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는 바에 따르면 만어사는 46년(수로왕 5)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이 창건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조에 기록되어 있는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로왕은 양산의 옥지(玉池)에 살던 독룡(毒龍)과 만어산에 살고 있던 다섯 나찰녀(羅刹女)의 악행을 막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으나 실패하여, 석가여래를 청해 이들이 계(戒)를 받게 함으로써 재앙을 물리쳤으며,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수로왕은 이를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하였는데, 불법의 감화를 받아 돌이 된 물고기떼의 의미를 살려 이름을 만어사(萬魚寺)라 칭하였다.
사찰명과 관련한 또 하나의 전설이 이 지역에 전한다. 즉 옛날 동해용왕의 아들이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신승(神僧)에게 새로 살 곳을 묻자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 터’라 일러주었는데, 왕자와 수많은 고기떼가 함께 길을 떠났다가 잠시 머무른 곳에서 용왕의 아들은 미륵돌로, 고기들은 모두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만어산ㆍ만어사는 모두 이러한 전설과 함께 탄생된 이름이며, 지금도 만어사에는 그때의 고기가 변한 돌무덤이 첩첩이 깔린 만어석(萬魚石)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만어사는 신라시대에 여러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또한 “1180년(고려 명종 10)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후 사정에 비추어 보아 만어사는 수로왕 설화와 연결된 46년에 작은 기도처로 창건된 듯하며, 1180년에 와서 사찰다운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찰에 현존하는 삼층석탑이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신빙성을 갖는다..전통사찰정보
지대석을 4장으로 짜고, 2단의 각형받침을 마련하여 기단 면석을 결구하였다. 갑석은 2매 부재이며,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가 모두 한 돌이며, 있으며, 옥개석 낙수면의 물매는 깊다. 옥개석 받침은 3단이다. 탑신에는 각 층마다 양우주를 조출하였다. 상륜에는 보처럼 보이는 석재를 올려 놓았다. 고려시대의 탑이다.
마애불도 조성되어 있다.
무슨 의미일까?
종석 너덜을 이루는 수많은 바윗덩이들은 물고기 떼가 수면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어서 만어석이라고도 부른다. 만어사ㆍ만어산이라는 절과 산이름은 모두 이러한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쇳소리가 나는 바위들은 대개 밑부분이 단단히 옥죄어 있지 않고 가볍게 얹힌 것들이다. 하지만 얹힌 돌들 중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들이 있으며, 밑부분이 단단히 틀어박힌 돌 중에도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이 있어 종석이 특이한 암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바위.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신비감을 자아낸다. 또한 해마다 0.3cm씩 커진다고도 하며,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갑오농민전쟁ㆍ한일합방ㆍ한국전쟁 당시에 땀을 흘렀다고 하는 신비한 바위이다.
2003.11.09일 답사기 "아침 일찍 서둘렀건만 기분 나쁜 비와 묘사차량으로 도로가 엉망이다. 그 와중에도 시골 정거장에 서 있는 여인네의 고운 모습에 맘 빼앗겨서 뒤차의 빵빵거림에 놀라 채찍을 가하는 나라는 중생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는가? 만어사 올라가는 길은 달구지 2대가 교행하기 힘들다고 하여 걱정이 앞섰다. 청학동 못지않게 힘든 산길을 올라갔더니 산사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인적이 드문 산사의 가을비에 젖은 노오란 감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젖어 들었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조용미 2012.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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