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상주시

상주...우복종가. 대산루

임병기(선과) 2014. 7. 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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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종가는 오래전 몇몇분들과 들렸지만 카메라가 없었던 시절이니 아득하다. 그 이후 상주 답사동선에서도 계속 비켜갔었다. 모처럼 만에 들렸더니 관광버스를 대절한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종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불천위 사당 참배 후에는 산수헌 누마루에 앉아 종손(?과) 종가에서 대접한 수박을 먹고 계시어 사진 촬영 몇 컷에 만족해야만 했다. 아울러 대산루 뒷편 독존당도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했으며,  종가 답사의 백미는 종손분과 대화라고 늘 믿고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훗날을 기약했다.

 

산수헌

 

사랑채는 2단의 높은 기단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은 자연의 지세를 살려  안마당과 높이를 맞추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2칸 방, 2칸 대청, 1칸 방이 있다. 대청, 좌우 방 전면에 계자 난간을 설치하였다. 홑처마, 팔작지붕 굴도리 오량 집이다.

 

 

안채

 

안채는 ㄱ자 배치로 겹집구조이며, 부엌.안방.윗방.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세벌대 기단을 쌓아 마당보다 높다. 몸체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집 8칸이다.몸체 외에는 홑집 구조이다.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에 사랑채, 동편에는 행랑채가 자리잡았다. 자연석 주춧돌의 덤벙 주초, 납도리 오량집, 익사는 3량,  팔작지붕이다. 사진에 담지 못한 행랑채는 안채 우측에 위치한다.

 

 

안채 대청과 후원

 

 

안채 바깥벽

 

 

불천위 사당. 우복 선생과 입재 선생을 모시고 있다.

 

 

우복 정경세(1563년∼1633년)

조선 중기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아버지는 좌찬성 여관이며, 어머니는 합천 이씨이다. 1578년(선조 11)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합격했다. 1582년 회시서 진사에 뽑히고, 1586년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1588년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곧 통사랑대교로 승진되었다. 1596년이조좌랑에 시강원문학을 겸했으며, 잠시 영남어사의 특명을 받아 어왜진영禦倭鎭營의 각처를 순시하고 돌아와 홍문관교리에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고, 이어서 이조정랑·시강원문학을 겸하였다. 이조정랑에 있을 때에는 인사 행정이 공정하여 현사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으며, 특정인에게 경중을 둔 일이 없었다.

 

1598년 2월승정원우승지, 3월에 승정원좌승지로 승진되었고, 4월에는 경상감사로 나갔다. 이때 영남 일대가 임진왜란의 여독으로 민력(民力)이 고갈되고 인심이 각박해진 것을 잘 다스려, 도민을 너그럽게 무마하면서 양곡을 적기에 잘 공급해 주고, 백성들의 풍습 교화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1600년영해부사가 되어 싸움을 잘하고 남을 모략하는 투서가 심한 풍습을 교화하였다. 그 해 겨울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후 몇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당시 당쟁의 풍랑으로 정계가 시끄러웠기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그는 도학이 정몽주에서 시작되어 이황에게서 집성되었으며, 김굉필, 정여창,이언적,이언적 같은 여러 현인들이 나와 정학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왕성한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영남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상주에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유생을 설득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였으며, 이곳에 오현을 종사하였다. 1607년대구부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고, 이듬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하도록 병부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썼기에 특지로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1610년 4월성균관대사성이 되었고, 10월에는 외직을 원해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는 다시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8월정인홍 일당의 사간원 탄핵으로 해직되었다. 1623년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부제학이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승정원도승지·의정부참찬·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공정한 도리를 확장하고 요행을 억제하며,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주자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며, 주서를 편람하고 정독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경연에서 진강할 때 항상 주서朱書에 근거를 두었다. 그의 저서 양정편養正篇은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표리가 되고, 주문작해朱文酌海는 이황이 편찬한 주서절요朱書節要와 표리가 되는 것으로 주자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신석번, 홍호 등이 있다...출처/한민족백과사전

 

계정溪亭

 

대산루 앞 계정. 정경세가 수학하던 곳으로 입재 정종로鄭宗魯가 지었다고 하며 청간정聽澗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방1칸.과 마루1칸, 2칸 초가지붕을 한 3량가 이다. 후손들은 대산루를 중창하면서 계정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마루는 앞쪽만 트고 옆과 뒷벽은 분합문으로 개폐할 수 있게 하였다.

 

 

대산루

 

대산루는 자연석 주초에 두리기둥의 팔작기와집으로, 단층에 연결하여 2층누각의 T자 형 건물이다. 대산루는 1600년(선조 33)경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고향에 돌아와 지은 건물이며, 누각은 그의 7대손이 지었다고 한다. 누에는 정동교가 쓴 대산루對山樓 초서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대산루는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건축양식으로 하층은 부엌, 상층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층은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구조로 서쪽에서부터 2칸 마루, 2칸 온돌방, 부엌 1칸이 이어졌고, 앞쪽에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툇마루와 연결되어 있다.

 

 

누상층은 북쪽에서부터 2칸 서고, 1칸 마루, 1칸 온돌방, 2칸 누마루가 놓이고, 서고와 마루 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누마루 전면과 좌·우측에는 마루를 설치하고 계자 난간을 돌렸다. 대청 한 쪽 벽에는 대곡잡영이십절(서실․오봉당․오노대․산영담 등 부근 20절경을 예찬한 시구)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2층 누마루

 

 

누하층은 북쪽 끝에 4칸 광과 앞쪽에 부엌이 연접해 있고, 부엌 앞쪽에는 구들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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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溪亭)

 

만학풍천에 빗장 걸어 닫고 홀로 있으니 (萬壑風泉獨掩),
   긴긴 해 계정에 찾아오는 나그네 없도다 (日長無客到溪亭).
    해질녘 정신 지쳐 서책 버려 두고 나오니 (晩來意倦抛書出),
    눈부신 신록의 그늘 뜰 안에 가득하구나 (潑眼新陰綠滿庭).

 

201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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