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면 고평리 고정마을 회관 옆에 자리한 호랑이 석상이다. 고정마을은 어제 답사한 주천리 상주마을과 불과 10여분 거리 떨어진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 견두산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어 비보책으로 조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답사 동선을 수립하면서 동선에 포함된 견두산 마애불 자료 검색 중에 남원시내에 견두산의 풍수비보 목적으로 두 곳에 호석이 조성되었음을 인지 했다. 고정마을 외에 다른 한 곳은 광한루원 내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광한루원의 호석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 카페 "南原山房"에서 옮겨 왔다.
"완월정 옆 잔디밭에 돌로 만든 호랑이상이 세워져 있다. 흔히 호석(虎石)이라 부르는 이 돌에도 풍수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지리산이 가까운 남원에서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02년(태종 2)에는 수백 명이, 1754년(영조 30)에는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 동안에 120여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남원지역 역시 당시 전라감사였던 였던 이서구(1754~1825)를 남원에 급파한 것도 호환(虎患)으로부터 남원지역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특이 재야학문인 천문과 지리 인사에 능통했다는 이서구는《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이서구가 남원을 방문해 내린 처방은 남원 남쪽의 호두산에 어려 있는 호랑이의 정기가 너무 강하니 이를 눌러야 한다는 것 이였다. 진압하는 방법은 호두산(虎頭山)의 이름을 견두산(犬頭山, 790미터)으로 바꾸고, 호두산의 맥이 내려와서 뭉친 지역인 호곡리(虎谷里)의 명칭을 호곡리(好谷里)로 한자표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운집하는 장소인 광한루 옆에 돌로 된 호랑이 상을 세우도록 했다. 호석상(虎石像)은 호두산을 바라보고 있다. 호두산의 호랑이 기운을 돌로 만든 호랑이 상으로 하여금 대항하게 한 것이다. 이름을 바꾸고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을 세우는 조치를 한 연후에 신기하게도 호완이 사라졌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1699년(숙종 25)에 간행된《용성지》에도 “호석(石虎):재부남오작교두(在府南烏鵲橋頭)”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석호는 남원부 남쪽의 오작교 머리에 있다는 것’이다. 조성교 선생이 펴낸《남원지》<향토설화>(호석, 虎石)에도, 내용은 위 글들과 대동소이한데 “이 호석은 처음에 광한루 남쪽 구시장에 안치 하였는데 이로 인(因)해서 호석이 안치된 부근을 ‘호석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랬더니 과연 이로부터 남원부중에 호환과 기타 재난이 씻은 듯 없어졌다. 그리고 6.25이후 한때 광한루 경내에 호석을 옮겼더니 시장 내에 화재가 잦아 이를 다시 원위치(原位置)로 환원시”켰다고 한다. 같은 책(남원지)에는 영조 때 남원의 문인(文人)이었다는, 이복겸의 <율장호석(栗場虎石)>이란 시한편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천년이나 묵은 돌 탈을 바꾸어 깊은 산(山) 떠나 저저의 호랑이 되었네. 오작교 밑에 버티어 앉은 양 무섭게 앉았으니 견두산(犬頭山) 요기(妖氣)가 스스로 사라진다. 千年老石化其形(천년노석화기형) 坐負橋隅瓔不敢(좌부교우영불감) 一出雲林市虎成(일출운림시호성) 犬山熾氣自省精(태산치기자성정 이복겸의 시, <율장호석(栗場虎石)>에서 ‘율장(栗場)’이란, 예전 광한루 남쪽 천거동 구시장 일대로 호석이 있던 곳으로. 1444년(세종 26) 당시 황무지였던 이곳에 당시 남원부사 유지례가 유실수인 밤나무를 심어 밤나무 숲이 된 것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의병장에 의해 신병조련소로 사용되면서 율장은 사라졌고 지금은 광한루원 내로 편입되고 말았다. "
수지면 고평리의 호석도 조성목적은 광한루원과 대동소이하다. 나의 글보다 앞에 인용했던 南原山房 카페의 글을 발췌해 옮긴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가 쓴《복을 부르는 풍수기행》<남원 광한루 호랑이 석상 ‘개머리산’ 제압용>에는 광한루원 호석처럼 고정마을 호석도 이서구에의해 조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광한루의 호랑이 석상과 그곳에서 30리 떨어진 수지면 고정마을에 세워진 호랑이 석상이 동일 시대에 동일인 석공 혹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석상의 모양과 양식이 같고, 세워진 동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개다. 남원 남동쪽 30리 거리에 견두산이 있다. 견두산을 바라보면 실제 개처럼 생겼다. 사납고 굶주린 형상으로 구례나 곡성 쪽이 아닌 남원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이렇듯 험한 산세는 이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 대비책이 필요하다. 견두산의 거센 기세를 누를 수 있는 것은 호랑이 밖에 없다. 당연히 호랑이 석상을 세워 그 기운을 진압하는 ‘진압풍수’의 논리가 개입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퍽이나 해학적이다. 개는 커녕 쥐에게도 희롱당할 자태의 호랑이다. 숨은 내력은 없을까? 우리나라의 많은 절집들의 폐사 원인이 빈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답사 매니아들에게 상식이 된 이야기지만. 기실 그 빈대는 관리, 양반 세력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무섭게 조성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김두규교수의 상기에 언급한 저서에도 비슷한 글이 있다고 한다. "옛날 이산(견두산)에 성질 사나운 들개들이 수십 마리씩 떼 지어 살면서 사람과 가축을 해쳤고 또 이놈들이 일시에 소리를 지르면 무서운 재앙이 생겼다고 한다." 즉 여기서 들개도 빈대처럼 민초들을 괴롭히는 관료, 양반 등 지배층을 묘사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위치는 제자리가 아니지만 그런저런 곡절은 관심도 없다는 듯 견두산이 아닌 세월을 희롱하려는 모습이다. 먼 미래가 먼 옛날이 될 그날까지 호석은 고정마을의 일원이며, 수호신으로 살아가겠지만, 친구이자 동료였던 민초들의 관심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2013.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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