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달성군

대구...운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

임병기(선과) 2014. 6. 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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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가창면 오리 151 운흥사. 올초었던가? 운흥사 아미타삼존불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차일피일 방문을 미루고 있었다. 며칠전 퇴원후에도 컨디션이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고, 밤마다 지긋히 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잠을 설쳐야 했다. 마음도 추스릴 겸 마침 절집에 가고 싶어하는 마누라와 동행하여 가까운 사찰 몇 곳을 둘러 보았다.

 

운흥사는 가창댐에서 청도 풍각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면 이정표가 보인다. 대구 상인동 터널 준공전에는 거의 한시간 거리었지만 개통후에는 20분 남짓 소요되었다.(터널 공사 반대 서명과 팔을 몇 번 흔들었는데 그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중정의 느티나무 두 그루.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운흥사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운수스님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동림사棟林寺라고 불렀다고 구전되어 내려온다. 창건시에는 운흥사 뒤편 최정산 850m에 최초로 가람이 생겼으며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은 광해군-영조재위시라고 한다.1760년(영조 36) 무렵 간행한 여지도서輿地圖書 대구부大邱府의 불우佛宇조에는 최정산 운흥사가 실려 있다고 한다.

 

창건 후 사적은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사명 유정스님이 이곳에 머물며 3백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싸워 무찔렀다고 한다. 또 1620년(광해군 12) 무념스님이 중창했고, 1751년(영조 27) 치화스님이 중건하면서 사명을 운흥사로 바꾸었다.

 

1955년 윤조스님이 후불탱화를 모셨으며, 1966년 영봉스님이 대웅전을 보수하고 요사채를 옮겨 지었다. 1972년 초우스님이 삼존불을 개금하였다. 1976년 설극 재문스님이 선방과 선불장을 새로 지었고 1984년 석등 2기, 1992년에 단청 등의 보수를 실시했다. 1998년 종각을 조성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복장 후령통을 비롯하여 조성발원문(아쉽게도 발원문 내용을 찾지 못했다)을 통해 165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시기, 봉안사찰, 조성주체, 제작자 등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17세기 불상연구의 기준작이 된다.특히 대좌 아랫면에 벌목부터 불상 제작까지의 전과정을 기록해 두고 있어 당시 불상제작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전한다.

 

문화재청 설명문을 발췌했다. 삼존불상에서 보이는 귀염성이 느껴지는 얼굴, 당당하고 장대한 신체비례, 변화가 거의 없는 강직한 선묘, 무릎 앞에 넓은 주걱모양의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밀도 높게 새긴 세밀한 주름 등은 조각승 도우道祐의 양식적 특징으로 파악된다. 도우는 17세기의 중엽경의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무염無染의 조각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잘 살려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운흥사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지금까지 밝혀진 불상 가운데 도우가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첫 작품으로, 17세기 조각승의 계보, 작품 활동 및 화풍 전승관계를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아미타

 

 

 

관음

 

 

 

대세지

 

 

무념계의 조각승 도우의 작품으로는 칠곡 송림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존상(1657년), 석조 아미타 삼존상(1655년), 용연사 목조아미타삼존상(1665)이 대표적이다. 운흥사 목조아미타삼존(1653년) 발원문 발견 이전에는 송림사 석조아미타삼존상(1655년)이 도우의 첫작품으로 알려져 왔었다.현재도 자료 수정이 되지 않고 여러 사이트에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불단 후벽

 

 

주로 관음보살 단독상을 모시는데, 운흥사 대웅전 후벽에는 흔치 않은 형식의 석가모니 가섭 아난을 모셨다

 

 

 

신중탱. 화기에 북방불기 2988(서기196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운흥사의 사명에 관련해 달빛에 물든 이야기가 전해온다. 

운흥사는 3개 군에 걸쳐 있고 특히 청도와 대구 사이의 길목에 자리해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산 정상에 사찰이 자리해 았었음에도  물이 풍족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이를 귀찮아하던 주지스님은 “연못을 메우면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진다”는 꿈 속에 나타난 어느 노인의 말을 따라  연못을 메우니 어디선가 백학이 나타나 몇 번 구슬피 울고는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 때부터 운흥사는 사람의 왕래가 줄어들고 폐사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운흥사는 절을 곡산으로 옮기고 ‘수암사’라 이름을 바꾸었으나 신도가 찾아오지 않자 현재 위치로 옮기고 운흥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201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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