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밀양시립박물관 옥외 전시물

임병기(선과) 2013. 9. 2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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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립박물관 답사 목적은 척화비 촬영이었다. 영남루옆에 위치한 줄 알고 있었는데 검색 하면서 2008년 현재 장소로 이전한 사실을 알았다. 이른 시간 실내는 개방하지 않아 척화비는 만날 수 없었고 야외전시장 석조물을 둘러 보았다.

 

 

야외전시장

 

 

어디에서 가져온 석탑재일까? 최소한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라면 안태고향이 아니라도 유래를 설명한 안내문이 있었으면 좋겠다. 교육적차원? 뒤집혀진 옥개석이 대좌위에 올려져 있다. 옥개석 층급자리에 연화문이 조식된 석탑은 손 꼽을 정도로 몇 점 남아 있지 않다. 원형 홈은 후대 석탑 부재를 건축물 주초로 활용한 생채기 아닐까?

 

 

일부 유물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영원사지에서 가져온 부재라고 전하지만 어떤 유물인지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다.

 

 

 

옥개석 2점. 탑신석 1점. 문화재청 한국사지총람에 단초가 남아 있다. "엄광사지. 밀양시 산외면 엄광리 엄촌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정확한 연혁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사지내에 남아 있던 탑 기단면석 1매, 옥개석 2매, 연화대석 등의 유물은 밀양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기단 면석이 별도로 옮겨졌는지 탑신석의 오류인지 알 수 없다.

 

엄광사의 폐사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현재 인근 부락에는 석탑 부재 등 사찰 유물이 남아 있으며, 주변 야산에는 엄광사에서 심였던 차나무가 많이 식생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카페 "밀양광장"에 글을 옮겨왔다.

엄광사지(嚴光寺址)와 그 유물(遺物)


산외면 엄광리 숲마을 뒤편 엄광산(嚴光山, 일명 實惠山) 골짜기에 있는 고려시대의사찰이다.


이 절에 있는 문헌상의 기록은 태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전래하는 밀주지 등에서 산견(散見)되고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문헌상의 기록과 사지 부근에 산재하고 있는 석조유물 등의 조형양식으로 미루어 고려초기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고렬르 건국한 태조 왕건이 신라에 이어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게 되자 신라 이래의 명찰은  말할 것도 없고 명처와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을 돕는다는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이른바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난립하여 고려시대에는 약 3,800여개소의 사사(寺社)가 전국에 세워졌다.


그리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 등 중국에서 전래한 불교의 각 종파도 많이 생겼으나 그 가운데서도 1097년(고려 肅宗 2년)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에 의하여 개창한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이 가장 종세(宗勢)가 성하였다


엄광사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화엄종에 소속된 사찰로서 의천의 영향으로 한창 교세를 떨치고 있던 시기에 명처(名處)를 선택하여 건립한 비보사찰의 하나였을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그 창건 연대를 대개 고려시대 전기인 숙종 연간(1095 ~ 1105) 이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사사의 난립이 가져온 폐단이 심하여 사찰은 본래의 종교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광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함으로서 백성들을 수탈하였고 승려들의 세도와 탈선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어갔다.


고려 말기에는 그러한 사사의 폐단이 더욱 가중되어 심지어 도선(道詵)의 밀기에 명기된 70社 이외는 모두 혁파하여 나라의 田土와 경제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으나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뒤 조선의 건국과 함께 나라의 지도이념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바뀜에 따라 불교와사사의 폐단을 바로잡기에 이르러 많은 통제가 가해 졌다


1405년(태종 5년)에는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찰의 거승과 전지(田地) 노비의 제한 조치를 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그 이듬해인 1406년 3월에는 구체적으로 국내 수 천개의 대소 사찰 가운데 12종파에 소속된 242사(寺)를 선정하여 이를 공인된 사사(寺社)로 존치시키며, 여타사찰은 과감하게 혁파 도태시킨다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혁파된 사찰의 전지와 재산은 군비로 이용하고 소속된 노비는 속공(屬公)으로 돌리며, 거승(居僧)들은 따로 각관(各官) 읍내에 이들을 수용하는 자복사(資福寺)를 선정하여 20결(結)의 속전(屬田)과 10구(口)의 노비, 10원(員)의 상양승(常養僧)을 둘 수 있도록 제도화 하였다


엄광사는 이 때 화엄종 소속의 대표사찰의 하나로서 속전 60결과 노비30구, 거승 30원을 배당받은 밀양읍외 각처의 가람으로서 공인된 사찰로 남게 되었다.


1407년(태종 7년) 12월에는 공인사찰 242개중에서 다시 각 주군(주군) 산수승처(山水勝處)에 있는 대가람(大伽藍) 88개를 선정하여 읍내에 있는 자복사를 대신케 하는 후속조치가 있었는데 , 이때 엄광사도 명산대찰의 하나로서 밀양을 대표하는 자복사의 지정을 받게 됨으로서 속전과 노비, 거승의 수가 훨씬 많아진 큰 절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엄광사는 고려 전기 이래 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화엄종의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는 바, 1421년(세종3)경에 경상도 감사로 있던 최0가 이 절을 순례하고 남긴 시를 음미해 보면 그 사실을 더욱 뒷받침할 수 있다

 

谷裡飛泉百道分 

곡리비천백도분 

골짜기에 부딪치는 백갈래 물줄기


空階春色長苔文

공계춘색장태문

빈 뜨락에 이끼무늬 봄빛이 짙다

 

등루객취천봉우

登樓客醉千峰雨 

천봉의 가랑비에 나그네는 취하고


持鉢僧歸萬壑雲

지발승귀만학운

만학의 구름속을 스님은 돌아온다


방리적능담사제

倣吏赤能談四제

오만한 장리 또한 불문의 진리를 말하면서


청준겸득공제군

淸樽兼得共諸君

맑은 술을 얻어 그대들과 함께 즐기리


자다풍초장림사

自多豊草長林思

무성한 풀과 긴숲을 그리는 마음


투살계변미녹군

妬殺溪邊麋鹿群

시냇가에 뛰노는 사슴을 시샘하노라

 

골짜기에 부딪히는 백 갈래 물줄기

빈 뜨락에 이끼무늬 봄빛이 짙다

천봉(千峰)의 가랑비에 나그네는 취하고

만학의 구름 속을 스님은 돌아 온다

오만한 장리(長吏) 또한 불문의 진리를 말하면서

맑은 술을 얻어 그대들과 함께 즐기리

무성한 풀과 긴 숲을 그리는 마음

시냇가에 뛰노는 사슴을 시샘하노라

 

비천(飛泉) 공계춘색(空階春色) 천봉우(千峰雨) 만학운(萬壑雲) 미녹군(미鹿群) 등의 표현과 시적인 분위기로 보아 엄광산느 산수승처에 있는 대가람이며 시임(時任)의 감사(監司)가 관속을 거느리고 순례할 만한 명찰이었슴을 실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이 절 동남쪽(지금 竹村마을)에는 조선조 중기에 관죽전(관죽전, 관수용의 대밭)이 있었는데 역시 엄광사의 재산이었다 하며, 그 무렵까지 절이 잇엇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일대 사찰 유허(遺墟)에 대하여는 1960년에 밀양교육청 주관 불적(佛蹟)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다. 당시 사찰 건물의 유적구조(유구)가 될 만한 자리는 경작지로 되어 그 흔적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부근 산 기슭과 밭두렁에서 도합 14점의 석조유물, 건물의 주초석(柱礎石)과 축대석(築臺石), 석축으로 쌓은 방형(方形)의 우물 등을 발견하였다. 석조 유물은 석탑의 기단석과(基壇石)과 옥개(屋蓋), 옥신(屋身) 등의 석재가 대부분으로서 이 일대에 산재한 것을 하나하나 부재(部材)를 맞추면서 수습할 수만 있다면 우주(隅柱)가 조출(彫出)된 상하 기단 위에 짜임새 있는 방형의 우수한 3층석탑을 재현킬 수 있다 하여 당시 가(假) 복원도까지 작성한 바가 있다


그 도면에 의한 실측치로는 기단석에서 3층 옥개석까지의 높이가 342센티미터이며, 하기단 일변의 길이가 170센티미터, 상기단 면석(面石)의 높이 110센티미터, 각층 옥신석(屋身石)도 52, 22, 18센티미터로 체감율을 구성하였고, 각층 옥개석의 받침도 각각 4단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양식상으로 보면 표충사의 3층 석탑과 같이 신라 하대(下代) 작품의 추정도 할 수 있지만 결실(缺失)된 부재가 많아 속단할 수는 없다


이 밖에도 복연(伏蓮)의 조각이 우수한 좌대(座臺)와 부도의 탑재(塔材) 몇 점이 함께 발견되었으나, 그 석재의 대부분이 절터 동북편에 있는 대촌마을(관죽전마을인 듯) 개천의 돌다리 또는 안동손씨의 광산재(光山齋) 건물의 주초석(柱礎石)과 댓돌(臺石) 또는 건물 하방(下榜)의 구성석(構成石)으로 이용되고 있어 그 수습과 복원은 용이하지 않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작설차(雀舌茶)가 많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잇고, 한 때는 밀양의 명산물로 알려지기까지 했으며, 지금 다촌(茶村)이라는 마을은 엄광사에 딸린 다전(茶田)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고, 죽전(竹田)이란 관죽전(官竹田)에서 파생된 마을명인 듯하다


출처 

1987. 12. 10 밀양문화원 발행 “밀양지” 466P ~470P

 

 

대좌, 옆에는 석등 기단도 보인다.

 

 

홀을 든 문인석. 휴손 때문에 장승 느낌이다.

 

 

 

이수 전면

 

 

 

이수 후면의 문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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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 역시 절터에서 가져왔을테고...

 

201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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