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중봉산 죽림사

임병기(선과) 2013. 10. 1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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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목적으로 나주를 여러번 들렸었다. 그런데 왜 죽림사를 동선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내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지정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기 전 나의 답사 행태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듯하여 부끄럽다. 작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건만 적막강산이다. 경내에 주차된 차량이 보이건만 스님도, 보살도 포행 나갔는가?

 

죽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죽림사 사적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에 아도화상이 종죽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인 죽림사기에도 죽림사의 창건연대가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으로 되어 있다.1983년 극락보전 수리 때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와 청동불두가 발견되어 죽림사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백양사 방장스님이었던 서옹스님이 오래되고 자그마한 선방에 청광선원淸光禪院이라 직접 현판을 쓸 만큼 아름다움을 느꼈던 곳이기도 하다.

 

 

극락보전. 정측면 3칸* 3칸, 주심포, 맞배지붕에 겹처마 전각이다.  막돌 쌓기 기단,  덤벙주초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식으로 내부에 출목이 없고, 기둥 위의 공포 사이에  화반이 있으며 기둥을 배흘림이 보인다.  천정은 우물천정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처럼 아미타불이 측면에 봉안되어 있다. 예전 불갑사 답사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배치를 무엇 때문에 백제계로 보는지? 

 

 

극락보전 외벽의 백의관음

 

 

아미타 삼존불. 극락전 주불은 건칠아미타불로 높은 육계, 나발, 하얀 중간계주가 보이며, 백호, 상호는 갸름한 미인의 얼굴 같다. 예리한 눈썹과 약간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 반듯하게 내려 온 코 등은 근엄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느낌을 준다.불신은 여느 조선후기 불상처럼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법의는 통견,  의문은 두텁다고 내의 자락 아래에 띠매듭을 표현하였다.조성연대는 17~18세기로 추정한다.   

 

 

지장과 관음은 근자에 모신 것 같다.

 

 

후벽 영산회상도

 

영산회상도..출처/사찰문화재총람

 

죽림사 영산회상도. 세로로 긴 화면 중앙에 대좌에 앉은 부처의 모습을 크게 그리고  주위에 문수· 보현· 미륵· 제화갈라보살과 10대 제자· 범천· 제석천· 사천왕· 용왕과 용녀, 건달바와 긴나라 등이 둘러싸고 있는 구도이다. 죽림사 영산회상도는 1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광배 등 초록색을 사용한 부분이 약간 훼손된 상태이기는 하나 전체적인 색감과 화면구성은 18세기 전라도 지방의 불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약사여래좌상. 칠성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0여년 전  영산전 앞으로 이불하였다. 기던과 하대석 없이 석탑 탑신을 중대석으로 삼고 위에 앙련의 상대석을 두었다. 광배는 보이지않고 약사여래만 모셨다. 육계는 훼손 되었고 소발, 백호는 생략, 원만한 표정이다. 눈, 코는 보수한 듯 보인다. 귀는 길고 삼도를 표현하였고 목이 떨어진 불상을 보수하였다.

 

 

법의는 우견편단,  항마촉지 수인, 길상좌,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은 단조롭다. 조성시기는  11~12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세존괘불탱...출처/문화재청

 

나는 직접 뵙지 못한 괘불탱이다.하지만 키형의 광배를 보는 순간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무위사 아미타삼존벽화의 광배가 떠올랐다.

 

보물 제1279호  세존괘불탱. 1622년(광해군14)에 제작된 탱으로 우리나라 괘불로서는 빠른 시기에 제작된 괘불이다. 흔치 않은 석가여래 독존 여래좌상으로 비단에 그린 채색화로 주로 홍색을 띠고 있다. 얼굴은 둥글넓적한 모양으로 긴 눈썹과 약간 치켜 오른 눈이 인상적이며 입은 작은 편이나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어 위엄을 보인다. 귀는 넓고 장대하며, 짧은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다. 머리는 뾰족하게 솟은 날카로운 육계가 특이하며 나발 사이로 빚어 나온 계주는 마치 반달모양 같다.

 

어깨는 당당하며 꽃무늬가 화려한 적색가사를 두르고 있다. 가사 모서리는 국화문을 촘촘이 배치하였다. 몸집은 단아하고 비례가 알맞은 고아한 작품이다. 다만 몸의 비례에 비해 촉지인의 오른 손이 너무 길게 내려와 전체적으로 어색해 보인다. 구름의 표현은 상단의 경우 색동 띠를 여러 개 이어 놓아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 하며, 하단에는 국화와 모란을 인화문처럼 그렸다. 괘불의 크기는 전체가 263.5×500cm이고, 화면이 243.3×435cm이다.

 

은행나무에 옻칠을 한 괘불함, 운송시 사용했던 도구도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함 속에 괘불 복장낭腹藏囊 한 개가 들어있었다. 복장낭은 “탱화 복장낭”이라고도 하는데, 오곡과 약재가 행엽형杏葉形 주머니 안에 들어 있어 습기와 미생물의 오염을 막는 역할을 하므로 방습 · 방충효과를 위해 탱화(괘불) 제작시에 필수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화기에 의하면 이것은 혜은慧銀 공덕으로 이루어졌고, 신수愼受가 증명하였으며 수인首印. 신헌信軒)이 그렸다. 그림의 구도는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가님이 항마촉지인을 한 채 광배를 배경으로 오색구름에 휩싸여 있다. 여래의 법의는 통견으로 우측 팔에서 맨 살이 노출되어 있으며 붉은 색 주조에 녹색이 섞이고 화문花紋)은 밝고 맑다. 특히 광배의 보상화 무늬는 금색으로 화사하고 찬란하다.

 

영산전

목조석가여래삼존불

 

조선후기에 조성된  제화갈라. 석가. 미륵 삼존이다.

 

부도전 

 

돌아나오는 길 입구 부도전에 들렸다. 청계당. 월하당.  부재*2, ()무당대사 부도가 일렬로 서 있다.

 

 

청계당대사부도. 자연석을 약간 다듬은 하대에 석종형의 탑신과 그 위로 방형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상륜은 매우 특이한 형태로 마치 죽순모양인데 중간에 1조의 홈을 돌려 노반의 형태를 갖추었다. 탑신 중앙에 당호가 음각되어 있으며 그 옆에  “건융경신4월일(乾隆庚申四月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1740년(영조16)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명 부도재

 

()무당대사 부도.  가장 오른 쪽에 위치한 부도로 원형 복연석 대좌, 석종형 탑신과 8각의 옥개석을 갖추었으나 마모가 심하다. 정상에는 별석의 상륜인 보주가 올려져 있다. 탑신 중앙의 당호 명문은 마모가 심하여 이름을 판독할 수 없다. 그 옆에 “건융정3월(乾隆丁三月)”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47년(영조 23)에 건립된 부도이다. 

 

 

석탑재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정호승. 부도밭을 지나며 중에서]

 

2013.08.31

 

***전통사찰관광정보.문화재청.한국사찰문화재총람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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