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경주시

경주...천룡사지 삼층석탑

임병기(선과) 2013. 4. 23.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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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3리에서 바라본 오늘의 산행코스. 월출산 불교문화재 답사에서 입을 맞춘 남산 진달래꽃 답청은 예상외로 우리카페의 호응이 적어 단촐하게 보일러(이상녕)님과 김환대님과 3명이서 다녀 올 줄 알았다. 그것은 기우 였다. 신라옛길 회원들의 참여로 10여명이 동행하였으며 강정근(국도4호선)박사님이 길눈이를 해주었다.

 

 

신라옛길 카페 주인장 도형님은 우리카페 회원이기도 하다. 오늘 동행하지 않은 사모님은 오래전에 내가 만났던 분이 었으며, 용장골에 거주하는 동민으로 문화재 이정표 보다 더 정확하게 길을 안내하였다. 앞으로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남산제비꽃. 제비꽃은 그 종류가 가장 다양하여 전문가가 아니고는 일일이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동행한 분은 바로 남산제비꽃임을 알려준다. 기왕 이야기를 했으니 나의 무식함을 말하자면...?, 경주 남산이 원산지로 자랑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는데, 어이쿠!!! 서울 남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남산제비꽃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잎이 아주 잘게 갈라진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 잎과 꽃은 모두 뿌리에서 잎자루와 꽃대가 나와 그 끝에 달린다. 잎은 5조각으로 완전히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각 조각은 다시 3갈래로 나누어졌다. 꽃은 4~5월에 하얀색으로 피며 꽃잎에는 자주색 줄무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제비꽃속 식물 중의 하나로 햇빛이 들거나 반그늘인 곳에서도 잘 자란다."..출처/자연박물관

 

 

진달래는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반겨준다.

 

 

용장골-틈수곡-천룡사지 길

 

 

석종형 부도가 쓸쓸하지 않고 오히려 의젓해 보인다.

 

 

남산의 조선시대 부도 느낌이 이상하다.왜 그럴까?  남산은 신라 불적만 남아 있지 않을텐데. 천룡사지에는 이 부도 아래 연못가에 비슷한 부도가 한 기 더 있다. 또한 지근 와룡사에도 조선시대 석종형 부조인 운암당, 한원당 부도가 있다고 한다.

 

 

민묘주변 석조 부재들이 산포하고 있다.

 

 

 

천룡사

 

고위산 아래 넓은터에 자리한 천룡사지는 심국유사 권 제2 기이 원성대왕조에 고사 혹은 천룡사로 기록되어 있어 671년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정종 때에 최제언에 의해 중수 되었으며 신동국여지승람 범우고 동경잡기 등에도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한다. 전통사찰관광정보에 기록된 창건설화를 보자

 

"서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高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천룡사는 지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 절이 계림(鷄林) 땅을 흐르는 한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의 근원지에 있으면서 객수와 역수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위치에 있고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를 아는 당(唐)의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는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신라 말기에 와서 어느 사이엔가 절이 폐사가가 되고 과연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라시대에 천룡사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존숭되고 석가 만일도량(萬日道場)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천룡사에서 열렸던 석가 만일도량에 관해서는 고려 때 최승로가 지은 글이 남아 있는데, 10,000일이면 거의 30년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라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천룡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의 아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뒤의 역사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쉬움을 준다."

 

천룡사지 귀부

 

부처의 목만 만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부처님 뒤를 따라 거북이의 목도 길을 나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불두와 귀부가 만행을 마치는 그날은 언제일까? 거북은 말이 없고 탐승객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그런 감상도 잠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무엇의 대좌이었을까? 석등대좌? 무슨 근거인지 경문을 설치한 대좌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경문을 새긴 당석 대좌? 다른 작례도 있는가? 사적은 없지만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 4기와 연결하여  동시대 석조부재로 보면 무리가 있을까?

 

문화유적총람 자료를 보자. "경문을 새긴 당석(幢石)을 세웠던 귀부인데 당석과 새석은 없어 지고 현재는 머리도 없이 몸뚱이만 남아 있다. 사각대신 위에 42.7cm 높이로 거북을 새겨 놓았다. 거북의 잔등 위에는 당석을 세 웠던 구멍이 패어져 있는데 그 밑에 3단으로 된 당석괴임이 새겨 져 있다. 제일 아랫단에는 보상화로 장식된 네잎연꽃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고 둘째 단에는 아랫단 꽃잎과 어긋나도록 네잎연꽃을 배 치하였는데 꽃잎마다 두송이씩 보상화가 장식되어 있다. 셋째 단은 무늬없이 높이 3.7cm정도의 소박한 테만 둘러 놓았다. 연꽃을 새긴 나머지 부분에는 작은 귀갑을 새겼고 네 모퉁이에는 작은 발 이 새겨져 있다."

 

 

머리가 만행 떠난 날 놀라움에 움츠린 모습으로 비쳐지는 꼬리

 

 

오늘을 사는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을까?

 

 

석조1

 

 

석조2

 

밭 가운데 묻혀 있는 석조는 석탑 옆에 있는 위사진 석조보다 크다고 한다. 겉에는 선각으로 안상 무늬가 새겨져 있고 내부 바닥에는 물을 빼는 구멍이 뚫려져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방치할가? 경주만의 자만심일까?

 

 

천룡사지는 1990년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으며, 1991년 결실된 부재를 보충하며 복원하였다고 한다. 상륜부는 남원 실상사 석탑을 모델로 하여 복원 하였다. 그이후 2006년 6월 배수로 정비중에 탑신석의 일부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단층기단일 것이다. 이미 경북북부 문경 지방에서 시작된 단층기단 석탑 조성이 시작되었지만 신라전형의 2기단 석탑을 서라벌 중심부에서 전형을 파괴하는 용기는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격이 아니라 멋을 추구하는 장인의 용기로 보고 싶다. 모범생에게는 멋이 없는 법이다.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의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기단부는 지대석 위에 2단 굄을 마련하고 면석에는 양우주,탱주 1개가 모각되었다. 갑석에는 아래쪽에 부연이 있고 상부에는 2단 괴임이 높다. 옥개석 층급은 5단, 낙수면은 평박하며 모서리의 전각에는 반전이 보인다. 각 면의 합각우동도  뚜렷하다. 상부에는 2단 각형의 탑신받침을 두었다.

 

 

5단의 층급받침

 

 

일전에 올린 이상기교수님의 답사기에서 매월당 시를 가져왔다. 김시습의 생몰년대(1435∼1493)를 고려하면 조선초에 이미 향화가 끊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폐사지에 사찰을 중건하여 한 때 사세가 번창했던 시절의 자취를 석종형 부도가 대변하고 있지만 천룡사지는 아직 긴 꿈을 꾸고 있으니.

 

천룡사에서 옛날을 느끼다.                  天龍寺感舊 

 

제안의 두 딸 이름이 천녀와 용녀인데    齊顏二女號天龍

   이들이 오래 살도록 부처궁을 지었다네. 爲祝延齡作梵宮。

   옛날 일이 이미 진토가 되어 꿈같은데    往事已成塵土夢。

   공허한 하늘 산새가 바람을 부르누나.    空餘山鳥自呼風。

 

 

 

석등부재 외

 

 

하루종일 꽃 놀이를 즐기는 두 여인네.

 

봄은 봄인 듯

 

 

팔방미인 그녀. 예쁜 미라님은 머리에 꽃을 꼽은 후  막걸리에 진달래를 띄우고

 

캬~~

 

화전이 별것인가요?

 

      장진주사 將進酒辭 ...송강 정철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꺽어서 마신 잔 수를 세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뒤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묶여 가거나~

 

                       꽃상여에 만인들이 울며 따른다 한들~

 

             억새풀 떡갈나무 숲에 묻히면~

 

                     누가 나더러 한 잔 먹자고 하겠는가?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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