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연천군

연천...차탄리 석불입상.기황후 총 석수

임병기(선과) 2014. 10. 27.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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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문화원. 차탄리 석불입상과 민속자료관의 신장상을 뵙기위해 들렸다. 문이 닫혀 야외 불상만 뵙고 발길을 돌리려고 했는데 마침 연천문화원 이사님이 오셔서 실내의 석수를 관람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계획에 없던 기황후 석수에 매료되어 처음부터 계획했던 향토사료관내의 신장상을 놓쳐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인가?

 

 

 

차탄리. 군 복무 시절 야외훈련 포병진지가 있던 지역이다. 훈련시에는 포진지 앞 위병이 내업무인 까닭에 차탄리 진지는 눈에 선하다.

 

차탄리 석불입상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절터인 연천읍 차탄리 일명 앞시울 밭두둑의 돌각담 위에 세워져 있던 불상으로 2011년 문화원으로 옮겨왔다.석불의 조성시기는 고려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옆 대좌는 입상 주변에 있던 것을 문화원에서 발견하고 옮겨왔다. 

 

 

석불은 광배와 일석으로 조성되었으며 볼륨감은 없는 편이다. 상호는 결실되었으며 광배도 거의 훼손된 상태이다. 수인은 시무외인, 여원인으로 보이며 법의는 구분 할 수 없다. 

 

 

 

 

동자석

 

 

기황후 총 석수1

 

 

 

기황후 총 석수2

 

 

기황후(奇皇后)

아마 우리 고장과 관련 있는 인물 중에 기황후 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기황후가 어디서 태어나서 왜 연천군에 묻히게 되었는지 정확한 사료가 남아있지를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조선조에 만들어진 연천읍지에 황후총에 대한 기록과 황후총으로 전해지는 연천읍 상리 재궁동에서 석수(石獸)와 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보아 연천과 기황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기황후에 대하여 여러 기록을 찾아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엄연한 문화유산인 기황후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時代的 배경

일설에 기황후는 1260(고려 원종 1)에 태어났다고 전해지나 신빙성이 없다. 이 시기는 고려가 내외적으로 각종 우환에 시달리던 시기로, 대외적으로는 1231(고종 18)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여섯 차례의 침입 끝에 결국은 후에 원종(元宗)이 되는 태자가 1259(고종 46) 몽고에 가서 굴복의 뜻을 전하고, 아버지인 고종이 승하하므로 다음해에 귀국하여 즉위하면서 몽고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였다.

 

그리고 나라 안에서는 1170(毅宗 24)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을 살해하면서 정권을 잡더니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이 차례로 정권을 잡아 이른바 무신정권이 계속되었으며, 1196(明宗 26)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과 그 삼족을 멸하고, 조신(朝臣)을 많이 죽인 후, 최씨 무신정권을 세워 40년 동안 왕실(王室)과 조정(朝廷)을 전횡(專橫)하였다가, 1258년 유경(柳璥)등이 최의(崔竩)를 죽임으로서 왕정이 복고되는 등, 고려가 본격적인 쇠퇴기로 접어든 때였다 하겠다.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원종(元宗)을 폐위 시켰다가 복위시키고, 세자를 인질로 원나라에 보내게 하는가 하면, 왕자와 공주 등을 원나라 황족과 결혼하게 하는 등 각종 횡포를 부리며 고려에 대하여 본격적인 속국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이다. 1270년에는 점차 심해져만 가는 원나라의 간섭과 횡포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가 3년 동안 진도와 탐라로 장소를 옮겨가며 3년 동안 끈질긴 항몽(抗蒙) 투쟁을 했던 아주 혼란스런 시기였다하겠다.

 

한편 원나라는 1206년 테무진(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징기스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한 후 금()나라와 서하(西夏) 등을 침략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유린하며 제국의 영토를 넓혀가다가 2대 오고타이(太宗:12291241)가 즉위한 다음부터 분열 조짐을 보이면서 3대 구유크(定宗:12461248), 4대 몽케칸(憲宗:12511259), 5대 쿠빌라이(世祖:12601294)를 거치는 동안 부족간에 칸(황제)를 계승하기 위한 부족간에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몽골제국의 원조인 원나라와 킵차크, 차카타이,

 

일 등 세 개의 한()국으로 나뉘어, 1대 징기스칸으로부터 4대 몽케칸 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하고 있던 통일성을 잃고,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 형태를 띠고 그 세력을 유지하며 계속적으로 정복전쟁을 계속하며 영토와 식민지를 넓혀가던 때로서 160 여 년의 짧은 시기의 몽고역사 중 가장 번성하였던 때가 아닌가 싶다.

 

공녀(貢女)의 역사

공녀가 공식적으로 처음 시작된 것은 1275(충렬왕 1)으로 당시 10인을 보낸 것을 시초로 해서, 공민왕 초기(1350년대)까지 80 여 년 동안 수많은 여자를 원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이때 고려로부터 원으로 보낸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가 고려사에 기록된 것만도 50회 이상이 되는 것으로 볼 때 그 수는 기 천명으로 어림짐작된다. 공녀(貢女)에 따른 폐단도 대단하여 충렬왕은 나라 안의 혼인을 금하기도 하였고, 1287(충렬왕 13)에는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먼저 관에 보고한 뒤에야 시집을 보내도록 명령하였으며, 그 뒤에 이러한 금령을 가끔 내렸다고 한다.

 

공녀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처녀를 대상으로 징발하였는데,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혼인을 서두르는 바람에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다. 원나라로 끌려간 공녀들은 대부분 몽고 사회의 상층부에서 황제황후 및 귀족들의 궁인 또는 시녀로서 상당한 활약을 하였으며, 기황후와 같이 황제 곁에서 차를 따르는 시녀 신분에서 황후가 된 경우도 있었다.

 

공녀(貢女)가 원나라에 끼친 영향으로는 그들 대부분이 원나라 황실의 궁녀가 되거나 고관들의 시중을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고려의 생활양식이 연경사회(燕京社會)에 널리 퍼져 고려양(高麗樣)이라는 새로운 말이 생기게 되었다. 공녀(貢女)제도는 공민왕이 1373년 밀직부사 주영찬(周英贊)의 딸을 명나라 황실에 궁녀로 보내면서 조선조까지 이어져 1408(태종 8)부터 1521(중종 16)까지 거의 10여 차례 환관(宦官)과 함께 공녀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공녀의 요구가 할 때까지 존속되다가 청나라가 세워지면서부터 공녀의 요구는 사라졌다.

 

기황후의 家系, 史書記錄

기황후는 행주 기씨 72대손 기자오(奇子傲)의 막내딸인데, 기자오(奇子傲)는 고려 조정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의 벼슬을 지낸 기윤숙(奇允肅)의 아들이다. 기자오는 음서(蔭敍) 로 산원(散員)에 보임(補任)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총부산랑(摠部散郞)이 되었다가 나가 선주(宣州)의 수령을 하고 63세에 죽었다고 고려사 열전(列傳/叛逆) 기철(奇轍)편에 전해진다. 기자오(奇子傲)는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屑), 기윤(奇輪)을 낳았다. 딸 셋 중에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는 기황후이다.

 

기윤숙- 기자오- 기철로 이어지는 당시 기씨 집안의 중심 인물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 기술된 평가는 아주 부정적이다. 물론 그들이 기황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면 그런 부정적인 평가도 나오지 않을뿐더러 아마도 기황후총이 잘 보존되어 지금까지도 전해내려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기황후의 할아버지 기윤숙(奇允肅)에 대한 평가를 보면은 성품이 사치스럽고 호협(豪俠)함을 일삼았으며 최충헌(崔忠獻)의 일당이 된 뒤 갑자기 상장군(上將軍)이 되었으며, 양성(兩省)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황의(黃衣)를 입고 갈도(喝道)케 하면서 창기(倡妓)의 집에 왕래하니 길가는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강정(康靖)이라 시호하였다.”고 했으며. 아버지 기자오(奇子傲)음서(蔭敍)로 산원(散員:8품 무관직)에 보임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총부산랑(摠部散郞:총부의 정6품 벼슬)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선주(宣州:지금의 宣川)의 수령을 지내고 나이 63세에 죽었다.”고 적혀있다. 그가 죽은 뒤에 기황후가 원나라 제2황후에 봉해지고 황태자를 낳았으므로 충혜왕 때 황제(皇帝:順帝)가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와 태감(太監) 박불화(朴不花)를 보내어 병덕승화육경(秉德承和毓慶功臣)으로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였다.

 

기황후와 제주관련사항 첨부

( 아들을 낳는데 제주도와 관련이 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기황후는 자신들의 입지와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필수라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풍수가(또는 스님)의 말을 듣고 천하를 물색하던 중,

제주도 현 삼양동 지역의 원당봉 기슭이 그런 곳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황후가 이에 이곳에 절을 세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불공을 드려 결국 아들을 얻었다는 것이 전해오는 스토리의 골간이다.

원당봉은 얼핏보면 3낭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보이나 모두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옛부터 삼첩칠봉이라 불리어졌다고 하지만, 필자는 아무리 주의깊게 살펴 보아도 7개의 봉우리를 찾기 힘들다.

어쨌든 이렇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바로 이곳에 있는 5층 석탑이, 대원제국을 호령하던 기황후가 권력을 쥐게한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말이 된다.   

'믿거나 말거나' 일 수도 있지만, 이곳 지역의 현재의 지명도 원당봉(元堂峰), 원당사(元堂寺) 등으로 원과 관련한 명칭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단지 전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고려사의 내용을 보니 기황후의 집안은 원나라의 황후가 되기 이전부터 결코 한미(寒微)했던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래 공녀(貢女)제도는 원나라가 고려를 영원히 복속(服屬) 시키기 위하여 좋은 집안의 처녀를 우선하여 원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기황후의 오빠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屑), 기윤(奇輪) 5형제인데, 기식(奇軾)은 어려서 일찍 죽고, 기철(奇轍)을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이 기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반역을 꾀함으로서 후세 사람들이 기황후와 그 집안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하였을 것이다. 고려사에 전해지는 기철(奇轍)과 그 형제들과 그 여당(餘黨)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A4 용지로 무려 4페이지에 이른다. 그 기사(記事)중 기철(奇轍)에 관한 부분만 정리해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의 몽고식 이름은 빠엔부카(伯顔不花).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되어 태자 아이유시리다(愛猶識理達獵)를 낳고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배경으로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征東行省參知政事)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는 정승에 임명된 뒤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그의 일족과 친당들도 교만하고 포악해져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뒤에 다시 원나라로부터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에 임명된 뒤 대사도(大司徒:예조판서)에 이르렀다.

 

1356년 원나라가 점차 쇠약해지자 자기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친척과 일당을 요직에 앉히고 역모를 꾀하였으나, 사전에 이를 알게 된 공민왕에 의하여 권겸(權謙)노책(盧頙)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그후 그의 아들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그 여당(餘黨)과 함께 동녕부(東寧府:西京에 있던 통치기관)에 할거(割據)하면서 아버지 기철의 원수를 갚고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공민왕이 지용수(池龍壽)양백안(楊伯顔)을 보내 치게 하니 원나라로 도망갔다는 기록 외에는 더 이상이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철의 일족들은 원나라에 살다가 1368년 원나라 멸망과 함께 어찌되었는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奇皇后에 대한 오해와 편견

 

기황후는 1333(충숙왕 복위 2)에 원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1335년 순제의 정후(正后)인 다라시니笞納失里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될 기회를 맞았으나 바엔伯顔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擸를 낳음으로서 13404월에 순제의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는 등 전권을 행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고 정후(正后)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현재 전해지는 기황후 개인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최근에(2001) KBS 역사스페샬을 통하여 이보다 더 상세히 알려진 것은 명나라 군사에 쫓겨 기황후와 함께 내몽고로 들어간 순제가 16개월 뒤에 황태자 아이유시리다에게 전권을 이양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담긴 북순사기라는 사서가 있다는 정도이다. 이 책은 신하 유순이 순제와 기황후와 함께 13687월 북경을 떠나 내몽고로 도피하면서 겪은 17개월 동안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라 하나 그 북순사기에도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기황후에 대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기황후가 명확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오히려 덕행에 대한 기록이 있음)에도 그 동안 기황후가 부정적인 인물로 매도(?)당하는 것은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만들은 원사의 기록과 고려에서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끝내는 모반(謀叛)까지 저지르는 기철(奇轍)의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몽골제국의 몰락에 기황후의 야심이 큰 몫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YTN(연합통신) “대몽골 역사기행특별취재팀이 만난 몽골국립대 역사학과의 잉크체첵교수의 말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토곤 테무르 대칸이 대륙에서 밀려나는 과정에서 고려인 황후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이미 몽골이 몰락 시기에 접어들었고 고려인 황후가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칠 상황이 아니었다. 황후의 궁정암투 때문에 몽골의 힘이 약해졌다고는 볼 수 없다.

몽골제국의 몰락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황후들이 정치문제에 참여했던 일이 많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대칸을 도와주기 위한 역할을 했다. 울제이 쿠투完子忽都칸툰(奇皇后)도 이런 전통에 따라 정치에 어느 정도 관여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 때문에 몽골제국이 망했다는 주장은 완전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한 징기스칸의 말처럼 몽골은 결국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이동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개척하는 일, 즉 끝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유목마인드-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제국의 멸망이 운명처럼 다가왔을 뿐이다. 그 마지막 정점에 기황후가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며 노력을 하였지만 승자(勝者)의 기록 속에 형편없이 매도당한 것은 아닌지, 향후 전문 학자들의 깊이있는 연구를 기대해본다.

 

   

연천문화원 전사무국장 겸 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

최병수

 

 

20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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