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동342 예비군 교장 입구 좌측에 위치한 도량사지로 전하는 절터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보살상으로 오래전 우리 카페 경주 골목길 답사 때 들렸었다. 문화재청 사지총람에 의하면 도량사는 삼국유사 권4 사복불언조에 기록이 남아 있으나 창건과 폐사시기는 전하지 않는다.
상반신만 노출된 마애보살상은 1979년 도로 확장 공사중 발견되었으며 피모被帽를 쓰고 있는 지장보살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근자에는 여신상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해 형체가 불분명하고. 정확히 목부분을 정조준한 인위적인 훼손 시도의 흔적인 쐐기공도 보인다. 바위의 형태로 미루어 삼존불의 주존으로 추정할려니 협시의 존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성시기는 나말여초?
사복불언蛇福不言
신라가 최초로 세운 흥륜사에는 신라십성(新羅十聖)의 소상이 모셔져 있었다.아마도 삼국 통일 직후에 선정했던 것 같다. 표훈에 관한 기록에 보면 표훈 이후 신라땅에 성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표훈시대를 전후해서 모셔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표훈은 제35대 경덕왕대의 고승이었다. 흥륜사 금당(金堂)에 모셔졌던 신라 십성의 소상은 동쪽 벽에 아도(阿道)·염촉[異次頓]·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 안치되었고, 서쪽면에는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 안치되어 있었다.
사복(蛇福)은 신라십성인 사파로 어렸을 때는 사동(蛇童)이라고도 불렀다.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모습을 나투었다가 음양의 원리에 따라 소멸됨이 진리다.하늘과 땅이 어울려 있듯이, 남녀가 만나야만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로 인하여 희노애락의 감정이 이어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복은 과부의 몸에서 태어났다. 도대체 누구의 씨란 말인가? 사복의 어머니말고 이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서인가. 사복은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지혜가 총명하여 문자를 쓰고 글을 지으면서도 입은 꼬옥 다물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를 쳐다보면 어머니는 눈빛으로만 그 비밀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의 육신을 낳았을 뿐, 너의 마음을 낳은 부모는 따로 있다. 너는 전생부터 있었고 또 후생에도 있을 것이다. 너의 부모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사복은 자신의 생명과 그 근원에 대한 사고를 했다. 몸은 어디서 왔으며, 죽어도 죽지 않고 윤회를 하는 마음의 부모는 누구인가? 누가 나를 만들었는가? 나는 과연 무엇인가? 사복은 또 과부인 어머니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많은 생명 중에 어쩌다가 모자로 만나게 되었을까? 전생엔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어머니가 내게 빚을 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어머니에게 빚을 지고 나와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전생에 진 빚이라면 이 생에서는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후생에야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가 있으리라.
사동은 스승도 없이 자신은 누구며 어머니는 누구인가를 알았다. 그리고 본래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가도 알아냈다. 그는 독학으로 도통을 한 것이었다. 어느 날 사복의 어머니가 죽었다. 사복은 고선사(高仙寺)로 찾아가 원효를 만났다. "어서 오게나." 사복은 인사도 받지 않고 말했다. "스님과 내가 전생에 경전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를 지냄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사동의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이미 숙명통을 하여 전후생을 다 알고 있음을 알았다.
전생에 경을 싣고 다녔다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은혜를 갚아야 할 일인데, 사동이 아들로 태어나 혼자서 그 은혜를 갚았으니, 장사라도 함께 지냄이 옳으리라. "좋다, 가자." 원효는 사복의 집으로 가서, 사복의 어머니에게 계를 내리고, 이승에서 지은 모든 업보를 벗어 버리도록 참회시키는 포살(布薩) 법회를 해주었다. 그리고 시체(영가) 앞에 나아가 설법을 했다.
"태어나지도 마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또한 죽지도 마라, 태어남이 고통이니라." 막생혜기사야고(莫生兮其死也苦) 막사혜기생야고(莫死兮其生也苦)라고 명확한 설법을 했다. 태어나면 즐거우나 죽어야 하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고,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다시 윤회를 하여 태어남인들 어찌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생사(生死) 윤회가 곧 고통의 사슬이니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을 얻으라는 최상의 법문을 들려 주었다. 그러나 이미 숙명통을 한 사동의 어머니였으니 단 한 마디로 축소시켜 간략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복이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말이 너무 길다." 이자가? 숙명통만 한 것이 아니라 견성도 한 게로구나. 그래서 원효는 말을 다시 줄였다. "살고 죽는 게 고통이니라." 원효는 단 네 글자로 줄였다. 사생고혜(死生苦兮)라고 말했다. 고(苦)라는 말도 사실은 길고도 긴 말이요, 멀고도 먼 말이었지만 생사윤회로 죽은 어머니를 위한 법문이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원효와 사동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理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시신을 내려 놓고 원효가 말했다.
"지혜 있는 호랑이는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냄이 옳지 않겠는가?" 중생을 잡아 죽이는 호랑이는 무상(無常)이다. 바로 그 무상의 도리를 알았으니 법다이 장례를 드리는 것이 생사해탈을 아는 도인들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사복의 법력이 얼마인가를 묻는 말과도 같았다. 자, 생사가 하나인데 어떻게 생사의 경계를 나누겠느냐? 누가 생의 자리에 서고 누구를 사의 세계로 보낼 테냐? 그 경계가 어딘가를 한 번 보여 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알아들은 사복이 계송을 읊었다.
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도 그와 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세계로 들어가려 하도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인 비로나자불의 세계를 말한다. 태어나도 태어남이 아니고 죽어도 죽음이 아닌 생사거래가 없는 진리의 세계로서 생사를 자유 자재하는 세계인데, 그 진리를 터득한 사복 자신이 그 경계를 보여 주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사복은 땅바닥의 띠풀을 파고 그 줄기를 뽑아 올렸다. 그 하나의 행위만으로도 마음의 생사를 보여준 대법문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열리면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사라져 버려 해탈을 얻게 되며 그 자리가 바로 연화장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사복은 띠풀을 들어올려 그 안에 있는 칠보로 장식한 아름다운 누각의 계단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시신을 업고 그 계단을 밟으며 들어가자, 즉시 땅이 닫히어 굳어져 버렸다.본래대로 변함이 없는 평지였다.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풀뿌리 하나 사이란 말인가. 생사가 둘이 아님을 보여준 사복은 과연 숙명통과 도통을 한 기인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등에 업고 들어갔는가. 이승에서 보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업은 것이로되, 저승에서 보면 죽은 자가 산 자를 업은 것이 아니던가. 도대체 어떤 것이 제대로 말한 것인가.
원효는 혼자서 산 자들을 향해 돌아왔다. 이승이 저승인지, 저승이 이승인지 어떤 이 진짜 살아 있는가를 생각하며 돌아왔다. 그런데 뒷날 사람들이 사복의 도력에 탄복되어 영천의 동남쪽에 절을 세워 도장사(道場寺)라 하고, 해마다 3월 14일이 되면 점찰법회를 열어 사복의 법력을 입으려고 했다.
점찰법회는 원광법사가 시작하여 이미 알려졌었다. 신라인들은 사복의 도력을 빌어 전생을 알아 보고 이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려고 했었다. 이 점찰법회는 훗날 진표율사에 의해 정립되었고 개인의 운명은 물론 역사의 미래를 예견하는 새로운 도통의 분야로 등장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장사를 찾는 사람들에겐 이상야릇한 영험이 생겼고 그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신라의 사복이 위대한 성현으로 추앙 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렇게 말했다.
"사복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다만 이것뿐인데, 세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여 전해지게 되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그리고 연화장세계를 직접 보여 주어 불언설화(不言說話)를 남기게 된 사복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사복은 원효와 함께 장례를 지낸 말 외엔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사복불언설화라 한 것이다.
연묵용면기등한(淵默龍眠豈等閑) 임행일곡몰다반(臨行一曲沒多般) 고혜생사원비고(苦兮生死元非苦) 화장부휴세계관(華藏浮休世界寬)
깊은 못에 잠잠히 든 용이 어찌 등한하리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가 분명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세계가 넓기만 하도다.
출처...Daum다음
2014.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