 

경내의 사적비에 의하면 공림사는 신라 48대 경문왕(861-874)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수도하던 암자에 경문왕이 선사의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존호와 주석하는 절에 공림사의 이름을 지어 공림사空林寺라 쓴 현판을 내린 사액사찰이다.


조선 정종 원년에 함허당 득통화상涵虛堂 得通和尙이 폐사된 절을 중창하고 주석했다. 이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대웅전만 남고 소실되었던 것을 인조때 중창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전에 공비들이 절에 출몰한다는 이유로 토벌군에 의해 전소되어 폐사되었다.

 

 

대웅전 삼존불

 

 

 

 

공림사 사적비.  강희(康熙) 27년 3월(숙종 14년.688)에 세운 비로, 대웅전 좌측 부도전 반대편에 서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복련을 새긴 비좌를 놓고 대리석 비신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올렸다.   비문은 4면에 모두 새겨져 있다.   비문은 석경일釋敬一이 찬하고, 허암虛菴이 쓰고, 조영祖瑛이 새겼다.  전면에는 공림사의 유래와 연력, 비의 건립경위 등을 적었다. 다른 3면에는 시주자, 승려, 주지, 각수의 이름을 새겼다.  

 

 

 

비좌 안상

 

 

비좌 안상과 복련

 

 

조선국(朝鮮國)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 낙영산(落影山) 공림사(空林寺) 사적비명(事蹟碑銘) 병서(幷序)

부종수교(扶宗樹敎) 복국우세(福國祐世) 운지흥비(運智興悲) 변재무애(辯才無礙) 전불심인(傳佛心印)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 사조사문(嗣祖沙門) 동계(東溪) 석경일(釋敬一)은 글을 짓고, 아울러 쓰다. 조계종(曹溪宗) 허암(虛菴), 운거(雲居) 무시옹(無是翁) 납(衲) 조영(祖瑛)은 전액(篆額)을 하다.

대체로 도(道)는 세속을 초월한 것으로써, 모두 중원(中原)이나 오랑캐의 성인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와 노자(老子), 두 성인은 동쪽 땅에 내려오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광명은 저 서쪽 지역에서 떠올랐으나, 주(周)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모두를 오른편에 아울렀다. 고금의 천하는 마치 일월성신이 동쪽 바다 위에서 합하고 강수(江水), 하수(河水), 회수(淮水), 제수(濟水)가 미려(尾閭)의 못으로 모이는 것과 같다.

 

유가(儒家)는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도가(道家)는 도덕(道德)을 주된 뜻으로 삼아서 모두 육합(六合)의 안에서 노닐지만, 불교(佛敎)는 진정(眞淨), 무위(無爲), 소저(昭著), 유심(惟心)의 도로써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을 겸하고 육합(六合)의 안과 밖에서 노니니, 논하여 변론하는 것이 명확하다.

그 도가 넓은 것은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으며, 그 도가 광대한 것은 창해(滄海)가 온갖 냇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견(比肩)된다. 여러 사물을 찾아 취하여 물상(物象)을 감싸 안으니, 설법(說法)을 할 때면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이 내리어, 그 올바른 자리에 들어가서 육단(六端)이 샘솟는다.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 제석천(帝釋天)과 범천왕(梵天王)이 그 법륜(法輪)과 용화(龍畵)를 움직이기 청하였으나, 저 공자와 노자는 구구한 인의(仁義)로써 일곱 개의 포악한 나라의 사이에서 마치거나 외로이 남은 도덕경(道德經)을 오천 마디 안에서 세상을 판단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쳤을 뿐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각황(覺皇)께서는 재난이 닥치기 전에 부처의 도를 멀리 계승하여 밝히시고 사바세상에서 운명에 순응하여 넓은 세계의 존귀한 주인이 되셨으며, 다시 사생(四生)의 아버지로 돌아가셨으니, 그 성대한 공열(功烈)은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삼가 그 대중을 교화하는 가르침이 동방(東方)으로 전해진 것을 상고해보건대, 주(周) 나라 목왕(穆王)의 시대에 이미 서방(西方)에서 날아온 화인(化人)이 있어 은밀하게 점점 전해졌고, 동한(東漢)의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스님을 맞아들였으며, 섭마등(葉摩騰)이 와서 마침내 신주(神州 중국)에 크게 전해지고 천하에 범람하여, 마치 큰물이 평지에 달려가듯 하고 맹렬한 바람이 허공에 크게 일어나는 듯하니, 그 성대한 기세를 누가 막아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멀리 하늘의 동쪽에 있지만 다행히 지극한 교화(敎化)가 전해지는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가 널리 퍼진 뒤로 마침내 사해(四海)의 명산대천(名山大川)과 훌륭한 경치를 가진 고을이 모두 불계(佛界)의 귀한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고, 금전옥답과 온갖 재물을 중국과 오랑캐, 원근(遠近)의 교외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가 있으면 가는 곳마다 불가(不可)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낙영산(落影山)의 공림사(空林寺)는 서원부(西原府) 동쪽 80리(里)에 있는 옛 절인데, 그 절과 산의 기이한 자취가 여섯 가지 있다. 옛날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때에 자정(慈淨)이라는 고승(高僧)이 있었는데, 그 도(道)와 덕(德)이 높아 사방에까지 전해졌다. 왕이 흠모하고 우러러서 대사(大師)를 불러들여 예(禮)를 갖춰 국사(國師)로 삼아 벽상삼한상삼한삼중대광사(壁上三韓上三韓三重大匡師)로 봉(封)하였으며, 마치 계거조(鷄鶋鳥)가 노(魯)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대우하니, 대사는 즉시 사양하고 숨어서 이곳에 초가집을 지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찰을 세워 거처하게 하고, ‘공림(空林)’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그 후 명(明) 나라 건문제(建文帝) 시대에 이르러 함허당(涵虛堂) 득통화상(得通和尙)이란 분이 있었는데, 자정선사(慈淨先師)의 행적을 사모하여 그 법당(法堂)과 요사채 등을 다시 세워 하나같이 새롭게 하였다. 그곳을 사람들이 함허(涵虛)의 도량(道場)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 사찰의 전후(前後)에 걸친 기이한 자취 중의 첫 번째가 된다.

천순(天順) 연간에 이르러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선문(禪門)에 뜻을 두시어 친히 이곳에 행차하시고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이곳을 보전하고 보호하라고 하셨으니, 그 당시 삼가 받은 문권(文券)이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영원히 산문(山門)의 중대한 보물이 되고 있다. 사찰이 옛날과 지금의 임금께서 함께 중요하게 여긴 바가 되었으니, 기이한 자취 중의 두 번째가 된다. 사찰의 북쪽에 미륵봉(彌勒峯)이 있는데 부용(芙蓉)이 만장(萬丈)이나 되게 치솟아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꼭대기에 큰 돌이 있고 돌 가운데에 황금빛의 밀탑(密塔)이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중국의 도읍 낙양성(洛陽城) 중에 드리워졌다. 무덕(武德) 연간에 당(唐) 나라 고조(高祖)가 조짐을 보고 점을 보는 사람에게 점을 치게 하고, 곧 사람을 보내 남은 자취를 추적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징봉(澄峰)에 이르러 보니, 단지 돌만 보이고 탑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돌의 윗부분을 뚫어보니 과연 탑이 있었으므로, 이에 그 탑을 꺼내었다. 드디어 몸이 육장(六丈)이 되는 미륵불상(彌勒佛像) 3좌(座)를 돌 표면에 안정시키고는 그 산의 이름을 ‘낙영(落影)’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세 번째가 된다.

미륵봉은 깊은 계곡과 험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고 빼어난 물과 돌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가 위아래로 10리(里)에 펼쳐있어 모두다 선경(仙境)이다. 세상에서는 ‘파곶[葩串]’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네 번째가 된다. 절 서쪽의 법화원(法華院)은 불타버려 마른 빈 자리에 우뚝하게 있는데, 바로 신라의 신승(神僧) 검단선사(黔丹禪師)와 최고운(崔孤雲)이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했던 자리이다.

 

그러므로 검단산(黔丹山)이 그 서쪽에 있고 고운대(孤雲臺)는 그 아래에 있다. 또 청화산(靑華山)이 있어 동쪽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속리산(俗離山)은 남쪽에서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다. 낙영산(落影)은 두 명산(名山)의 사이에 있으면서 자정(慈淨), 함허(涵虛), 검단(黔丹), 고운(孤雲) 등 네 사람이 일어나 천지간에 고명(高名)을 얻었다. 이것이 산의 훌륭한 경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이한 자취의 다섯 번째이다.

정유년과 임진년의 난리를 겪었을 때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사찰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기운을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불을 놓았다. 그러나 오직 동서(東西)의 회랑(回廊)은 다 타서 재가 되었지만 불전(佛殿)과 스님의 거처는 바람이 바뀌고 불길이 소멸되어서 모두 재앙을 면하였다. 적들이 화를 내며 활을 어지러이 쏜 뒤에 떠나가니, 그 화살촉의 흔적이 절의 기둥에 완연히 남아 있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것이 또한 절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 중의 여섯 번째가 된다. 그

 

러고 보면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모두 자정과 함허가 일찍이 거쳐 갔던 곳이지 난리 뒤의 사람들이 새로이 지은 곳은 아닌 것이다. 지금 큰 스님 태행(太行)이 부처님을 모실 계획으로 여러 시주(施主)들에게 알리니, 즉각 착하고 신실한 군자(君子) 20여 명과 흥비(興比) 세 사람 등이 같이 부처님께 큰 소원을 빌며 함께 논을 거두어 부처님께 시주하여 영원히 부처님을 모시는 재원(財源)으로 삼았으니, 어찌 적은 보탬이겠는가.

무릇 모든 비명 새기는 일은 이미 그 일을 마치게 되면 그에 대한 사적을 새기거나 공덕(功德)을 칭송함으로써 세상에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도모하는데, 이를 일러 참람되게 비석이라고 하여 마침내 그로써 전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대중들이 모여 체심도인(體心道人)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아! 이 사찰은 자정(慈淨)과 함허(涵虛), 두 선사(禪師)의 도량이지만, 일찍이 기록해놓은 글이 없습니다. 옛날의 기이한 자취에 대해서는 비록 사람들이 입으로 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문장가의 손을 빌어 글을 지어서 쇠나 돌에 새김으로써 견고하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비석을 세워서 옛 일을 빛나게 한 것은 모두 지금 여러 시주(施主)들의 공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계종(曹溪宗) 장로(長老) 조영(祖瑛) 대덕(大德)이 살펴보고 기뻐하여, 정묘년에 간단한 편지를 써서 하인을 통해 영남(嶺南)으로 보내서 나에게 뇌문(誄文)을 청하였다. 내가 조영과는 함께 가르침을 받은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시절의 교분도 깊었으므로 나의 졸렬함을 이유로 그가 소망하는 것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해 겨울 통정대부(通政大夫) 응민(應敏) 스님을 보내서 글을 재촉하였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보내온 글을 정리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것은
주(周) 나라와 진(秦) 나라 때의 일이고,
한(漢) 나라에 이르자 매우 흥성하여
해인(海印)이 온전히 밝혀졌다.
집안에서 기원하여
동방(東方)에 두루 전파되었다.
이에 자정선사(慈淨禪師) 계셔서
불법(佛法)을 친히 익히시어
풍파(風波) 없이 도(道)를 물었도다.
저 신라왕(新羅王)이
어미 새가 그 새끼를 기르듯이 따라
선사 위해 도량을 창건(創建)하였다네.
함허가 옛 모습을 상고(詳考)하여
전(殿)과 당(堂)을 짓고,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직접 행차하시니
산은 더욱 빛이 났네.
푸르고 푸른 낙영산(落影山)은
당(唐) 나라 낙양(落陽)에 그림자 드리우고
금탑(金塔)과 부도(浮屠)를 빛내며 감싸고 있네.
밝은 계곡과 빼어난 산,
맑은 근원을 가진 골짜기 안에
천년을 전해 내려온 선방(禪房)을 품고 있어,
이 산 과 이 절에
여섯 가지의 신기한 사적이 전해 내려온다네.
여러 시주(施主)들이
신심(信心)으로 농장(農莊)을 시주하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복(福)을 구함에 그 예절을 아는구나.
그 행적이 비석에 적혀 있어
영원히 멀리 후대(後代)에 전해질 것이니,
떠가는 구름도 돌을 보호해주기를
탁보(卓甫)는 바라노라.

강희(康熙) 27년(숙종 14, 1688년) 3월 일.

 

출처...한국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사적비 옆 조선후기 부도, O인O사O광탑.O印O史O光塔. 공림사 사적비를 세운 스님과 관련은 없을까?

 

 

부도전. 조선전기(?) 부도 2기와 근자의 부도 1기, 뒷편에 조선 석종형 부도 1기 등 4기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방형지대석 위에 8각 하대석과 괴임을 놓고  위에 팔각중대석을 얹고, 역시 팔각상대석을 놓았다. 탑신은 8각의 흔적을 남긴 둥근 형태이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급하나 끝이 반전되었다. 옥개석 위에 보주를 올렸다.

 

근거는 없지만 1기는 조선 전기 정종 조에 공림사를 중창한 함허대사의 부도로 생각된다.

 

 

 

 

 

뒷편 홀로 선 조선후기 종형 부도.

 

 

방형석조

 

 

노주석

 

 

 

나의 님이 오시나 보다.

 

201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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