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운흥사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13. 10. 1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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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는 석장승을 뵙기 위해 오래전에 들렸었다. 그 이후에도 답사기를 살펴보니 2009년 7월에도 당간지주와 마애석불을 뵙기 위해 들렸지만 마애불은 찾지 못했다는 글이 보인다. 답사객들의 발걸음도 십중팔구 장승을 뵙고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아래 장승사진과 글은 2009년에 올린 답사기의 일부를 발췌하였고, 대웅전 사진 부터는 2013년 8월 31일 사진과 글이다.

 

운흥사 석장승

 

여러 자료에 당간지주가 있다고 다시 들렸건만 역시 괘불대 였다.  

 

운흥사 초입에 세워진 남녀 한 쌍의 돌장승으로, 무섭다기보다 인자하고 재미있는 우리네 할머니ㆍ할아버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역할은 부처님의 성전과 성역의 부정을 막고 잡귀의 출입을 물리치고자 세워진 수문신(守門神)의 역할과 함께, 절의 경계에 서서 절을 찾는 신도들을 안내해 주고 소박한 마을민들이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의 대상이기도 하다.

해탈문 밖 사찰 초입에 길을 마주보고 서 있는데 좌측은 남자, 우측은 여자의 모습이다. 남장승과 여장승은 전면에 ꡐ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ꡑㆍꡐ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ꡑ이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여장승의 뒷면에는 1719년(강희 58)에 화주승(化主僧) 변학(卞學)과 별좌(別座) 김노즉윤(金老卽尹)이 장승을 세웠다고 새겼다.

 

 

 

남장승인 상원주장군은 높이 270㎝, 두께 34㎝, 너비 60㎝로 자연석 화강암에 조각되었으며, 8자형 수염과 문인석의 복두형 탕건을 쓰고, 두드러진 코, 동그랗고 쌍꺼풀진 눈, 합죽한 입, 양 볼 가득한 광대뼈 주름 등 위엄은 있으나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의 표정을 담고 있다.

 

 

여장승인 하원당장군은 높이 201㎝, 두께 35㎝, 너비 73㎝로 얕고 넓은 판석형 화강암에 조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상원주장군과 유사한 인상에다 동그란 눈동자 가로 쌍꺼풀처럼 선을 두른 합죽한 할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두 장승 모두 절대연도가 파악되는 중요한 민속자료로서 인근의 불회사 장승과 조각수법 및 형태가 흡사함을 알 수 있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관광정보의 운흥사 사적을 살펴보자 

 

운흥사는 나주시의 동남단에 우뚝 솟은 덕룡산  동쪽 골짜기에 자리한 사찰로서, 옛적에는 해남 대둔사의 큰 절이라 불릴 만큼 가람의 규모가 컸던 유서깊은 사찰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차의 대가인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출가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흥사는 1711년 월화 탄천(月華 坦天)이 지은 『덕룡산운흥사사적(德龍山雲興寺事蹟)』, 1775년 정석계(鄭石溪)가 쓴 『운흥사진여문중창기(雲興寺眞如門重創記)』, 「도성암육창기(道成庵六創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그 연혁을 살펴볼 수 있다.


창건은 신라 효공왕대(孝恭王, 897~912)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초막을 지은 뒤 사찰명을 도성암(道成庵)이라 하였다. 이후 1018년(순종 9)에 보도화상(普徒和尙)이 중창하고 1126년(인종 4)에 중국인 도학(道學) 스님이 사찰을 복원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원풍(元豊) 스님이 현감 이등, 수좌 유운숙(柳雲叔) 등과 힘을 합쳐 4중창하고 1684년(숙종 10)에 5중창하였다. 1694년(숙종 20)과 1702년 두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용화당ㆍ만월당ㆍ지장암 및 본사의 법당과 요사채 380여 칸이 소실되었으며, 1711년(숙종 37) 축현(竺玄)ㆍ일해(一解)ㆍ취성(就性)ㆍ석한 등 네 스님이 시주금으로 대웅전과 진여문ㆍ칠성각을 개창하고 요사채를 복원하였고, 1758년(영조 34)에 보령화상(普玲和尙)이 수좌 서국강(徐國綱), 호장 강담(姜淡)과 함께 중창하였다. 


한편 사찰의 명칭을 살펴보면, 1565년에 조성된 「지장보살조성발원문」과 『동국여지지』에서는 웅점사(熊岾寺), 18세기 중반에 기록된 『여지도서』에서는 웅치사(熊峙寺)로 표기하고 있어, 초창시의 도성암에서 어느 시기엔가 웅점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웅치사로 개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운흥사사적』에는 사찰에 빈번한 화재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찰명인 ꡐ웅(熊)ꡑ자 아래에 불 화(火)가 있는 탓이라 하여 ꡐ운(雲)ꡑ자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16세기까지는 웅점사였으나 그 뒤에 웅치사로 고쳐 부르다가 18세기 후반 들어 운흥사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괘불대

 

2013년 8월 31일 현재 운흥사 입구에 큰 불사가 진행중이었다, 기초 공사중이어서 건물의 용도는 확인 할 수 없었다. 앞선 답사에서는 마애불을 찾지 못한 까닭이 무엇 이었을까? 마애불이라고 하여 주변 바위를 살폈기 때문이었다. 마애불은 대웅전 좌측 전각에 봉안되어 있다.

 

 

마애석조여래좌상. 1968년 동강면 옥정리에서 발굴된 불상으로, 용운사에 봉안된 불상을 2001년에 운흥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고려후기 불상으로 석불 조성 내력과 안태고향은 자세하지 않으나, 영산강변에서 바다를 항해하는 어민들의 민불로 조성된 것으로 사찰관광정보에는 언급하였지만, 조형미로 미루어 오히려 사찰에 봉안된 불상으로 보고 싶다. 

 

내눈에는 등어오지 않았으나 광배 문양에 대한 설명을 보자

 

주형광배와 불신이 한돌이며 소발, 육계가 솟아 있으며 상호는 상하가 균형을 유지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에 보상화문과 안동당초문을 정교하게 장엄하고, 주연으로는 화염문을 시문한 장엄적 수법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삼도와 두터운 U자형 통견의 등 부자연스러운 치장수법과 항마인을 결한 듯한 파손된 양손의 수인에서, 불신의 조각솜씨가 석불의 장엄수법에 뒤쳐지는 부조화를 보여준다. 크기는 현고 179㎝에 무릎 폭 104㎝의 중형불상으로 조성연대는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최근까지 야외에 모셔졌으며  표면이 매끈하지 못한 것은 2개로 깨진 불상을 덮을려고 개금된 불상의 흔적 때문이다. 현재는 대웅전 옆 팔상전에 봉안되어 있다.

 

 

 

 

처음에는 장승만 인연지었다. 두번째는 석불좌상과 당간지주를 뵙기 위해 찾았지만 뵙지 못하엿다. 돌아서면서 이제 운흥사와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찾았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라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 언제라도 보고 싶으면 달려오겠다. 또한  훗날 절집과 차문화 기행을 도모하면 필수코스 아닌가?

 

201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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