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상남도/김해시

김해...모은암 석조 아미타여래좌상

by 임병기(선과) 2013. 9. 28.
728x90
728x90

 

 

 

주차장에서 잠시 걸어 올라왔는데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린다. 조용히 법당으로 들어가 쉬고 있으니 보살님께서 복숭아 넥터를 권한다. 그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도 모은암 하면 복숭아가 떠오르니...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 모은사. 전통사찰관광정보의 창건 내력을 가져 왔다.

 

모은암은 수로왕비가 인도의 모후를 그리워하며 세웠다는 설과 가락국 2대왕인 거등왕이 모후인 수로왕비를 기리며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사찰이다. 그러나 거등왕이 세운 것이 아니라 허왕후가 인도 본국의 부모를 위하여 부암(父庵)과 모암(母庵)을 세웠고 자신의 뿌리를 알리기 위해 자암(子庵)을 세운 바 그 모암이 지금의 모은암이라는 설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6월 중국 진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고구려에 들어와 성문사 이불란사 등의 절을 창건한 것이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불교는 백제로 흘러들었고, 마지막으로 전래된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 후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공인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가락국 2대 거등왕의 어머니)이 48년(신라 유리왕 25년) 파사석탑을 싣고 가락국에 들어와 김수로왕의 비가 되고 이듬해 태자 거등왕을 낳았으며 불교를 융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허왕후는 그녀 자신이 성불했을 뿐만 아니라 열 분의 왕자 중 일곱 분의 왕자를 화개 칠불사로 보내 수도하게 하여 모두 성불했다고도 한다.

 

한편 조선조 순조 5년(1805년), 당시의 주지 정오(定悟)스님이 산골짜기에서 때때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14일 간 재계한 뒤 현재의 모은암 터인 돌무더기 속에서 조그만 종을 찾았다. 그 종에 ‘母庵 羅漢殿 小鐘 至正 24年 3月 7日’이라 쓰여 있었다 한다. 따라서 그 종은 1364년(고려 공민왕 13년)에 만든 것이며, 오래 전부터 나한전을 비롯하여 여러 법당이 들어찼던 모암이라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남근석

 

왕가의 번영을 상징한다고 전한다.

 

 

아미타 삼존

 

협시보살은 후대에 봉안했다.

 

 

문화재청 설명문

 

불상은 모은암 주법당에 삼존불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으며, 삼존불중 본존상이다. 양측의 협시상은 본존상과 비교해 신체의 비례, 상호 등에서 양식적 차이를 보이는 후대의 것이다. 사찰측 전언으로는 25년전에 개금하였다고 하며, 목주위가 파손되어 접합·수리되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머리, 상호 등에 손상을 받지 않아 불상양식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다. 크기는 촉의 높이를 빼면 39cm의 소형상으로, 특이하게 불상저부에 좌우 25.5cm, 전후 20.7cm의 둥근 촉을 만들고, 불석으로 대좌를 제작해 그 상면을 촉과 비슷한 크기의 홈을 파 불상을 끼우도록 제작하였으며, 암자용 독존으로 아담하게 조성된 작품이다. 불상바닥 중앙에는 원추형으로 파낸 복장공이 있으며, 19cm 정도 깊이의 복장공 내부에는 1.5cm 폭의 조각도로 내면을 깎아낸 흔적이 역력하다. 개금 중수 당시에는 후령통과 경전인쇄물 등이 약간 남아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석조아미타상은 허리로부터 구부정하게 숙이고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지만 어깨와 다리가 이루는 비례가 좋아 자세에 안정감이 있다. 신체에 비해 큰 듯한 양손은 모두 손등을 위로 해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은 형태이며, 특히 팔꿈치로부터 이어지는 팔목 윗면이 인체비례와 상관없이 지나치게 굵고 편평하게 조각되어 있어 조선후기 조각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머리와 육계의 구분없이 그 가운데에 타원형의 계주가 있고 정상부분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로 장식하였다. 얼굴 길이에 비해 얼굴 폭이 넓은 편이며, 이로 인해 길어진 눈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주며, 매부리형의 코, 좁은 인중선, 입술에 머금은 희미한 미소는 전체적으로 단정하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목에는 선각의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오른쪽에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다시 대의를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입었으며, 복부 앞으로는 편삼자락과 대의가 대칭적으로 흘러내려 조선후기 불상상의 정형화된 모습을 따르고 있다. 가슴까지 올려 입은 승각기는 가운데를 사선으로 접어 멋을 내었으며, 양다리 사이의 군의 자락은 양측으로 세 개의 주름을 이루며 양측으로 펼쳐져 있다.

 

 

불상은 불상발원문과 같은 복장물이 남아 있지는 않다. 소형의 불상이지만 방형이 강조된 얼굴 형태나 매부리형의 코 등은 18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색란파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인법당과 같은 작은 규모에 적합한 형태로 불상과 대좌가 함께 1組로 조성된 것은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따라서 김해 모은암 불상은 18세기 전반 불상의 특징을 파악함은 물론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의 유파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런데 왜 아미타 존상으로 판단했을까? 협시보살로 인해 추정했는가?

 

***착의에 대하여 우리 카페 손태호(흔별)님의 견해를 가져왔다***

변형 우견편단이 아니라 변형통견 또는 이중착의법이라 부릅니다..안에 편삼을 입고있기에 우견편단이라 부를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착의법을 변형 우견편단이라 표현하는 일부 미술사학자가 있긴 있습니다만 대의 착의법에 대한 이해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 다리 사이에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군의가 아니라 대의자락입니다. 오른쪽 무릅을 싸고 발목위로 올린 후 남은 부분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형식상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제작으로 보여지는데 복장물이 전부 사라졌다니 사찰의 성보물 관리가 아쉽습니다.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모은바위

 

하황후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2013.08.15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