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지리산 영원사

임병기(선과) 2013. 7. 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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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선사 부도는 지금은 영원사 경내로 옮겼음을 알려드립니다.

 

 

먼저 영원사 부도밭을 소개하여야 겠다. 답사하는 님들이 영원사 부도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도 포기하고 내려오던 길에  미륵(?)님을 만나 부도전을 들릴 수 있었다.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내비의 안내를 따라 가다가  바위에 새겨진 영원사 이정표에서 우회전하여 마지막 민가(상가)에서 계속 직진하면 아래와 같이 작은 시멘트 다리와 약수터가 나온다.

 

 

영원사, 상무주암 답사 후 부도전을 포기하고 내려오던 중에 여기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긴 수염을 휘날리며 물 한모금 마시던 님을 만났다.

 

혹시 영원사 부도전 위치를 아세요?

그거 몰라요. 근데 왜 찾아요?

취미로 찾아 다닙니다.

요위에 부도 밭, 영원사 옆에도 한 기 있고, 상무주암에도 한 기가 있어요

헉!!! 고수다!!!(상무주암에서 부도를 탐문했으나 스님도 금시초문이라고 했었다)

차 태워 주세요. 거기로 가야하니까!

넵. 어서 타십시요

 

시멘트 다리로부터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200여미터 직진 오르막 정상. 전주 하단에 영원사 이정표가 보인다.

 

 

내리막 200미터 내외. 내려가면 우측에 절개지 시멘트 방벽이 있고, 절개지 못미쳐 사진 하단 길가에 주차 후. 사진에 보이는 두 개 바위 사이로 올라서면 오솔길이 나타난다. 오솔길에서 5분여 거리에 영원사 부도전이 위치한다.

 

 

사찰의 묘역으로 보이는 부도군은 약간의 경사면과 앞쪽에 석축으로 마감한 약 100여 평 정도의 면적 한가운데에 5기 부도가조성되어 있다. 대부분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들은 현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각각 탑호를 가지고 있다. 5기 부도들은 모두 주변에서 산출되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횡렬로 건립되어 있다. 또한 이 부도들은 각각 부도의 주인공을 밝혀주는 탑호를 탑신석에 새겨두고 있다.

 

영암당탑靈巖堂塔. 설파당탑(雪坡堂塔)

 

영암당 부도 .기단부와 탑신부의 석재 2매로 구성되어 있는 영암당탑은 석종형 부도에서 변형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하부에서 상부로 가면서 점차 폭이 넓어지다가 어깨부분에서 바로 꺾인 후 간략화 된 상륜을 형성하고 있는 마치 커다란 골호(骨壺)처럼 생긴 부도이다. 기단부는 원형 주좌와 유사하게 2단을 이룬 후 다시 탑신 괴임을 두고 있다. 또한 탑신석과 한 몸으로 이룬 채 간략화 된 상륜부는 보주 장식이 형식화되어 마치 항아리의 구연부와 뚜껑처럼 보인다.

 

설파당 부도.5기의 부도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치석 또한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짜임새도 갖춘 편이다. 전체적인 양식은 조선시대에 팔각원당형 부도와 종형 부도 양식이 결합된 채 형식화된 구형부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는 방형에 원형 주좌처럼 1단을 형성한 후 탑신 괴임을 두고 있으며, 탑신부의 탑신석은 상하가 약간 긴 구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은 두꺼운 두께와 완만한 경사를 이룬 낙수면 및 유연한 처마선을 지닌 채 6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옥개석의 상하 합각 부분에는 우동과 모각을 조출하고 있으며, 밑면에는 한 줄의 음각선을 돌리고 있고, 정상에는 구릉형의 보주를 각출하고 있다.

 

설파상언(雪坡尙彦) 대사는 1707년에 출생하여 1791년에 입적한 분이다. 또한 설파상언 대사는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소재한 영각사를 창건하고 화엄경판을 각한 분이기도 하다.

 

중봉당탑中峯堂塔. 청계당탑淸溪堂塔.벽허당탑碧虛堂塔

 

중봉당부도. 원형 기단부 위에 탑신석 괴임을 각출한 후 계란 형태의 석종형 탑신석을 둔 조선시대에 흔히 조성된 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신석과 한 몸을 이룬 상륜부에는 8엽의 복연이 융기된 것처럼 보이는 연화관을 특이하게 조출하고 있다.

 
청계당 부도. 부도의 기단부는 각 변과 치석이 고르지 않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란 형태의 탑신석 위에는 간략히 반구형 보주를 각출하고 있다.

벽허당부도.방형 기단부와 상륜부에 7엽의 연화관이 조출되어 있는 등 세부적으로는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부도전에는 취나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동행한 분은 너무 좋다를 남발하며 사진 촬영에 열중이고 나는 취나물 채취에 부도전은 뒷전이었다. 잠시 얻은 취나물로 귀가하여 맛나게 무쳐 먹었다.

 

 

홀연히 사라진 미륵님. 부산에서 거주하다 7년전 지리산에 입산하였다고 한다. 조만간 이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라지고 미륵이 하생하는 세상이 도래된다도 믿고 있었다. 부도를 찾는 일도 부질없는 것이라며 나직히 말씀하신다. 어쨌거나 이 분의 도움으로 부도를 만나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꿈을 꾸는 듯하다.

 

 

영원사 입구 노거수. 상무주암으로 가는 대나무 사립문이 바로 위쪽에 위치 한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가 건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때는 너와로 된 선방이 100칸이 넘을 정도로 내지리에서는 제일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에 부용영관, 서산대사, 사명대사. 청매, 지안, 설파 상언, 포광스님 등 당대의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내지리에서 가장 큰 사찰인 영원사는 여수 반란사건 때 반란군이 아군의 공격에 쫓겨 영원사에 들어와 아지트로 삼고, 건물 등을 작전상 불태워 버렸다. 이후 6.25동란으로 절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후 1973년 대일스님이 영원사의 수많은 내력과 전설을 듣고 복원불사를 시작해 인법당과 산신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원스님이 영원사를 창건할 때 얽힌 일화이다. 영원스님이 지리산으로 입산한 지 얼마 안 돼 현재의 영원사 부근에 토굴을 파고 8년을 계속 참선 수도를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깨우침을 얻지 못해 수도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나섰다.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다 보니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는 시늉을 하면서 영원스님을 향하여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이다”며 혼잣말로 중얼 거리는 것이다. 영원스님은 이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2년간 더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고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영원사였다고 한다. 후세 스님들은 영원스님의 하산길을 막고 깨달음을 주었던 그 노인을 다름 아닌 문수보살 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사진 우측 금당이 화재로 전소된 흔적이 보인다. 아마 근자에 일인듯 하다. 그래서인지 주석하는 스님이 아주 폐쇄적이며 사람과의 대화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내가 영원사 답사 주목적이 청매선사 부도와 부도전이어서  아침 상무주암 가기전에 스님을 만나 부도전을 물었더니 부도가 뭐요??? 하시고는 요사로 들어가 버렸다.

 

두류선원

 

영원사에는 따로 법당이 없으며, 두류선림(頭流禪林)이라는 편액이 붙은 인법당이 주전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전소된 영원사 터에 1973년 대일스님이 불사를 시작해 지은 것으로 전각 정면에 올라서면 산 아래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이 좋다. 두류선림 뒤쪽 경사면에는 푸른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며, 앞으로는 돌로 쌓은 축대와 함께 돌탑과 꽃, 그리고 작은 나무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전각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공포는 익공계이며 겹처마 형식에 단청은 되어 있지 않다. 네모서리 처마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어 지리산을 타고 오르는 바람들이 부딪혀 소리를 만들어 준다.

 

자연석 기단을 쌓은 다음 자연석 주초석에 둥근기둥을 세워 놓았는데, 정면에는 마루가 만들어져 있다. 왼쪽에서 4칸까지의 마루에는 미닫이 유리문을 달아 놓았으나 어색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루에 유리문을 설치함으로서 공간을 조화롭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마루로 들어서면 다시 5칸 중에 왼쪽 1칸에는 중앙에 불단을 조성하여 석불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1m 정도 높이의 지장보살은 법의와 수인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뒤에는 지장탱이 유리안에 봉안되어 있다.

 

정면 3칸은 영원사의 주법당으로 중앙에는 벽에서 1m 들어가게 하여 불단을 조성하고 대세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좌우에는 협시불 대신 불경들이 봉안된 책장이 놓여 있다. 불단에서 닫집까지는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후불탱과 신장탱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목조대세지보살상. 1894년에 조성된 신장탱, 지장탱과 동시대에 조성여부는 알려지 않고 있으나 조선후기에 조성된 상으로 전한다.

 

 

 

 

신중탱. 1894년 조성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탱. 1894년 조성

 

 

청매인오선사 부도. 방광사리탑 . 두류선원을 등지고 좌측 산록에 있다. 10분 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아침에 만났던 스님이 마침 경내에서 작업을 하고 계서 여쭈었다.

 

스님 청매선사 부도 어디에 있나요?

몰라요!

제가 찾아 봐도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시요.

................

 

알 수 없었습니다. 스님의 마음을...

 

 

 흔치 않은 양식의 조선시대 부도이면서도 통일신라하대 팔각원당 부도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방형 대좌 위에 하기단에는 일반적인 복련을 탈피하여 앙련을 새겼다. 중대석은 육각형이며 상기단은 석탑의 옥개석 처럼 조성하였다. 탑신석도 육각형이며 상륜에는 보주가 보인다.

 

 

오도재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청매스님이 고개를 오르내르며 도를 깨우쳤다고해서 오도재가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1548(명종 3)∼1623(인조 1)출생. 스님의 자는 묵계, 호는 청매靑梅이며, 휴정의 제자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3년 동안 의승장으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으며, 왜적이 물러가자 부안 요차봉의 마천대 기슭에 월명암을 짓고 살다가, 지리산 연곡사, 함양 영원사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전통사찰관광정보에 수록된 일화를 보자. "청매스님은 영원사에서 남쪽으로 마주보이는 산중턱의 토굴에서 오랫동안 참선한 수도승으로 수도 중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거나 관솔을 잘라다 남원, 함양 등지의 장에다 내다 팔았다.  하루는 대중들이 아랫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다 보니 절터가 전소한 듯 환해, 놀라서 급히 절로 달려 가보니 청매스님이 입적해 있었다.

 

다비를 하고 나온 사리를 현재의 영원사 동쪽능선에 탑을 세우고 봉안을 했다. 그런데 청매스님 사리탑이 때로는 환하게 빛을 발하면서 방광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지자 이를 보려고 많은 스님들 뿐만 아니라 신도들까지 모여 들었다. 외부스님들과 신도들의 접대에 지친 스님들이 사리탑을 다른 곳으로 옮겼더니, 그 후 부터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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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등산객의 무분별한 행동. 절집에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도 망각한 추태. 많은 답사객의 부도 위치 문의 등 산중 절집에서 수도하는 스님에게 귀찮은 일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찾아온 사람에게 "부도가 뭐요? 그런 것 없소!" 라고 철저하게 배타적일 수 있을까? 절집 입구에 묵언 수행중이라는 안내문, 부도 위치를 표시한 그림 하나 설치해 놓을 여유는 없었는지. 내려오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는데 부도전을 안내한 미륵님과의 해후로 웃음을 되찾은 영원사 참배였다.

 

2013.06.01

 

***전통사찰관광정보, 함양군청.문화재청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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