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괴산군

괴산...채운암 목조아미타불

임병기(선과) 2012. 8. 10.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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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담

 

화양계곡 입구주차장을 지나 공원관리소 직원과 면담을 신청하여 채운암과 도명산마애불을 만나려면  차량으로 이동해야겠다고 부탁을 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평일에 오면 차랑 출입을 허가하겠다고 오늘은 도보로 다녀오라고 했다. 별수 없이 뚜벅이로 채운암만 다녀왔다. 

 

화양구곡은 1975년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으며 청주에서 동쪽으로 32㎞ 지점인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계곡으로, 청천면 소재지로부터 송면리 방향 9km 지점에서 3km에 걸쳐 화양천을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에 산재해 있는 명승지이다.

 

넓게 펼쳐진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의 울창한 숲이 장관을 룬다.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산수를 사랑하여 이곳에 은거곳으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으로 이름지었다 한다.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많으며, 산자수려한 구곡이 훼손되지 않은 채 잘 보존되어 있다.

화양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과 7㎞거리에 있으며 푸른 산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광지이다.

 

화양2곡 운영담. 경천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화양 4곡 암사담과 금서재.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이라고 한다. 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으로서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가족 단위의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금사담...송흠학

 

四曲金沙繞碧巖      사곡이라, 금사담은 검푸른 바위로 둘러싸이고

巖棲逕仄草毿毿      암서재 길옆에 풀이 하늘하늘하네.

琴書咫尺開光影      거문고와 서책이 지척에서 빛을 발하니

認是山南第一潭      산남의 제일가는 못인 줄 알겠네.

 

 

 

 

화양 5곡 첨성대.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첨성대...권진응

 

  五曲蒼崖高更深      오곡이라, 푸른 절벽 높고도 깊어

  霽雲和雨鎖空林      맑은 구름, 때맞춰 나리는 단비 공허한 숲속에 감도네.

  煌煌寶墨腥塵外      빛나고 빛나는 신종․의종 황제의 어필 속세 밖에 돋보여

  永激東民拱北心      오래도록 동쪽나라 백성 공북심(拱北心) 우러나게 하네.

 

 

화양 6곡 능운대.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채운암은 여기서 좌회전하면 된다.

 

능운대.... 임상주

 

嵬磊石層層           우뚝 솟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

屹屹仍作臺           높되 높은 능운대가 되었어라.

凜凜凌風雲           늠름하게 풍운 뚫고 솟아

迢迢絶塵埃           아득히 속세의 티끌에서 벗어났네.


山靄半空浮           아지랑이 산 중턱에 감도는데

儼然天中入           위엄 있게 하늘 가운데 솟아있네.

有類豪傑士           호걸스런 선비가

唾手燕雲立           한가로운 구름 가운데 늠름하게 서 있는 것 같네.

 

 

땀 많은 중생. 한 말은 족히 흘린 후에 채운암에 도착했다. 저자거리 같은 등산로와 달리 한적하기 그지없는 절집이었다.

 

 

채운암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채운암과 환장사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채운암은 1277년(고려 충렬왕 3) 창건된 채운암과 1655년(효종 4) 창건된 환장사(煥章寺)가 합쳐진 사찰이기 때문이다.

 

먼저 채운암은 1277년(고려 충렬왕 3)에 도일선사(道一禪師)에 의해 수도암(修道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이때 암자는 지금의 채운암에서 바라다 보이는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자리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19년(광해군 2) 혜식선사(慧識禪師)가 중건(重建)하고 채운암(彩雲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환장사는 1655년(효종4년) 혜일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나 1836년(헌종 2) 기록되어 현재 채운암 대웅전에 걸려있는「충청도청주청천면화양동환희산환장사법당초창기(忠淸道淸州靑川面華陽洞歡喜山煥章寺法堂初創記)」, 민진원(閔鎭遠)의『단암만록(丹巖慢錄)』등에서는 모두 1670년(현종 11) 송시열의 노력으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민진원(閔鎭遠)의『단암만록(丹巖慢錄)』을 보면 "숙종조(肅宗朝)의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황실의 유물(遺物)을 수집하였는데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의 어필(御筆) [비례부동(非禮不動)]의 휘호를 가지고 온 자가 있어 값을 주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가버렸다. 민정중(閔鼎重)이 이 글씨를 가지고 귀국하자 송시열(宋時烈)이 화양동에 이 글씨를 큰 암벽에 새기고 그 옆에 승려를 모아 암자(庵子)를 이룩하여 그 이름을 환장사(煥章寺)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괴산군지에 보면 "환장사 대웅전 옆에 명나라 신종황후(神宗皇后)의 초상을 봉안한 작은 전각이 있으며, 그 옆에 장판각(藏板閣)이 있어 정조(正祖)가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각공(刻工)으로 하여금 조각케 한 『송자대전(宋子大全)』, 「정서분류(程書分類)」 102권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26년(순조 26)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대웅전을 새로 지어 낙성을 보았다. 「충청도청주청천면화양동환희산환장사법당초창기」를 보면 사찰에는 50여 명의 대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볼 때 이 시기 사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고종 33)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하여 국내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환장사가 의병의 본거지라 해서 일본군대에 의해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져 폐허처럼 되고 말았다. 이렇게 각각 독립된 사찰로 20세기 초까지 법등을 이어오던 두 사찰은 1954년 채운암이 큰 홍수로 매몰이 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것은 대웅전만 남은 환장사로 채운암의 목재를 옮겨 건물을 지었고, 두 사찰을 합쳐 채운암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 시기에 사찰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과 산신각, 요사 2동이 있었다.

 

그 후 1975년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1981년에는 문정암 스님이 삼성각에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새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는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요사를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찰에 전하는 상량문에 의하면 1826년(순조 26)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청주 동쪽 환희산 화양동 환장사 대웅보전을 새로 지어 1826년 4월 19일에 상량을 하였다. 이때 승통은 수옥(守玉)이고, 도편수(都片手)는 비구 도홍(道弘), 부편수(副片手)는 이동춘(李同春), 야장편수(冶匠片手)는 김우신(金祐神), 좌편장(左片將)은 비구 의철(義喆), 우편장(右片將)은 비구 체준(體俊) 등이다. ....”

 

건물은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초석으로 삼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올렸다. 어칸의 기둥위에는 기둥머리를 장식하는 부재인 안초공을 끼웠는데 바깥에는 용머리를 안쪽으로는 용꼬리를 조각하였다.

 

 

창호는 살대를 45°방향으로 엮은 빗살문으로 하였는데 좌우 협칸은 각각 2분합문, 어칸은 4분합문이다. 그리고 살대에 좌우 협칸에는 매화나무와 봉황을, 어칸에는 청룡과 황룡, 소나무와 백학을 조각하여 장엄하였다.

 

 

문화재청에는 두리뭉실하게 목조여래좌상으로 표기하였고, 괴산군청 홈에는 석가여래불로 설명되어있지만 나는 아미타삼존불로 보고싶다. 왜냐하면 후불탱이 아미타탱이며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셨기 때문이다.

 

 

대웅전에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목조여래좌상은 조성연대를 밝혀주는 복장기를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불상가운데 하나이다. 복장기에 의하면 '옹정원년계묘(雍正元年癸卯) 5월 초' 즉 1723년(조선 경종 3)에 길쌍계사(吉雙溪寺)에서 조성한 것으로, 언제부터 채운암에 봉안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세부적인 조각기법을 보면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머리는 나발이며 그 위에는 육계가 있다. 상호는 대체적으로 원만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귀는 길고 크며 콧날이 뚜렷한 편이다. 그리고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설법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가슴은 드러났으며, 허리에 군의(裙衣)의 띠가 보인다. 현재 충북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명산, 정상 아래 어디매쯤 마애삼존불이 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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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청,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201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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