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에 들어서자 기어코 강한 비가 차창을 때린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 달구지를 타고 통과하여 오락가락 내리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답사객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겠는가? 그나저나 용문사도 천지개벽 상전벽해가 되어 전각 마져도 기억속에 남아 있지 않다. 일주문을 승용차로 통과한 탓에 출입 동선마져도 보광명전 중정으로 이끌었다. 지금은 전국 많은 사찰에 조성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윤장대와 목각탱이 용문사의 자랑이었었다. 나역시 두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어떤 기억도 반추할 수 없었다.
전통사찰관광정보의 창건 내역을 보자. 신라 870년(경문왕10) 고승 두운이 당나라에 다녀온 뒤 이곳에 암자를 짓고 두운암이라고 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예천군 산천조에 전한다. 고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했고 1165년(의종) 왕명으로 중수가 이루어 졌으며 1171년(명종)엔 절의 왼편 봉우리에 태자의 태를 묻고 사액을 ‘용문산 창기사’로 개명했다.고려시대에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고 여러 차례 외침을 당할 때마다 ‘일만승제 삼만승제(一萬勝祭三萬勝祭)’를 올려 국난 극복을 위해 기도했으며, 규정원으로 승병을 훈련하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엔 승군의 짚신을 짜서 보급하던 곳으로 호국불교의 장이기도 하다.척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용문사는 왕실로부터 대접을 받아 1457(세조3)년에는 왕이 잡역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전해오고 있다. 1478년(성종9)에는 소헌왕비의 태를, 1783년(정조7)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보광명전. 1984년 화재 이후 새롭게 불사한 용문사의 금당이다. 자연석을 높게 쌓은 기단, 정'측면 각각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천정은 우물천정이다.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협시불로 모셨다.
용문사목조아미타여래좌상...출처/문화재청
보광명전 아미타여래상의 몸 안에서는 원문과 시주자 목록 두 장이 발견되었는데, 1515년 4월 9일에 고쳐 만들었다는 개조이라는 개조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만든 화원과 목수 철장의 이름 그리고 수백 명에 이르는 시주자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상화원(上畵員) 이영문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음을 밝혀 승려가 아닌 일반 장인에 의해 주도된 16세기 전반의 중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영산회 괘불탱...출처/문화재청
예천용문사영산회괘불탱은 입상의 삼존불상을 배경으로 본존불상 머리 좌우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배치시켜 5존도 형식을 취하였다. 삼존불상 가운데 통견의 적색 대의에 밝은 회청색 내의를 착용한 본존 불상은 머리 높이가 180㎝이고 머리 광배의 폭만도 무려 273.㎝에 이르러 10미터가 넘는 화면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큼직하게 그려져 있다. 적색 대의에는 봉황문과 화문, 격자문, 연화문 등의 둥근 무늬가 전체에 걸쳐 정연하게 시문되어 있으며, 내의에는 흰색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대장전.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대장전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 의하면 건립이 1173년(명종 3) 자엄대사에 의해 이루어졌고, 1670년(현종11) 중수하였다고 하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최근의 큰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불타자 화재방지를 위한 보존처리를 하기도 하였다.
대장전 목조 삼존불과 목각탱
삼존목불좌상. 기법상 목불탱의 불보살과 쪽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진 원각상이라 하겠다. 본존상의 경우 육계가 생략되었고, 반달형의 중앙계주가 표현되었으며, 신체는 중후한 모습이지만 각 부분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또한 통견의 불의는 그 두께가 두꺼워 신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옷주름 또한 지극히 단순화되어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본존상이 목각탱과 동일한 작가에 의해 동시에 조성된 작품임이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 표현 등이 비교적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상 어려운, 들고 있는 손을 표현한 점 등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목각탱. 문화재지정명은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다.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윤장대는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용문사 천불도...출처/문화재청
천불도는 유존 사례가 극히 드물어, 1709년에 화승 도문(道文), 설잠(雪岑), 계순(戒淳), 해영(海英)이 제작한 용문사 천불도는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 천불도는 석가팔상도와 같은 시기인 1709년 제작된 그림으로 당시 불사와 후원자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 18세기 초반의 화풍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현존하는 천불도는 선운사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분산 소장되어 있는 1754년 작품이 있을 뿐 매우 희귀하다. 또한 1754년 선운사 천불도가 모두 5폭으로 그려진데 반하여 한 폭에 천불을 모두 그린 것으로, 현존 천불도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설 뿐 만 아니라 많지 않은 18세기 초반 불화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후기 천불신앙을 전해주는 예로서도 중요하다. 명부전 명부전 시왕
자운루. 보광명전 앞의 해운루와 더불어 자운루는 대장전으로 향하는 누하진입의 용문사 출입 문이었을 것이다지만, 현재는 우측 주차장을 통하여 측면 출입 동선이 되어 버렸다.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고려 의종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세웠으며, 조선 명종 16년(1561) 고쳐 짓고, 광해군 13년(1621)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반쪽 답사가 되어 버렸다.
2013.07.14
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 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
'경상북도 > 예천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천...죽림리 향나무 (0) | 2013.08.20 |
---|---|
예천...사부리 소나무 (0) | 2013.08.18 |
예천... 연화사 지장보살좌상 (0) | 2013.08.16 |
예천...탑리 흥덕사지 석탑 (0) | 2013.08.14 |
예천...명봉사 부도, 사적비. 문종태실비 (0) | 201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