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대구...은적사 목조여래좌상

임병기(선과) 2014. 6. 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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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중반 대구에서 중,고교를 다녔다면 앞산공원이 눈에 선할 것이다. 당시 대구 근교의 화원유원지, 강창유원지,동촌 유원지와 더불어 앞산공원은 봄가을 단골 소풍 장소였다. 젊은 연인들에게도 케이블카를 비롯 미로처럼 얽힌 산길이 많아(?) 데이트 장소로 안성마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몇년전 산행을 위해 주등산로를 지나간 기억을 제외하고는 70년대 후반 이후 처음 은적사에 들린 탓에 진입로, 가람배치 등이 낯설기 그지없다.

 

은적사는 926년 통일신라 경애왕 3년에 창건된 절로서 대구 대덕산(대구 사람들은 앞산이라고 부른다) 큰골에 자리한 동화사 말사로 사명은 왕건과 관련이 있다. 신라 경애왕은 후백제 견훤이 경주를 침공하자 고려 왕건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후백제 군과 고려군이 조우 전투가 벌어진 곳이 동화사 입구 왕산 근처로 이른바 동수전투다. 이전투에서 법상종의 전진기지였던 동화사의 지원을 받은 후백제가 대승을 거두고 신숭겸의 계책으로 목숨을 구한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귀환하게 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후 왕건은 그의 도피로 요소요소에 많은 지역명을 내리게 되지만 여기서는 더이상 언급 않겠다.

 

도피중이던 왕건은 은적사 대웅전 우측의 대나무 숲속에 있는 자연동굴에서  3일간 머물고 안일사에서 3개월간 쉰 왕건은 김천 황악산을 경유해 철원으로 회군했다. 훗날  왕건은 자신이 3일간 숨어 있으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굴이 있었던 곳에 당시의 고승 영조대사에 명해 숨을 은隱자, 자취 적跡자로 은적사라는 절을 짓게 했다. 

 

왕건굴

 

왕건이 굴에 숨었을 때, 왕거미들이 견훤의 추격병들이 찾지 못하도록 거미줄을 쳐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왕건이 머문 자연동굴은  왕굴이라 부르고, 아래에 있는 동굴은 장군들이 머물렀다 하여 장군굴이라고 한다. 또 그 밑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당시 숨어있던 장군들이 물을 마셨다 하여 장군수라고 불린다.

 

대웅전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을 뵙기 위해 들렸지만 마침 제를 봉안중이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삭가여래 좌우벽에는 1888년 조성된 지장탱과 1958년 그려진 신중탱이 유리 벽속에 봉안되어 있다.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조선후기 제작으로 전하나 조성기, 발원문 등은 확인할 수 없다

 

 

나발에 중간계주와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양미간에는 백호가 보이고 상호는 원만상이다.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이며 승각기 매듭은 일자형이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이며 왼손은 미타인 수인르로 19세기 석가여래에 통용되는 수인이다.

 

2015년 5월 대구시 무형문화재로 지정

은적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로, 양식적으로 보아 조선후기 조각승 하천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조각가와 제작시기를 알려줄 문자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작품의 완성도도 높으며, 18세기 초반 불상의 제작 방식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201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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