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을 나와 한국미술박물관 별관 안양암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주소를 입력하였더니 이곳에 내려 주었다. 안양암이 아니더라도 참새가 방앗간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정업원? 원래는 양반 출신의 여인들이 머물던 절이라고 한다.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순왕후가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동안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곳 맞은편에는 동망봉 봉우리가 있는데 왕후가 단종을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바위라고 한다. 훗날 영조가 정순왕후가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알고 영조 47년(1771)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비석을 세워 표시로 삼도록 했다고 한다.비석 뒷면에 ‘옛 터 신묘년(영조 47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淨業院舊基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전봉후암어천만년 前峰後巖於千萬年 앞산 뒷바위 영원하리라. 영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정업원 터 옆에는 청룡사가 있었다. 정순왕후와 청룡사는 어떤 관련이 없을까? 아래 글은 전통사찰관광정보에서 발췌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 갔다가 비참하게 죽은 단종의 애사는 역사의 뒤안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준다. 그러나 처형되지는 않았어도 단종을 잃은 슬픔으로 이곳에서 외롭게 살다간 정순 왕후의 애달픈 사연도 또한 속인들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단종과 정순 왕후의 비극은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폐위되어 수강궁으로 나온 지 1년만에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이 전부 처형당하면서 모의에 연루되었다 하여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 청량포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때 정순 왕후도 수강궁에서 청룡사에 오게 되었다. 귀양길에 오른 단종도 청룡사에 함께 들러 청룡사우화루에 잠시 머무르며 왕비와 최후의 작별을 하였고, 왕비는 다시 영리교까지 따라 나와 단종의 유배길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한 이별을 나눈 우화루를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렀다고 한다.
정순 왕후는 단종과 이별하던 곳에서 단종을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영월 쪽이 가장 잘 보이는 낙산 상봉의 이곳 청룡사로 올라가 머물게 된다. 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 법명을 받았으며 왕후와 함께 온 일행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왕후는 청룡사에 온 뒤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기도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물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자주물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이름을 "자주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이를 팔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정순 왕후는 청룡사에서 수도 정진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단종이 유배 간 동쪽을 바라다보았으므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불렀으며, 훗날 영조는 동망봉이라는 글을 써서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 하는데, 현재 바위에 새겼다는 글씨는 일제강정기에 비행장을 닦으면서 깨져 없어졌다고 한다.
왕후는 청룡사에서 65년간을 수도하다 82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후도 함께 복위되었고 능도 사릉思陵이라 추상되었으며 신위도 종묘로 옮겨지게 되었다. 영조는 정순왕후가 지낸 청룡사 경내에 "정업원구기"라는 친필을 내려 비각을 세우게 하는 등 정순 왕후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보호각이 왜 저럴까? 2013.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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