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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평택시

평택...서천사 석조여래좌상

by 임병기(선과) 201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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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평택 답사시에 인연짓지 못했던 미륵불을 만나러 멀리 대구에서 다시 찾았건만 미륵전에서는 제를 봉안하고 있었다. 나의 욕심으로 제를 방해 할 수는 없으며 미륵불도 원치 않을 것이다. 중정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독경은 끝없이 이어진다. 마침 제수를 들고 오시는 보살님이 나의 목적을 눈치 채고 멀리서 찍으면 된단다.

 

전통사찰관광정보의 서천사 창건 배경을 보자.

서천사는 평택시 고덕면 방축리에 있는 해동종 사찰이다. 현재 창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고려 공민왕 때인 1352년 선각왕사(禪覺王師) 혜근(惠勤 : 1320-1376)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세한 문헌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신빙성이 적다. 참고적으로 선각왕사 혜근은 나옹대사로 1352년에 복용산(伏龍山)으로 들어가 천암(千嵓)스님을 친견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와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指空)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천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왕조 건국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 주기 위해 위령제(慰靈祭)를 올리고, 그들의 영가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승병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46일간 주둔하였으며, 이곳에서 승병들을 이끌고 김해방면으로 진군한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당시 서천사는 호국사찰로서 승병들의 주둔지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때 대웅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19세기 말까지 폐사로 유지되었으나, 성황당, 미륵불등이 노천에서 그 법맥을 이어 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역 일대에는 조선시대 기와편과 자기편들이 산재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법등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가람은 1870년에 사찰에 머물고 있었던 동파스님이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동파스님은 서천사의 중창주로 땅속에 묻혀 있던 미륵불입상을 발굴하여 미륵전을 지어 봉안하였으며, 일제 강점기때에는 평택항을 통해 부를 모은 일본인들이 서천사를 포교당으로 사용하면서 그 법맥을 이어갔다. 근래에는 동파스님 이후 지견스님이 법등을 이어 현 종무소를 비롯하여 1929년에 미륵전을 중수하였으며, 1953년에 전소된 미륵전을 1954년에 다시 중수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는 중선(重先)스님 상주하며 가람을 보수하고, 서천사를 전통사찰로 등록하였으며, 최근에는 화두(和豆)스님이 기거하며 요사채를 신축하여 평택의 호국사찰로 가람을 재정비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 석조약사여래입상

 

문화재청.평택시청 홈페이지에는  석불좌상이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석불로 설명하고 있다(현재 들고 있는 약합은 금년에 조성한 듯 하다, 2012년, 2013년에 답사한 사람들의 사진에는 약합이 보이지 않는다).수미단 가장 우측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호분으로 채색되어 본래 모습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삼도, 나발, 중앙계주, 계란형 얼굴, 지긋하게 감은 눈,  백호, 삼각형의 오뚝한 코, 입은 붉게 채색하였다. 결가부좌, 선정인 수인이다. 자료에는 서천사 석조여래좌상의 정확한 제작연대를 밝힐 수 없지만, 사찰의 중창시기와 일제시대 포교당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 석불로 보고 있다.

그런데 조금 의문이 든다.삼존불상일 경우 주불이 중앙본존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중앙의 미륵불이 입상이어서 석가모니불을 우측협시불로 조성한 것이 잘못된 봉안이라고 말 할 자신은 없다.  전각 이름과 어울리게 조성한 사례로 가볍게 생각할련다. 중앙 미륵불입상은 사진상 보이지 않지만 약함을 지물로 들고있는 약사여래이다.

 

 

 그런데 전통사찰관광정보 자료에 석불좌상에 관한 기록은 일체 언급 없이 중앙 미륵불에 관한 조성 배경만 있다. 문화재청 사지총람에도 석불입상만 보이고, 두산백과사전에도 석불좌상에 관한 기록은 없이 석불입상을 고려시대에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 불상 모두를 기술한 자료는 사찰문화재 총람으로 모두 조선말~일제강점기의 작품으로 보았다.

 

어찌된 경우일까? 미륵불을 먼저 모셨을텐데 어찌 지정이 되지 않았으며 후에 불단에 조성한 석가여래만 문화재로 등록되었을까? 많이 궁금하다. 혹시 좌상과 입상을 잘못 선정하지는 않았을까?

 

 "미륵불입상은 1870년 동파스님이 땅 속에서 발굴하여 봉안한 것으로 현재 불상은 상체 일부만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봉안된 상체만 볼 때 머리에 비해 불신이 왜소한 편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호분을 칠해 불신을 단장하고 있다. 상호는 여법하나 신체에 비해 기형적으로 크며, 목은 짧고 삼도가 없다. 수인은 자세하지 않으나,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쥔 형태로, 불신은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입체감이 적다. 높이는 하반신을 볼 수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반신 높이 112㎝, 어깨너비 68㎝로 상당히 거구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석불은 입체 불상처럼 하나의 돌로 조각하였지만 후면을 대강 치석하고, 불두와 불신이 전체적으로 평면적인 인상을 주고 있어 불두와 불신의 비례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보인다. 또 계주와 상호의 평면적인 처리, 두 귀의 짧은 표현, 두툼한 옷주름과 다소 어색한 수인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석불이 화재로 손상을 입기는 하였지만 머리의 계주 계주표현과 상호의 조각기법의 정연함, 뚜꺼운 옷주름에 비해 깔끔한 윤곽선 등 우수한 지방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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