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박무의공비 석탑재

임병기(선과) 2014. 1. 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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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의공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철종12년(1861)에 군민이 건립한 비이다. 본래는 동부동에 있었으나 안압지 주변도로에 이건 후 다시 2001년 황성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더이상 이건은 없었으면 좋겠다.

 

 

의장(毅長ㆍ1555∼1615). 본관은 무안. 자는 사강, 현감 세렴의 아들로 유일재 김언기의 문인이다. 선조 10년(1577년) 무과에 급제, 주부ㆍ진해현감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과 함께 경주성 탈환작전에서 화차와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1593년에는 대구와 울산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부윤이 되었고, 안강ㆍ양산ㆍ임랑포ㆍ기장ㆍ경주ㆍ영천 등지에서 왜병을 무찔렀다. 1600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1601년 인동부사, 1602년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를 거쳐 경상수사를 지냈다. 그는 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으며,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영해 정충사貞忠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무의공武毅公 

 

 

옥에티? 경주군민의 염원으로 조성했다는데, 비좌는 4단 층급 받침의 층급 옥개석, 주초는 맷돌, 다른 전각의 주초이다.버려진 폐사지 유물 재활용이라고 강변할련가? 그렇더라도 2001년 이건시에는 제대로 하였으면 앞서간 경주사람들의 혼이 서린 문화재를 저렇게 푸대접하지 하지 않았겠지!!!. 바닥도 불량공사 흔적으로 너덜너덜하다. 어떻게 공사 준공검사를 했는지 의아스럽다.

 

 

설상가상으로 더욱 한심한 일이 관광객에게 자랑스럽게  경주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안내문의 "철종12년(1816)년"이라고 표기된 문구가 보이는가요? 철종 12년은 1816년이 아니라 1861년이 옳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지 않나요? 그것도 경주에서... 

 

 

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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