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괴산군

괴산...우암 송시열 유적지

임병기(선과) 2012. 8. 11.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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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와 화양서원 그리고 우암 송시열.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 이상 등장하는 인물, 관점에 따라 평가가 제각각인 대유학자. 우암에 대하여 지식도 일천하며, 자격도 없기 때문에 나의 평가는 사족에 불가하리라고 본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자료를  다음카페:華陽同樂, 백과사전,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재청, 괴산군청 등에서 발췌하여 올린다.

 

화양구곡 입구의 괘불지주. 사찰의 괘불지주인지 만동묘 입구의 하마비 기능의 차단막이었는지 확인하기 못했다. 청천 우암 송시열유적은 화양동계곡 안에 있는 화양서원터(華陽書院址)와 만동묘터(萬東廟址)를 중심으로 암서재, 읍궁암, 애각사적, 묘소와 신도비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로 구성되었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99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후 2002~2004년까지 유지가 남아있는 건물 8동을 복원 정비하였다.

 

 

화양서원 묘정비.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다. 전자는 옥편체에서 집자하고, 비문은 안진경(顔眞卿)체에서 집자한 것이다.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찾아 세워 놓았다.

 

 

만동묘.1703년(숙종 29)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華陽里)에 세운 사당이다.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은 북향하여 지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는데, 단순히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로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전한다.

 

만동이란 물이 만 구비를 꺾어 흘러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서 존명의식(尊明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만주족인 청(淸)은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이민족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숙종대 문인인 민정중(閔鼎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자를 얻어 송시열에게 주었는데,송시열은 1674년(현종 15) 이것을 화양리의 석벽에 새긴 뒤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전에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서면으로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부탁했다. 만동이란 이름은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것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했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급여해주기도 했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粢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대원군 집정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양추문. 화양서원 외삼문

 

화양묵패.화양서원에서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공문서로 당초 서원의 업무를 유지, 관리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문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화양묵패 華陽墨牌」때문에 폐해가 막심했다. 유생(儒生)들이 모여앉아 제멋대로 남의 재산을 요량(料量)하고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으로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띄우면,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민(官民)을 가리지 않고 논밭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되었다.

만일에 응하지 않으면 지체 없이 서원 뜰로 잡혀가서 정면으로 협박·공갈을 당하게 되고, 자칫하면 불호령에 사형(私刑)까지 당하기가 예사여서, 이른바 「화양묵패」는 실로 공갈·약탈을 전제로 하는 협박장(脅迫狀)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런 불법(不法)·무도(無道)한 행위가 문제되어,대원군(大院君) 이전에도 이 서원은 물론이요 기타의 일반 서원도 여러 번 단속하였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지정 음식점)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렸다.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푼이나 있는 요역 기피자(徭役忌避者)들이 이곳에 모이니 나라는 그만큼 손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을 대신하게 되었다. 1862년(철종 13) 3월에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둬들였으므로, 물의가 들끓어 역시 김좌근의 주청으로 금지당했다. 이 서원은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만동묘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신종과 의종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 있었다. 만동묘이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우리 나라를 도와주웠고 의종은 신종의 손자로 명나라 마지막 왕이다. 왜 화양동에는 조선왕조의 왕도 아닌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 있었던 것일까?   

 

우암 송시열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우암의 사대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것이 만동묘라고 한다. 더 나아가 만동묘는 대표적인 조선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비판되곤 하였다. 과연 그러한지, 만동묘를 짓도록 한 우암의 진정한 속뜻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동묘의 창건 계기는 우암의 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암은 1689년(숙종 15) 5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었다.

 

일찍이 나는 늘 마음 속으로 환장암 뒤편 왼쪽에 한 채의 사우(祠宇)를 세우고 위패에 ‘만력신종황제(萬曆神宗皇帝)’,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라고 써서 봄가을로  무이신례(武夷神禮)에 따라 마른 고기로 제사를 올리는 동시에 술은 서실(書室) 텃밭에서 나는 곡식으로 정결하게 빚고 오직 축사만은 성대하게 칭송하고자 하였네. 이 일을 마음속으로 경영한 지 오래였는데 이루지도 못하고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보다 큰 한이 어디 있겠는가.

 

우암은 환장암 뒤편 왼쪽에 사당을 짓고 명 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려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권상하를 비롯한 제자들은 우암이 남긴 뜻을 받들어 사당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짓는 일은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 황제의 사당을 사사로이 설치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수 있고,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암은 중국의 여러 사례를 들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 데다, 권상하 역시 중국 기나라의 하묘(夏廟)와 송나라의 은묘(殷廟) 제사를 들어 만동묘를 지어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드디어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는 조정의 허락없이 우암의 제자와 인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1704년(숙종 30) 화양동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냈다. 만동묘 위치는 환장암에 건립하려는 우암의 계획과는 달리 우암이 살던 초당 옆에 건립하였다.

 

만동묘라는 이름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이란 글에서 ‘萬’과 ‘東’자를 취해 지은 것이다. 만절필동이란 뜻은 황하의 물줄기가 만번 꺽이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돌아온다는 뜻으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반드시 동쪽에 있는 조선으로 흐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암은 만동묘를 짓고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한 것일까? 우암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신종이 조선을 도와준 은덕을 찬양하였으며, 그 덕분에 멸망할 위기에 있던 조선이 다시 번성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의해 멸망된 중화의 정통왕조 명나라에 대한 의리이자 정통을 계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창건된 만동묘는 1710년(숙종 36)에 우암을 제사하는 화양서원과 합께 존주대의(尊周大義)의 본산이 되었다. 춘추로 지내는 제사 때는 호남과 영남의 선비들까지 모여 참여자가 수백 명이나 될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 더욱이 1726년(영조 2)에는 우암의 문인으로서 당대 노론을 이끌었던 민진원이 만동묘를 중수한 뒤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관둔전(官屯田) 5결(結)의 땅과 노비를 주었다. 1744년(영조 20)에는 충청감사가 만동묘의 중수를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747년(영조 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키게 하였으며 만동묘의 창건 내력을 적은 묘정비(廟庭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1776년(정조 1)에는 정조가 친히 ‘만동묘’ 글씨를 써서 사액하였을 뿐 아니라, 1809년(순조 9)에는 기존의 사당을 헐고 다시 짓도록 하였다.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번씩 충청도관찰사가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하는 등, 1704년 창건 이래 조정에서는 만동묘를 극진히 다루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였던 영조∙정조시대에 크게 번창한 만동묘의 건물은 지패(紙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上丁)에 봉행하는 제사를 올리는 묘우(廟宇)가 5칸, 제관의 숙소 또는 유림들의 회합이나 학문 토론장소로 쓰이던 3칸의 정침과 그 동서쪽에 각각 1칸의 협실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당보다 규모가 컸다.

 

그리고 ‘성공문(星拱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삼문과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었으며 외곽의 담장이 남북으로 길게 사당을 두루고 있다. 그리고 외삼문 밖에는 나란히 2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오른쪽(동) 건물은 제물을 준비하던 증반청(蒸飯廳), 왼쪽(서)은 집사의 숙소로 쓰이던 존사청(尊祀廳)이 있었다. 서쪽 입구에는 주문인 진덕문(進德門)과 홍살문, 하마비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만동묘는 조정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조 이래 노론정권이 장기 집권하고 송시열의 화이론이 그 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세가 날로 증대하여 폐단도 자못 컸다. 만동묘는 그 당시 전국의 서원이나 사당 중에서 가장 위세를 부려 폐해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1865년(고종 2) 3월 29일 대원군은 명나라 황제들을 대보단(大報壇)에서 제사지내므로 개별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만동묘에 안치되어 있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지방과 만동묘 편액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그뒤 많은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활되지 않았으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이항로․최익현 등 유림들의 거센 상소로 1874년 2월에 왕명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바뀐 상황에서 만동묘의 운명은 되돌릴 수 없었다. 1908년 일본 통감부는 만동묘를 폐철하는 동시에 소유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그에 맞서 1910년에 송병순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하여 제사를 비밀리에 올리는 등 유림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1917년에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들은 계속 제사를 올렸다. 1937년에도 일제는 유림들을 구속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던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1942년에는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리기까지 하였다. 결국 1943년에 만동묘는 완전 철거되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만동묘 묘정비는 앞 개울에 매몰되어 있었는데, 1983년 홍수 때 발견되었다. 현재는 1996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져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돌계단과 주촛돌만 쓸쓸히 남아 있던 만동묘는 2006년에 진덕문과 홍살문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복원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최근 만동묘가 복원되는 과정에서 찬반 논란이 거셌다. 찬성하는 쪽의 입장은 만동묘가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교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조선중화주의를 상징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복원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원을 반대하는 쪽은 만동묘가 조선 사대주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자 조선후기 정치 및 사회경제적 폐단의 온상이었다는 점을 지목하고 있다. 양자의 시각차가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 만큼이나 크고 극단적이다.

 

그러나 만동묘를 처음 세우던 당시 우암의 순수한 뜻과 이후 만동묘를 끼고 자행된 유림들의 작폐는 구분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암이 만동묘를 세운 목적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명나라가 오랑캐나라인 청나라에게 멸망해서 끊긴 중화의 정통을 이어받기 위한 의례적 표현이었다. 성리학에서 정통을 잇는 가장 확실한 예의범절은 제사였던 만큼, 명나라 마지막 황제에 대한 제사는 황제에 대한 사대적 표현이 아니라 조선이 중화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상징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동묘를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한 예로 만동묘는 현재 증산교와 대순진리회의 성지이다. 강증산(1871~1909)은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道典 5:325:1~10)이라 하였다. 이 말은 조선중화주의의 상징체인 만동묘가 세계의 중심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오는 신도적(神道的) 디딤돌이 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강증산은 도통한 뒤 제일 먼저 만동묘를 찾았다. 이는 곧 조선이 세계 개벽의 중심국가로서, 그 연원이 만동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같은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의 정통 계승의식은 곧 조선중화주의가 계승 발전된 한 모습이 전승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설령 만동묘를 조선중화주의의 상징체로 평가할지라도, 그것을 복원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복원 전 만동묘의 쓸쓸한 모습이 더 많은 역사의 추체험을 하게 한다는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끼 낀 돌계단과 앙상히 남아 있던 건물의 주촛돌은 사라진 왕조를 연상하게 할 뿐 아니라, 이곳에서 지낸 제사의 의미를 더욱 곱씹어 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이 함께 고민될 때 복원한 만동묘의 참 가치는 더욱 빛날 수 있으리라.

 

비례부동

 

화양동에 있는 여러 바위글씨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양동을 찾는 많은 이들이 이 바위글씨를 보지 못한 채 되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무나 소중하기에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바위글씨는 화양동 제5곡인 첨성대에서 계곡 쪽으로 20m 내려온 지점에 있는데, 제6곡인 능운대의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다. 암서재에서 계곡을 따라 위로 오르면 도명산 이정표가 나오고 이곳에서 10m 정도 산길을 오르다 왼쪽 계곡방향으로 내려간 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된다. 또는 화양제3교를 지나 능운대식당 앞 계곡을 건너 하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산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만날 수 있다.

 

바위글씨는 큰 바위 밑을 쪼아낸 뒤 붉은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글씨들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非禮不動’(비례부동) 네 글자와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여덟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비례부동’ 네 글자는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멋진 글씨이며,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우암의 글씨이다.

 

이들 글씨의 내력은 그 주변에 새겨져 있는 작은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비례부동’ 우측에는 ‘崇禎皇帝御筆’(숭정황제어필) 여섯 글자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숭정황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가리키며 어필은 황제의 글씨란 뜻이다. ‘비례부동’ 네 글자는 바로 명나라 의종황제의 글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씨는 언제 누가 새긴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비례부동’ 왼쪽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풀어준다. 그곳에는 ‘陪臣閔鼎重奉至 與宋時烈等謹拜手 稽首摸勒時四十七年甲寅四月日也’(배신 민정중이 받들고 와서 송시열 등과 함께 삼가 공손히 절을 하고 본떠 새기니 때는 47년 갑인 4월 일이다)라는 29자가 새겨져 있다. 이 29자의 한문 뜻은 민정중이 가져온 것을 송시열이 갑인년 4월에 새겼다는 의미이다. 갑인년은 1674년(현종 15)이다. 따라서 ‘비례부동’은 1674년 4월에 송시열이 직접 바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 우암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민정중은 1669년에 동지사 사신으로 청나라 북경에 갔다. 민정중은 북경에 머물면서 명나라 의종의 글씨를 널리 구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의종의 글씨를 가지고 왔다. 민정중은 비용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려 하였는데, 민정중의 뜻을 안 그 사람은 돈을 사양하고 글씨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글씨를 구한 민정중은 조선으로 돌아와 우암 송시열에게 1671년에 주었고, 우암은 그 글씨를 1674년 4월에 화양동에 새긴 것이다.

 

우암은 ‘비례부동’이 다른 사람이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유필(遺筆)이라는 점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의종은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1644년(인조 22)에 의롭게 죽음으로써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의리’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우암은 의로운 의종의 죽음이야말로 예를 실천한 것이자 ‘비례부동’의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렇다면 ‘비례부동’의 정신은 무엇인가? 원래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원이자 핵심으로 이해되었다.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출발점이자 요체는 수신(修身)에서 시작되며, 수신의 핵심은 비례부동에 있다는 인식이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대해 ‘비례물시․비례물청․비례물언․비례물동(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이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말을 <<논어(論語)>>의 핵심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때 예가 아닌 ‘비례(非禮)’는 사사로운 욕심을 의미하며 그 뒤에 나오는 네 조목은 각각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례부동’이란 말 뜻은 ‘극기복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린다는 뜻의 ‘存天理 去人欲(존천리 거인욕)’과도 상통한다. 예는 곧 하늘의 이치로써, 사사로운 인간의 개인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이자 방편인 셈이다.

 

더 나아가 우암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의 정치관과도 부합되었다. 우암은 현실과 타협하여 청나라에 굴복하는 것을 극기복례와 비례부동에서 버리거나 극복해야만 할 ‘기(己)’․‘비례(非禮)’․‘인욕(人欲)’으로 보았다. 반면에 청나라에 복수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예(禮)’․‘부동(不動)’․‘천리(天理)’로 인식하였다. 그런 만큼 우암에게 있어서 청나라를 거부하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며 중화의 정통을 지켜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늘의 이치였던 것이다.

 

이처럼 ‘비례부동’이란 말은 우암의 철학을 대변하는 말이자 그의 세계관과 정치관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암은 민정중으로부터 의종의 글씨를 넘겨받은 뒤 화양동 계곡 바위에 새겨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이다.

 

                                    

만동묘 내삼문. 담장을 경계로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구획하였다.

 

 

만동묘정비.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둔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에 있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일제가 고의로 훼손하여 묻은 비는 1983년 홍수에 발굴하여 다시 세웠다.

 

 

만동묘

 

 

정료대

 

 

만동묘 내부

 

 

송시열 초상...출처/다음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 朱子大全≫과 ≪주자어류 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 등의 저술을 남겼다.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먼저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때문에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그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으나, 실상은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이기·심성론에는 주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이의 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즉, 여러 상이한 이론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정립하였다.

 

이(理)·기(氣)의 선후 문제나 혼합성[不相離]·분리성[不相雜] 등과 같은 문제는 항상 이율배반적인 쟁점을 가진 것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입론처(立論處 : 관점)에 따라 범주화(範疇化)하여 각기 타당성을 논증, 형식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였다.예를 들면 그는 이·기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는 이·기의 상호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하고 논리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기가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는 이이의 대명제를 받아들여, 이것을 이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도 동(動)과 정(靜)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가 기를 주재하기 때문이며, 기의 관점에서 말하면, 이에는 동과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기가 이를 운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그리고 원두(源頭)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논리적 이선기후(理先氣後)를 말하는 것이며, 유행(流行)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기에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변화의 세계에서는 이·기가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이렇게 입론처에 따라 타당성을 인정하고 범주화하여 통합하는 방법은 상이한 특수 이론들을 수용하여 체계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 밖에 형(形)과 기(器)의 혼동을 분별하여 형·기·도(道)의 관계에 삼단설(三段說)을 세운 것도 그의 독창적인 면이다. 심성론에 있어서는 마음을 기[心卽氣]로 보는 정통적 입장에 있었으나, 입론처에 따라서는 마음도 태극이 되는 것(心爲太極)이라 하여 마음 본체의 무궁함을 말하기도 하였다.또 그는 마음이 발하기 전의 상태를 성품[性]으로, 마음이 이미 발한 상태를 정(情)으로 보았다. 마음이 발한다는 것은 곧 기가 발하여 이가 실리는 현상인데 이것이 칠정(七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주리파(主理派)에서는 칠정과 사단(四端)을 엄격하게 분별했으나, 그는 사단도 칠정에 속하는 것이며 불선(不善)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성품에서 발할 때 절도에 맞으면 도심(道心)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인심(人心)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수양론(修養論)이 전개되는데 그 핵심은 ‘정의를 모아[集義] 기상을 기르는 일[養氣]’이었다. ‘정의를 모으는 일’은 곧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서 그는 이것을 ‘정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수양론도 곧 ‘정직으로서 기상을 기르는 일(以直養氣)’로 압축되었다.그의 지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 활동의 저력은 기상이고 그것은 정직으로서만 길러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직은 수양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정직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와 후손들에게도 강조하여 마지않았다.

 

그런데 정직에 의한 기상의 도야는 불굴의 의지를 함양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었고 화합과 타협에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그의 정치사상은 조선 중기의 사림정치 이념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정치의 원리를 ≪대학≫에서 구했는데,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표현된다. 즉, 남을 다스리는 일은 자신의 수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통치자의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특히, 임금은 만화(萬化 : 만물의 조화나 변화, 특히 인간 사회의 모든 변화)의 근본이므로 군덕의 함양이 정치의 제일 과제라고 믿어, 맹자의 “한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르게 된다(一正君而國正).”는 주장을 정치 활동의 지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왕에게 수신·제가·면학을 강조하고 사심과 사은(私恩)을 억제할 것을 권하였다.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건의하였다. 즉, 국가의 용도를 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 궁중의 연악과 토목 공사를 억제하며, 공안(貢案)을 바로잡고, 군포를 감해 양민(良民)의 부담을 줄이며, 사노비의 확대를 억제하여 양민을 확보하며, 안흥에 조창(漕倉)을 설치하자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정쇄신책은 이이의 변통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민생 안정과 국력 양성 문제는 그 자체가 당면한 급선무였기도 하지만, 그는 북벌(北伐) 실현을 위한 선결 과제로 인식하였다.그의 정치사상에서 또하나 간과될 수 없는 것은 예치(禮治)의 이념이었다. 이는 공자의 통치 철학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장생의 예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 ”고 강조하였다.

 

예는 유교 정치에 있어서 교화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복제예송(服制禮訟)에 깊이 개입했고, 만년에는 종묘제도의 이정과 문묘배향 문제, 정릉의 복위와 효종의 세실 문제, 만동묘의 설치 등 국가적 전례 문제에 정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그는 김장생을 계승한 예학의 대가로서 중요한 국가 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예학적 견해 차이로 인한 예송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이 때 윤휴(尹鑴)는 ≪의례 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들은 송시열의 설에 따라 대공복(大功服 : 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년복으로 번복되었다.그 결과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 ”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효종대 북벌론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문제로 효종과 비밀 대담[獨對]을 가지기도 했고, 왕과 비밀 서찰을 교환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그들의 북벌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효종과의 비밀 대담이나 서신 왕래에서 그가 건의한 것은 극히 이념적이고 원론적인 것이었으며, 실제적 대책은 아니었다.북벌론은 1659년 봄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으나, 당시 형편으로는 즉각적인 북벌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양민의 부담이 컸던 급료병(給料兵 : 직업군인)을 줄이고 민병(民兵 : 농민군)을 활용하자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효종의 양병정책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북벌의 실제 준비보다 그것이 내포한 이념성을 강조하였다. 명나라를 향한 존주대의와 병자호란의 복수설치 문제는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이며, 그것이 모든 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는 물론 춘추대의의 관념에서 나온 유교적 명분론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강력한 이념이 국내 정치에서 부패와 부정을 억제하고 기강의 확립과 행정의 효율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벌 이념은 송시열 자신과 그 일파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대의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북벌론은 효종의 죽음과 함께 침묵되었다가 숙종 초기에 다시 제창되었는데, 효종대에 그의 북벌론은 그 이념성과 함께 부국안민의 정책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숙종대에 국가의 전례 문제와 결부되어 다시 제창된 존주론(尊周論)에는 오직 당쟁에서 대의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이념성만이 강조되었다.

 

사회사상을 살펴보면, 송시열은 매우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또 실제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먼저 사회신분 문제에 있어서 양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권은 제한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우선 양민에게만 지워졌던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의 실시를 통해 양반의 노비 증식을 억제하고 되도록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는 또 서북 지방(평안도·함경도) 인재의 등용과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말하기도 하였다.아울러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회 정책은 양민의 생활 안정이었다. 이를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 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빈민의 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도 노비제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노비도 같은 인간임을 인식시켜 부당한 사역이나 가혹한 행위를 억제하도록 역설하였다. 충절이나 선행이 드러난 경우에는 서얼·농민·천민에 이르기까지 전기나 묘문·제문을 지어 표창하였다.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효행·정절·순종 등 전통적 미덕을 강조했으나, 동시에 가계의 관리와 재산 증식 등 주부권과 관련된 경제적 구실도 중시하였다. 사회 풍속 면에서는 중국적·유교적인 것을 숭상하여 토속적·비유교적인 것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혼례 등의 예속과 복식,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세속과 다른 중국 습속들을 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여 교화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그는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 효종릉의 지문)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그는 학계와 정계에서 가졌던 위치와 그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추종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교우의 중심은 역시 김장생·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송준길·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으로 이들과 함께 세칭 산당(山黨)으로 불렸다. 한때는 남인 권시(權諰)·윤휴와도 절친한 적이 있었다.

 

벼슬에 나아간 뒤에는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들인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형제들, 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 형제, 이후원(李厚源)·이시백(李時伯) 등 서인 권문세가 인사들과 정치를 같이하였다. 소론계인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이경석(李景奭)과도 친했으나 뒤에 당이 갈려 멀어졌다.

 

그는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에서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경석·윤휴 및 윤선거·윤증 부자와의 알력은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당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만년에는 사돈인 권시와도 틈이 생기고, 이유태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평생의 동반자였던 송준길마저도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문 문제로 마침내 노소분당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 외에 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이선(李選)·최신(崔愼)·송상민(宋尙敏) 등이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진다.

그 밖에 그의 문하에서 수시로 공부한 문인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로는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諫)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송시열의 존주대의 이념이 계승되어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재정비된 정통성리학의 체계와 광범한 문인들의 활약 및 그 정치적인 비중 때문에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지배 이념으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찬술하거나 편집하여 간행한 저서들과 사후에 수집되어 간행된 문집으로 대별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경례의의 經禮疑義≫·≪심경석의 心經釋義≫·≪찬정소학언해 纂定小學諺解≫·≪주문초선 朱文抄選≫·≪계녀서≫ 등이 있다.문집은 1717년(숙종 43) 왕명에 따라 교서관에서 처음으로 편집, 167권을 철활자로 간행하여 ≪우암집 尤菴集≫이라 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다시 빠진 글들을 수집, 보완하여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215권 102책을 출간하고 ≪송자대전 宋子大全≫이라 명명하였다.

 

그 뒤 9대손 병선(秉璿)·병기(秉夔) 등에 의하여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속습유 續拾遺≫ 1권이 간행되었다. 이들은 1971년 사문학회(斯文學會)에서 합본으로 영인, ≪송자대전≫ 7책으로 간행했고, 1981년부터 한글 발췌 번역본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4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201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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