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서울특별시

서울...흥천사명 동종

임병기(선과) 2014. 10. 15. 07:34
300x250
300x250

 

 

경복궁을 중심으로 문화재 답사 동선상에 덕수궁 광명문에  흥천사명 동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유를 가지고 덕수궁 답사를 겸했으면 좋으련만 늘 시간의 노예가 되어 궁궐은 예전에 주만간산식으로 답사했다고 자위하며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전각에 대한 자료는 문화재청.덕수궁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다.

 

대한문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는 대안문이던 것을 1906년 7월 15일 수리 시 대한문이라 개칭하였다.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2차 도로확장 공사 때에 담장만을 궁내로 이전하여 도로상의 한복판에 분리 폐쇄되어 있다가 1970년 8월 21일 현 위치로 이설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준공을 보았다. 2005년에 해체 보수공사를 하였다.

 

 

 

중화문은 덕수궁 중문이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대한광무 6년(1902)에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 때 중화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906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2층 건물이었으나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 다시 지어질 때 단층으로 줄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화전은 원래 2층 전각이었으나 대한광무 8년(1904)에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1897년에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덕수궁 으로 옮겨 재위하는 동안 정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중화전 앞뜰에는 문무백관의 자리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좌우 품계석

 

 

2중 월대 위 한단의 기단에 세워진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 건물을 높히고 지붕의 하중도 받으며 장식을 겸한 처마 밑의 공포는 다포형식이다. 실내 중앙 뒤쪽에는 어좌가 놓이고 그 뒤에는 일월도 병풍이 있으며 천장은 보개를 단 닫집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석어당.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인목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을 석어당 뜰아래 꿇어앉히고 인목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준명당.즉조당

 

좌측 준명당. 건물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종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우측 즉조당.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한때 명칭이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석조전.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대한제국역사박물관:10월 13일 리모델링을 마친 후 새롭게 개관할 석조전의 새 명칭이다.

 

 

 

답도踏道는 계단으로 되어 있지 않고 판석으로 되어 있다. 판석위에는 나라의 문물 제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 이상을 나타내는 봉황, 용이 새겨져 있다. 

 

 

 

청동 향로.왕이 어좌에 앉으면 향을 피웠다.

 

 

드므. 방화수를 담는 용기이다. 화마가 물에 비친 제모습에 놀라 도망가게한다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어좌와 일월오봉도

 

 

광명문.1897년에 건립하였으나 1904년에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목조건물로 당초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1938년 미술관 개관 시 흥천사종과 창경궁 자격루를 진열하기 위하여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흥천사 동종. 1462년 7월 태조의 후비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종이다.  신덕왕후 능 근처 흥천사에 있었으나 흥천사가 중종 5년(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23년(1747년)에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겼다. 한일합방 후 일인들이 이 종을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후에 덕수궁 현 위치에 다시 옮겼다.

 

 

흥천사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종의 요소 가운데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천사종은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기나 문양·주조기술의 탁월함 외에도 왕실에서 발원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명문은 주성시의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제반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자격루. 1536년 (중종 31)에 만들어진 물시계


물을 보내는 파수호播水壺가 3개, 물받이인 수수통受水筒이 2개 남아 있는데,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34년(세종 16) 장영실에 의해서였다. 장영실의 물시계는 정해진 시각이 되면 격발장치를 건드려 쇠알이 굴러가서 여러 운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종·북·징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장치는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장영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물시계는 경복궁에 보관되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중종 때 이를 본떠서 다시 만든 것이 창경궁 보루각에 보관되었다가,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대파수호와 수수통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수수통에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모양을 양각해 놓았는데 중종 때 이를 만든 우찬성 유부, 공조참판 최세절 등 참여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기전. 조선시대에 사용된 로켓추진 화살. 1448년(세종 30년) 고려 말기에 최무선이 화약국에서 제조한 로켓형 화기인 주화를 개량하여 명명한 것으로 대신기전, 산화 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병기 도설에 기록된 신기전에 관한 내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병기의 기록이다.

 

 

 

 

덕수궁 돌담길. 나의 애창곡 중의 한곡이다.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발길. 옛날에는 두 사람~~~"  언젠가 그렇게 걷고 싶다.  노래가사 중의 "둘~~이~~서" 처럼 그렇게... 대구에서 한양길이 2시간이 소요되지 않은데 뭐 그리 어렵겠는가? 다만 지나가는 가을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4.09.27

300x25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