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전각에 대한 자료는 창경궁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짰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옥천교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성종14년(1483)년 조성되었다.
명정문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
어도와 품계석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 윤곽을 양각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계단의 수직면)에도 당초와 보상화, 운문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봉황 드므
일월오봉병풍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환경전과 통명전
환경전.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통명전.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양화당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주마간산 격으로 전각을 둘러보고 오늘의 답사 목적인 오층석탑으로 향했다.
명정전 뒷편 오층석탑
안태 고향이 알려지지 않은 석탑으로 일제강점기 또는 광복 이후 창경원 조경용으로 조성한 듯 보인다. 어떤 사유이든 유교가 통치철학이었던 조선 왕조 궁궐의 석탑은 제자리가 아니더라도 박물관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마침 자료를 검색해보니 문화재청에서 11월 까지 조사를 완료하여 다른 장소로 이건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보여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여러 자료에는 고려중기 이후 탑이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갖게 한다. 본디 부재여부도 의심스럽다. 오층탑의 체감율이 떨어져 상승감을 위해서 기단을 높게 조성한 것일까? 지대석.기단저석,면석,갑석 기단저석은 단층기단의 안정감을 위한 부재로 주로 조성될텐데. 면석 각면에는 안상 2구가 표현되었고 갑석 상부 받침은 각호각 3단으로 조출되었다.상기단 면석에는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큼직한 안상이 전체면을 차지하고 있다. 일전에 우리카페 달넘새님이 올린 자료 처럼 이런 안상의 흐름은 대구 기성동 석탑을 시원으로 옥천 용암사, 경북대 인흥사지 석탑, 경주박물관 승소골석탑 등을 거쳐 고려시대의 정읍 해정사지.납복리.군산 발산리.의성 중율리까지 이어지며 창경궁 오층석탑은 거의 마지막 작례라고 한다.
초층 탑신 한 면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과, 옥개석은 별개의 부재로 통돌이다. 몸돌에는 양우주만 조출되어 있다.옥개 받침은 3단이며, 상부에는 2단 탑신받침을 두었다. 추녀 상하에 반전이 보인다. 상륜도 본디 부재 여부는 알 수 없다.개인적으로는 백제 고토에서 보이는 백제계 옥개석을 닮은 유형으로 안태고향을 호남, 충남지방으로 보고 싶지만 어떤 근거도 없다,
잠시 짬을 내어 오층탑을 둘러볼 목적이어서 팔각구층탑, 관천대, 성종태실을 놓쳤다. 준비 안 된 답사의 결과이니 나를 탓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미술박물관 석탑 2기, 창경궁 등 종로구 일원의 옛님은 서울 출장시에 하나 둘 섭렵해야겠다.
2013.11.14 |
'서울특별시 > 서울특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동국대 석탑 (0) | 2013.12.03 |
---|---|
서울...정업원 터 (0) | 2013.12.01 |
서울...한국미술박물관 (0) | 2013.11.28 |
서울...空間 사옥(SPACE)삼층석탑 (0) | 2013.11.27 |
서울...서울 관상감 관천대 (0) | 2013.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