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영사정 망주석.의비 연개비

임병기(선과) 2015. 4. 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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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은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의  문화유씨재실이다. 영사정 초창은 1637년 유창무공의 아들 유광윤이 건립하였으며 유창무공의 11세손 유영우에 의해서  성묘할  때의 재숙소로  1918년에  창건한  집이다. 1973년 유창무 이상 6대 선조를 추모기위해 여재각을 지었다.

 

입향조인 유창무는  진사  유응의  손자로   유복자로  명종때  생후  7일만에 어머니  조씨의  명에  따라  의비 연개의  등에  업혀 이곳으로 와서 외할아버지  진사  조연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훗날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부정을  지냈다.

 

 

 

설명문에 의하면 좌측 망주석은 경북 칠곡군 병동 문화유씨 19세손 통정대부 형조참판 유흥종의 쌍분에 있었다(부인의 이름은 미표기). 우측의 망주석은 경북 칠곡군 교동 향교 뒤편에 있었던 20세손 가선대부 공조참판 유소창과 정부인 흥양유씨 묘소 앞에 있었다고 한다. 1998년 3월 칠곡에서 이곳의 종산 일리산으로 묘를 이장하면서 함께 옮겨왔으나 도난의 위험 때문에 영사정에 자리하게 되었다. (현장에서는 16대, 17대로 들은 듯 하다)

 

 

 

20세손 유소창(1452년~1515년)과 정부인 흥양유씨 묘소의 망주석

대좌와 일석인 팔각 간주석 상대에 운문, 당초문, 용문이 화려하게 고부조로 새겨져 있다. 보주 아래에는 큼직하게 연주문을 표현하였다. 연주문은 각각 18개, 19개로 상징성이 궁금하다. 망주석의 연주문은 경북 성주에서 보았지만 작게 표현되어 있었다. 유사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이 망주석이 위치했던 곳은 한국전쟁 최대격전지의 한 곳인 칠곡 다부동 근처이어서 총탄의 상흔이 망주석에 남아 있다고 한다.

 

 

 

 

 

 

 

19세손 유흥양 무덤과 쌍분 앞에 있었던 망주석

둥근 간주석 아래로부터 용이 휘어감고 승천하는 모습이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사이사이 당초문, 화문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고 상부에는 넝굴문을 넣었다. 보주와 간주석 사이에는 둥근 윤대가 보인다. 이런 작례의 망주석은 거의 유일무이한 유형으로 보이며,  통치체계가 기틀을 잡은 조선초기(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왕릉의 망주석 보다 화려하게 조성할 수 있었던 배경 등 많은 생각이 교차되지만 그것은 전문가, 학자들의 몫으로 두어야겠다.

 

이 망주석은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대구시 북구  읍내리 칠곡향교 뒤편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인지하고 있는 읍내리 불상군과 마애탑, 전탑으로 유명한 송림사와 멀지 않는 곳이다.

 

 

 

 

 

 

19세손의 망주석 앞에 있었던 비석. 비신과, 비수는 도난 당하고 비좌만 남아 있다.

 

 

 

망주석옆 연개의 비. 현장에서 유사어른의 설명에 의하면 1950~1953년 사이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성리 외가에 유창무를 등에 업고 왔다고 한다. 의비 연개는 입향조 유창무의 조부 유응, 아버지 유청춘, 아들 유광윤까지 4대를 모셨으며 특히 유청춘의 요절로 생을 포기하려던 조씨부인을 설득하여 유복자 유창무를 낳아 집안의 대를 잇게 하였다.

 

의비 연개 비문은 박순문님이 답사 자료실에 올린 글을 가져왔다.

 

연개의  비문은  1925년에  小訥  盧相稷  선생이  지었다.

제목과  찬자의  이름을  빼고  본문만  655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실제  비문과  소눌선생문집, 柳連桓씨가  1997년에  펴낸  義婢蓮介傳을  참조하였다.

 

 

옛적  上舍  柳凝에게  계집종이  있었는데  이름이  연개다.

상사는  어리고  고아라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었다.연개는  자기  스스로  어린  주인에게  많은  자식이  있기를  기도하였다.상사는  八거에서  김해  活川의  裵袗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활천은  배씨의  거주지이다. 연개가  지성으로  10여년  상사부처를  모셨으나  靑春이라는  아들  하나만 남긴채  상사부처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연개는  함께  곡하고  울었다.

 

그리고  장례절차를  끝낸  뒤  청춘을  찰방  趙連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그러나  청춘은  몇년만에  寒疾을  만났다.

趙氏부인은   대를  이을  자식  하나  얻지  못함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조씨부인은  예에  따른  장례절차도  잊은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연개가  강하게  진언하였으나  조씨부인은  물만  마시고는  작정한바 단지  장례만  치루기를  촉구할  뿐이었다. 연개는  조씨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소인이  지난달     빨래할  때  보니     부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는데 유씨  일점혈육이  거기에  있습니다.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유씨의  제사도  끊기고  맙니다.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낭군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깨달은  조씨부인은  산달을  기다려  아들을  낳은뒤  7일만에 연개에게  이르기를 

" 유씨에게  복이  엷으니  모자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혹  액을  물리칠  수 있을지  모르니  너는  아기를  안고  나의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도록  하라" 라고 말하였다. 부인의  말에  따라  연개는  밀양의  今音部曲에  이르러  찰방에게  울면서  부인의  뜻을  고하고는    돌아와서  부인을  모셨다.

 

그래도  아이가  걱정되어  3일에  한번은  아이에게  다녀  왔다.하루는   가서  보니  아이가  문밖을  기어  다니고  있어   끌어  안았는데 한쪽  무릎을  자세히  살펴  보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연개는  무릎을  핥아  본  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고  울면서  즉시 의사에게  해부하게  하여  조그만  사기조각을  찾아  내었다.그리고는  좋은  약을  얻어  상처난  곳에  완전하게  바른  뒤  사기조각을 씹은  후  뱉어  버렸다. 그  후  십여년이  지나  조씨부인은  세상을  버렸고  아이는  자라  이름이  昌茂인데 활쏘는  것과  말타는  것을  익혀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아가  副正에  이르렀으나 두  아들만  남긴  채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큰  아들  光胤(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을  지냈다),   둘째아들  慶胤은  아직  미관이었다. 연개는  주인  3대가  모두  일찍  죽음을  비통해  하였으나  주인집에  다다라서  울면서도 어린  두  주인을  부정공이  어렸을  때처럼    대하듯이  모셨다.두  아이들도  연개를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그러다가  임진란을  만났는데  두  아이는  아직  미관이었으나  연개는  이미  90여세가  되어 연개를  등에  업고  위험을  피하고자  關東까지  피란을  갔다.

 

난이  끝난  뒤  연개를  등에  업고  돌아  오던  중  연개가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  시체를  업고  오다가  경주의  汝甫驛에  이르렀을  때  형제의  어깨가  붓고 발이  부르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길옆에  묻고  돌을  모아  조그만  언덕을  만들어  표시를  해  두었는데 뒤에  시체를  찾아  조씨부인의  묘아래에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成泰贄가  이른바  蓮介傳  일편을  지었고 상사의  후손인  善坤이  相稷에게  전하여  보여  주며  말하기를 "아무런  보답도  못했는데  옛  동네에  돌을  세워  연개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후손을  이어주고  오늘의  우리집안이  있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연개가 순수한  마음으로  주인집을  섬긴  것에  연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  !

魯公子의  보모가  자신의  자식으로  하여금  공자를  대신하여  죽여서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높게  기려  義保라고  말한다. 또  魏公子의  유모가   몸으로  공자를  가려  공자와  함께  죽자  秦나라  왕이  卿에  대한  예로서  장례를  치루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節乳母라고  한다. 연개는  천한  노비이고  保乳에  불과하지만 유씨삼대를  충심으로  섬겼고    유씨의  대를  이어  준  유씨집안의  의로운  비이다. 성태지의  연개전에  말하기를   "유씨가  존재하는  한  연개의  이름도  존재할  것이요,유씨가  세상에  크게  드러  나면  연개의  이름  역시  크게  드러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개의  족적이  300년이나  길게  드러나니  유씨는  장차  크게  나아  갈  것이다.

나는  이  비에다  아래와  같이  글을  새겨  두노라.

 

"상사" 는  진사를  말한다.

" 팔거"는  오늘날의  대구  북구  칠곡을  말한다.

"금음부곡"은  오늘날의  삼랑진  용성리이다

"관동"은  오늘날의  강원도이다

"여보역"은  경주  두서면  인보리에  있던  역인데  "느보"(仍甫, 仍弗)를  말한다

 원래  長水道  소속이었으나  1785년에  黃山道  소속으로  바뀌었다.

 

 

충노, 의로운 노비의 비는는 여러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장수향교,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경주 최씨 집안, 충주, 포항 등의 일화는 우리가 익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석들이 시사하는 상징은 잘 알고있으리라 믿는다. 아울러, 영사정에 있는 망주석은 특별한 보호장치를 마련하여 제자리로 옮겼으면 좋겠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제자리에서 제역활을 할때가 가장 아름다운 까닭이다.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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