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등구사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3. 7. 2.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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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사 법당

 

몇해전 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 구양리 석탑 답사과정에서  함양 휴천면 구양리에서 수습한 부재로 이건한 탑이라는사실을 인지하였고 구양리를 검색하면서 등구사를 알게되었다.  박물관 석탑이 등구사지 석탑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나 등구사는 한국사지 총람에 의하면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고려말 소실 조선초 중건,  신동국여지승람 범우고 여지도 대동지지 등에 언급되어 있으나 18세기 이전 폐사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여러 유구와 석조 부재, 통일신라 시대 석탑이 남아 있다는 문장이었다. 탑이 보고파서 바로 동선을 수립하였으나 차일피일 몇 년을 미루다가 이번에 인연을 짓게 되었다.

 

 

등구사 카페에 올려진 창건내력을 보자. 등구사를 창건한 인물은 펑북 정주 출생의 행호 스님이다. 스님이 불법을 깨우치고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지리산에 깃들 곳을 찼았다. 그러던중 오도치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신령한 거북이가 부도를 지고 하늘로 오르며 아래 세상에 내려가기를 재촉하는 것 같은 빼어난 계곡을 발견했다. 이 계곡이 하늘이 주신 인연이라 생각하고 절을 창건하고 등구사로 이름 지었다. 이때가 당나라 고종 연휘 7년(서기 656년)이다. 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와 등구사 석탑 인연을 맺어준 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석탑. 안태고향은 마천면 구양리, 조성시기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어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해인사의 소장중인 등구사 중건기에 의하면 등구사는 임란,호란에도 전화를 입지 않았으나 1708년 화재로 전소하였다. 그 후 1709년부터 탄기.자상.초익.초학 스님의 3년간 불사를 통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근거는 미약하지만 만약 박물관 석탑이 등구사 경내 탑이었다면 동시대에 조성한 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1489년(성종 20) 4월 14일 ~ 28일  에 비친 등구사 모습이다. 그런데 삼층석탑을 비롯 절에 대한 묘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미쳐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현재 등구사에도 오래된 축대와 석간수가 남아 있다. 탁영이 등구사에 들렸을 때는 비가 오는 불손한 기후탓도 있겠지만 석탑이 도괴된 상태로 풀숲에 누워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도 있겠다.

 

信馬到登龜寺.

나는 말을 믿고 몸을 맡겨 등구사登龜寺에 이르렀다.

 

山形穹窿如龜. 以寺登其背而名也.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古砌絶峻. 砌隙有幽竇.

오래된 축대가 빼어났는데 축대의 틈새에 깊숙한 구멍이 있었다.

 

澗水自北而注其中㶁㶁然.

석간수石澗水가 북쪽에서 흘러 그 속으로 흘러 내렸는데 졸졸 소리를 내는 듯 하였다.

 

其上有東西二刹. 一行皆寓於東刹. 汰還從者.

그 위쪽엔 동, 서로 두 사찰이 있었는데, 일행은 모두 동쪽 사찰에 묵기로 하고 따르는 자를 가려서 보냈다.

 

雨勢竟夜. 終朝殊未已.

내리는 비의 기세가 밤까지 계속되었고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遂留寺宇. 各就午寢.

마침내 절에 머물며 각자 낮잠을 잤다.

 

僧忽報雨霽. 頭流呈露.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 가는 길이 보인다.”라고 알려주었다,

 

 

탁영 기행기에 언급된 푸른 봉우리는 사진 중앙 천왕봉을 비롯 3개 봉우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吾三人驚起. 刮睡眼視之. 則蒼然三峯. 偃蹇當戶.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있는 듯 했다.

 

 

吾三人驚起. 刮睡眼視之. 則蒼然三峯. 偃蹇當戶.

우리 세 사람이 놀라서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세 개의 푸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듯 했다.

 

白雲橫斜. 翠黛隱映而已.

흰 구름이 가로지르듯 감싸고 있어 짙푸른 봉우리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少選又雨.

조금 뒤에 다시 비가 내렸다.

 

余戲曰. 造物其亦有心者歟. 潛形山岳. 似有所猜.

내가 농담삼아 말하기를, “조물주도 역시 마음이 있는가 봅니다. 산의 형세를 숨겼다가 보여주었다가 하니 시기하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니,

 

伯勖曰. 安知山靈久關騷客爲計耶.

백욱이 말하기를, “어찌 산신령이 객을 오랫동안 잡아두려는 계책인지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是夜復晴. 皓月流光. 蒼顏全露.

이 날 밤에 다시 맑아져서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모두 드러났다.

 

稜稜壑谷. 若有仙人羽客來舞翩翩也.

굽이굽이 이어진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伯勖曰. 人心夜氣. 於此都無査滓矣.

백욱이 말하기를, “사람 마음이 밤 기운을 받아 이때에는 속세의 찌꺼기라곤 전혀 없군요.”라고 하였다.

 

余之小蒼頭. 頗調觱篥令吹之. 亦足以傳空山之響.

나의 어린 종이 제법 피리를 불 줄 알아서 불게 하였더니, 빈 산에 메아리가 울리기에 충분하였다.

 

三人相對. 夜分方寢.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대하여 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등구사 삼층석탑. 일부 자료에는 7세기~8세기초 석탑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9세기 중기 탑 아닐까? 대한제국 말에 복원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도굴꾼에 의하여 훼손되어 도괴된 탑부재를 수습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상하기단에 양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하대 갑석은 4매이며,상부에 탑신 괴임을 두었다. 상기단 갑석은  1석이며 역시 상부에 탑신괴임을 두었다. 탑신석에는 양우주가 보이고 옥개석 받침은 4단, 낙수면 물매는 깊지 않다. 1층옥개석 위의 부재는 결실되었다. 장충식(전 동국대학교 박물관장)교수의 등구사지신라석탑고에 의하면, 초층 탑신에 사리공이 노출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주변에는 3층 석탑과 다른 석탑 부재가 산포되어 있으며, 예전 등구사 탑 사진에도 삼층탑 부재가 아닌 별개의 부재를 올려 놓았다. 근거가 없지만 진주 박물관 석탑 부재로 보이며 안태고향이 등구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석탑 부재

 

오도재를 거쳐 촉동마을에서 등구사로 향하는 주변에는 고사리 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골 살림에 농작물보다 수입이 더 많겠지만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하긴 광어, 도다리 등을 양식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겠다. 석탑 주변에도 고사리가 널부르져 있어 동행한 이는 한묶끔 꺽어 마냥 즐거워하며 천진한 모습을 보인다. 내려오는 길 밭인지 아닌지 구분이 모호한 터에 고사리가 지천이었지만 겁많은 중생 발길을 돌렸다. 내목적은 고사리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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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자료에 등구사터는 가야의 마지막  마지막 왕 구형왕이  궁터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변의 석축 석굴 유구를 비롯해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가까운 산청에 왕의 무덤이 전하고 있어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더이상의 전개는 나의 몫이 아니기에 그만 두련다. 내려 오는 등뒤로 뻐꾸기의 애닯은 울음이 등구사를 휘감는다.

 

201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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