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함양군

함양...운암마을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13. 7. 8.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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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순례길에 동행한 님을 위해 1년만에 다시 찾았다. 아래 사진 폐가 울타리에는 검은 오디가 고향 떠난 주인과의 정겨워던옛추억 만큼이나  주렁주렁 영글고 있었다. 지난 겨울 쓸쓸한 적맘감이 가득했던 석불 주변에는  이름모를 야생화, 취나물, 더덕이 어울려 불상의 동료가 되어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인적이 끊긴 그곳에 불두를 복원한다는 봄소식은 언제 오려나?

 

 운암마을 석불좌상...2013.06.01

 

아래 글, 사진은  2012년 2월 4일 답사기다.

 

 

답사후 돌아나오면서 확인한 휴천면 운서리 운서길 179-2 폐가의 주소로 찾아 가면 쉽게 도착할 것이다. 운서길은 무덤덤하게 무미건조한 그런 길이 아니라 역사의 향을 품은 길이다. 운서리에서 구주소로 입력한 네비가 멈추었지만 운암마을을 운암 雲庵으로 기분 좋게 착각하고 적조암 이정표를 보고 내쳐 달린다. 운암이 적조암으로 바뀌었을거라는 유쾌한 상상속에 도착한 암자는 넓은 터에 자리잡은 대찰이었다.

 

처사님과 비구니스님에게 해설사분이 함양문화재도록에서 복사해 온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상세하게 안내하며 운암 마을에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길을 잘못들어 헤매이었지만 날아갈듯한 기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답사의 고수 반열에 오른 분으로 믿고 싶다.

 

필림을 돌려서 운서리 마을로 후진하여 적조암으로 다시 올라가보자.  운서리도 지리산 둘레길 마을이다. 마을이 끝나는 낮은 언덕에 둘레길 휴식처 팔각정이 자리하고 바로 옆이 철로 제작한 대형 물통이 서 있는 삼거리다. 여기서 적조암 방향은 오르막으로 김종직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지리산 산행 코스이며, 우측 내리막이 지리산 둘레길 코스이다. 우측 마을로 내려가 작은 개울을 건너 100여m 언덕을 오르면 삼거리가 보이고 여기서 좌측 산길을 택하여 폐가까지 직진 하면 만사 형통이다.

 

 

폐가에서 대밭길을 내려가면 우측에 바로 석불좌상이 반겨줄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의 금계-동강 구간중 "금계마을 - 의중마을 - 모전마을(용유담) - 세동마을 - 운서마을 - 구시락재 - 동강마을" 운서마을이 이 곳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잠시 살펴보자.

 

나는 영남에서 성장하였다. 두류산은 바로 우리 고장의 산이다. 그럼에도 이곳 저곳으로 벼슬살이를 하면서 세상일에 골몰하다 보니 나이는벌써 40이건만 아직까지 한 번도 두류산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중 1471년 봄에 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그 경내에 있는 두류산은 새파랗게 우뚝 치솟아 고개만 쳐들면 바로 보였으나, 흉년이 들고 사무가 바빠 2년이 넘도록 한번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유호인, 임정숙과 두류산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간절하였다. 마침 금년 여름에 조위가 관동으로부터 와서 나와 함께 <예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가을이 되자 장차 부모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떠나기 전에 지리산을 한번 꼭 구경가자고 청하였다. 나 역시 허약한 증세가 날로 더해가고 다리 힘이 갈수록 떨어져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내년을 기약하기 가 어려웠다.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철이고 습한 기운도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 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이에 극기를 불러 태허와 함께 <수친서>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하여 산행도구를 대충 준비하였다.                      김종직의<遊頭流錄>중에서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472년(당시 42세) 8월14일부터 19일까지 6일 동안 그의 제자 유호인, 한인효, 임대공, 조위등과 지리산 탐승에 나섰다. 함양관청에서 제자등과 함께 지리산을 향했던 김종직 일행은 말방울을 울리며 등구마천의 벽송사, 신라 화랑의 기상이 살아있던 영랑대,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에 당도했다. 천왕봉의 성모사와 성모사와 향적사를 답사하고는 "...혼돈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휘말리지 말 것이다...."라고 일행들에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의 선비정신을 일깨우기도 한 김종직은 다시 세석평원으로 가 영신사등을 둘러보고 하산했다. "유두류록"에서 김종직은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서의 조망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천왕봉에 서서 발아래 굽어보이는 세상상의 이치를 깨닳은 듯 그는 그후 엄청난 사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까지 백성과 나라를 위한 처연한 삶을 계속해오며 영남사림의 대부로 숱한 인재를 배출해냈다....출처 야후


 

우여곡절.시행착오 끝에 해후한 우리부처님. 반가움보다 애처로움이 엄습한다.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도 아니었을텐데 참말로 모진 중생이었던 모양이다. 어디 계시던 부처님이었을까? 점필재의 유두류록에서 단서를 찾고 싶었지만 이 구간의 기록으로는 엄천-화암-지장사 외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지장사에 계셨던 부처님이 었을까?

 

함양문화재도록에는 조선시재 불상으로 명기되어 있었지만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광배와 불상도 색조가 동일하지 않다.주형거신광배의 화염문과 덩굴문은 훼손이 되었지만 고려시대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운암 불상 좌측 팔 아래 팔 받침대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의자에 앉은 우측 용추사 무학대사 영정 사진의 좌측 팔 부분과 비교해보길 바란다. 이런 형태의 불상의 예가 있는가?

 

 

법의 어깨에 걸쳐진 띠매듭의 연잎(?)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록 불두는 망실되었지만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길게 늘여 상현좌로 여겨진다. 양손은 끼워 넣어 조립한 탓에 망실되어 지리산에 묻혀버렸다. 이불상에서  특이한 점은 왼쪽손을 좌대 위에 얹여 놓은 모습이다. 좌대가 맞다면 묻힌 부분은 의자에 앉은 거의 유례가 없는 불상인데...

 

 

광배. 불상. 기자석이 어울려 한 세상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찾는 사람마져 없으니 잊어버린 인간의 온기를 전달하고파 슬쩍 손을 올려 불경을 범했다. 훗날 불두와 양손을 복원하려고 발원하는 사람이 운암마을에 둥지를 틀거든  나를 불러주오. 노래가사처럼 낮이고 밤이고 무조건 달려가리라 약속하겠습니다. 보시도 보시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를 진심으로 용서 받고 싶기 때문이랍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 보살 ()()()

201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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