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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각사 목조아미타불좌상

임병기(선과) 2014. 12. 2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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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사. 중구 신창동 1가 6-1 도심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 있는 대각사 유래 안내문 내용처럼 일본인에 위하여 건립된 절이다. 현재도 일본 범종과 석등 노주 등이 남아 있으며 대웅전도 우리 전통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경내에 있는 대각사 유래 전문을 옮겨왔다.

 

조선 500년 말, 서양세력의 강화도 침략에 기인한 척양척화 정책으로 수구파가 득세할 때, 개화파는 가까운 일본과 교류를 추진하고 있었다. 1887년, 부산의 바닷가에 유일한 해변 막사가 한 채 있었는데, 일본과 거래를 하려면 이 막사를 통해야만 일본인들과 무역교류를 할 수 있었다.

 

명치 유신 9년, 일본황실에서 부산에 불교 정토진종 사찰을 짓게하자, 오오꾸라 재벌이 앞장서서 막사가 있는 이 자리에 동본원사 부산별원이라는 최초의 일본 사찰을 세웠다. 이 내용은 대각사에 소자오딘 범종에 새겨져 있으며 '조선의 일본정책'이란는 책자의 기록과 함께 KBS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 소개 된바 있다.

 

이곳은 당시 개화파의 핵심인 유대치(한의사)가 이동인(봉은사스님)의 개화정책을 자문하고,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윤치호, 서재필 등 개화파 40여 명과 함께 수차에 걸쳐 일본을 내왕하면서 교두보를 마련했던 곳으로, 근대 조선의 개화에 큰 획을 남긴 역사적인 터이다.

 

해방 후 동본원사 부산별원은 한국정부에 귀속되었는데, 정부 관제국에서 귀속재산 처분을 할 때 이 사찰 땅과건물을 경매 받아 경남불교종무원으로 발족하였다가 3대 원장 김경우 스님(창건주)에 의해 새로이 한국사찰로 창건한 것이 현재 대각사이다.

 

창건 이전의 유물은 범종과 석등만이 있을 뿐, 대웅전이나 진시사리탑은 후에 지어졌다. 현 대웅전은 중간기둥이 없는 특수한 건축공법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거 둘래가 300평에 약 1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단위 건물이다. 법당 가운데 부처님은 1960년무렵 지리산 광산사에서 모셔온 아미타불(조선초기,15세기)이며, 법당구조는 통법당 형식의 불단으로 배열되어 불교 전통문화의 효과를 높였다.

 

대각사는 재단법인(불교전통문화원)으로 등록된 시민공찰로서 대중포교의 사찰이며, 소소된 단체로 신도회 및 청년회, 학생회, 어린이회가 있어 도심권 포교와 봉사활동 등의 사회참여 운동을 하고있다. 현재까지 창건주인 고불 경우 큰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석등, 간주석 중앙 테두리. 옥개석 고사리문양의 길게 누운 귀꽃, 상륜 등이 우리 석등과는 차이가 있다.

 

 

노주석. 석등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 같다.

 

 

용뉴는 1마리의 용으로 장식했으며 천판 끝의 톱니모양을 두었다. 구품연지를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9개 유두와 달리 108개 표현되어 있다. 상대, 하대에는 에는 문양이 없고 종신에 층단을 두어 유곽, 비천상, 다시 띠를 둘러 당좌를 표현하였으며 그 아래에 용문양을 새겼다.

 

 

 

일반적인 배치와 달리 아미타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석가여래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 조선초기에 조성한 아미타여래를 먼저 봉안 후 후에 좌우 여래를 조성한 까닭일 것이다.

 

 

목조아미타여래

 

 

1960년대에 지리산 광석사에서 옮겨온 15세기 불상으로 전한다. 굵직한 나발, 중간계주,정상계주를 두었고 백호를 표현하였으며 장방형의 상호는 원만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의 승각기 띠 상부에는 연화문 주름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고 아미타 수인이다.

 

 

20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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