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밀양시

밀양...예림서원

임병기(선과) 2012. 6. 25.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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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 외삼문. 독서루

 

현재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 유림의 종장인 점필재 김종직을 사숙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선생을 주벽으로, 증 도승지 오졸재 박한주선생을 동쪽에, 처사송계신계성선생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에 향사하는 곳이다.


본래는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부사 이경우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 아래 영원사 옛터인 덕성동(지금의 밀양시 용활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인조 13년(1635년)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옮겼다가 숙종 6년(1680년) 묘우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고려 8년(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제 훼철된 바 있으나 고종 11년(1874년) 향사림의 노력으로 강당) 6칸과 동서재 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후에 사액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건물은 육덕사, 정양문, 강당, 동재, 서재, 몽양재, 독서루등이 있다.

 

 

 몽양재.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곳.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위치한 몽양재와 열고각은 예림 서원의 3개(몽양재 구역, 강당 구역, 사당구역)구역 중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김종직.1431(세종 13) 경남 밀양~ 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효관,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를 지낸 숙자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 홍신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에서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 28) 과거에 응시, 〈백룡부 〉를 지어 김수온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종석 등과 함께 황악산 능여사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 1) 울진현령 조계문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조위의 누나와 결혼했다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역〉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인수왕후봉숭왕책문〉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로 기용되면서 관인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봉정대부, 1473년 중훈대부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와 양노례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했다. 김굉필·정여창·이승언·홍유손·김일손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람파를 형성,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유향소의 복립운동을 전개하여 1488년 그 복립절목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재지사림의 주도로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치적 진출을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1485년 사복첨정 문극정의 딸인 남평문씨와 재혼했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사망하여 부남의 무량원 서산에 묻혔다.

 

 

열고각. 서적을 열람하는 곳. 장판각처럼 보인다. 김종직의 저서가 보관되어 있는 듯하다.   김종직은 정몽주-길재-아버지 김숙자를 잇는 성리학의 학맥의 계승자이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으로 연산군 재위시 일어난 무호사화로 부관 참시 되었다.

 

조의제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내용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 ·정문형·이극돈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과 김수항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서재.직방재 

동재,돈선재

 

 

 

 

강당영역으로 구영당과 동.서재가 위치해 있다. 예림서원 강학공간인 구영당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3칸에 마루를 깔고 좌우에 비대칭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에는 몇편의 현판이 걸려 있다.

 

 

 

구영당. 예림서원 강당 이름이다. 이퇴계의 싯구에서 가져온 말로  "점필재의 문장은 일어났다가 쇠했으나 그가 구한 도는 뜰에 가득찼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극준조약.무생과실

 

밀양부사 이상억李象億이  1865년 김종직을 위해 쓴 글이라고 한다. "이치와 규약을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 날 수 없다.'라는 의미로 김종직의 성품을 지칭하는 글이다

 

 

구영당 좌측 2칸방에 걸린 현판. 大學의  日新又日新 일신우일신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소수서원에도 같은 현판이 있다. 우측 한 칸방에는 시의적절하게 움직인다는 뜻의 시민재時敏齋 현판이 걸려 있다.

 

 

 

육덕사, 정양문

 

예림서원의 제향공간인 육덕사의 내삼문이다. 周易蒙卦彖傳에  蒙以養正聖功也 " 몽매한  자를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스러운  공이  되는  것이다"에서 유래되었다. 육덕사는 3단계로 영역이 구획된 서원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로 전학후묘의 배치에서 묘의 영역이다.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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