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월
봉암사의 상징. 지증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모신 전각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 창건주 지증 도헌스님의 부도로 883년(헌강왕 9)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하기단에는 면마다 사자를 돋을새김 조각하였으며, 상단을 괴는 테두리 에는 구름무늬가 가득하여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가릉빈가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극락음을 들려 줄 듯 천년세월을 무색하게 할만큼 사실적이다.
사리기
중대석.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비천상과 연꽃으로 장식된 사리함, 공양비천상
팔각 몸돌에는 우주을 세우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비를 새겼다. 양측면에는사천왕, 나머지 면에는 보살상을 표현하였다.
몸돌 사천왕
지붕돌 8각이며, 겹처마 집을 보고 있는 듯하다. 처마는 살짝 들려 있으며, 낙수면 우동은 두툼하고 귀꽃이 피어 있다. 상륜도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고은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이며 지증대사의 생애와 신라불교 선종사禪宗史를 설명하고 있다.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추고, 귀두에는 한 개 뿔이 돌출되어 있다. 앙련과 8마리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한 이수를 갖추고 있는 석비다.
비문에는 봉암사 창건 기록도 남아 있다. “건혜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충沈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보며, 의지가 담란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安?)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 뵙는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용곡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분신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 신축년(881)에 전 안륜사 승통인 준공과 숙정대의 사史인 배율문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봉암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
출생과 관한 비문 내용이다.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왕도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도헌이요 자는 지선이다. 아버지는 찬괴이며 어머니는 이씨伊氏)이다. 장경 갑진년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 임인년에 세상을 뜨니, 자자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체상을 보면, 키가 여덟 자 남짓했고 얼굴이 한자 쯤 이었으며, 의상儀狀이 뛰어나며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 잉태할 당시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기이한 행적과 숨겨진 이야기는 귀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 같아 붓으로는 기록할 수 없겠으나, 이제 사람들의 귀를 치켜세우도록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던 여섯 가지의 옳은 조행操行을 간추리고 나누어 나타낸다.
고은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입적에 관한 행장 내용을 보자. "겨울 12월 기망의 이틀 뒤에 이르러 책상다리를 하고 서로 말을 나눈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만하다. 이틀 밤을 넘겨 현계산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희야曦野로 옮겨 장사지냈다.”
비문에는 "진성왕 7년(893) 무렵 최치원이 글을 짓고 경주 분황사 노승 혜강慧江스님이 83세에 쓰고 새겼으며, 원주인 대덕 능선·통준, 도유나都唯那인 현일·장해·명선의 시주로서 갈碣을 세웠으며 서□대장군西□大將軍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한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 가은현장군加恩縣將軍 희필熙弼, 당현. 용덕龍德 4년(924) 6월 건립을 마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신라 불교사를 3기로 시기 구분하고 있는데, 제3기에 관한 서술은 일종의 신라 하대 선종사에 해당한다. 특히 도헌은 일찍이 신라 사회에 수입된 북종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하는 남종선과는 구분된다. 그리고 주인공인 도헌 이외에 당시 활약한 상당수의 선종 승려 이름을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신라 시대 선종사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최치원이 쓴 네 개의 비문. 사산 비명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산山이란 선종을 뜻하는데, 결국 사산 비문이란 선종 승려 및 사찰에 관한 네 개의 비문이라는 뜻이다. 즉,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 적힌 문장을 가리킨다. 대숭복사비는 파괴되어 비문만 전하고 있다.
금색전/2007년
금색전 비로자나/2007년
석탑은 보수중
삼층탑/2007년
879년(헌강왕 5)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건립할 당시 조성된 석탑일 것이다.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신라 석탑의 이중기단이 아니라 단층기단이라는 점이다. 단층기단이 경주의 변방 문경과 경북북부지방에서 먼저 출현하는(경주에도 단층기단 석탑이 있다)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구산선문 사찰에 석탑 상륜부가 온건히 남아 있는 절집은 봉암사 외에도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석탑이다.
왜 석탑이 대웅보전 중정이 아니라 금색전 앞에 자리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재는 대웅보전이 주전각이었지만 창건 당시에는 철불을 모신 금색전이 금당으로 추측된다.
조사전
선종사찰이 이전의 다른 사찰과 차이점으로 조사전. 철불. 부도 등을 말한다. 선종사찰 답사기에서 여러번 언급하여 여기서는 건너 뛰어야겠다. 봉암사 철불...출처 / 문경신문
지증대사적조탑비에 명기된 2구 철불 중의 한 분이 아닐까? 창비사.유홍준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봉암사 안내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철불 1구는 땅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근간에는 금색전에 있던 반파된 불상을 생각이 부족한 스님들에 의해 고물로 처리한 애석한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사진의 철불은 금색전에 봉안되었던 철불로 보인다.
남훈루
1.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불교가 한창 성할 때에 고승들이 중국에 들어가 달마선법(達磨禪法)을 받아가지고 와서 선승들의 사상과 실천을 반영하여 한국고유의 종풍(宗風)을 크게 일으켰으며, 신라 말에 남종선이 전래되어 가지산, 실상산, 동리산, 성주산, 사굴산, 사자산, 봉림산 등에 문을 열었고 고려대에 와서 수미산, 희양산문을 이룩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성립된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한다. 2. 구산선문의 배경 문무왕대로부터 혜공왕 대에 이르는 신라 중대의 불교는 화엄사상과 계율학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화엄사상과 같은 불교의 고급교학은 철학적 사유능력과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상층귀족 계통의 전유물이었다. 구산을 연 대부분의 선성들 역시 입당 전에는 화엄사상을 연마한 화엄종의 학승들이었지만, 그들은 화엄사상을 버리고 선의 길을 걸었다. 신라 하대의 불교도 학문적인 변쇄함에 빠져 있었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귀족적인 불교였다. 화엄경에서 묘사된 비로자나불의 법계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섬세하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도의 완성을 위한 비장한 보살도의 실천 또는 가슴 설레일 정도로 웅혼하다. 그러나, 이와같은 드높은 이상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사변적인 추상으로 발전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모든 사상의 운명인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격조 높은 치밀한 화염경의 주석서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경전과 주석서는 결국 한껏 아름다운 언어의 대백과사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공허한 해박적 번뇌일 뿐이다. 한때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사회에 운융과 통합의 원리를 제공했던 화엄사상이 결국 초극되고 해체되어야할 관념의 체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화엄의 이념적 극한을 돌파하고 직관의 실천을 중시한 신란 선문은 민중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하강시켰으며 그 하강은 민중을 포교대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신라의 수도 경주가 아닌 지방의 산간오지에 독자적인 선문을 세우고 나말여초라는 변혁기의 불교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골품제도를 고수하는 전제왕권이 한계에 이른 신라하대에 자주적인 인간성의 자각과 신분의 차별을 부정하는 불교의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전제왕권에서 소외된 지방호족 세력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선사들은 '불교문자 교외별전'의 가치를 내걸고 절대적인 인간 신뢰의 개성을 강조하는 선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입당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들은 이론보다도 마음의 직관과 일상성을 중시하는 대중적인 수행체제인 선에서 새로운 불교의 생명력을 보았던 것이다. 3. 한국의 선종전래 한국의 선 전래는 4조 도신에게 법을 받은 신라승 법랑(法郞)에 의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사회에 토착화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보리달마 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육조 혜능에 와서 남돈수와 북돈수로 나위어지면서 그 기세가 극성을 이룰 때 신라의 유학승들이 선법을 배워간 것이다. 육조혜능의 뒤를 이은 마조도일 또는 그 뒤를 이은 서당지장에게서 신라하대 고려초에 비로소 가지산 도의(한국 조계종의 종조로 봄)을 필두로 혜철적인 선사 등이 서당지장의 홍주종을 배우고 돌아오게 된다. ※ 선종의 법맥 불교는 크게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구분된다. 교종은 부처의 가르침, 즉 불경에 기록된 부처의 설교와 그에 대한 주석들에 근거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선종은 언어의 제약을 뛰어넘고(不立文字), 가르침 너머에서 전해오는(敎外別傳) 진리를 몸으로 추구하는 종파이다. 중국선종은 6세기 경에 인도의 보리달마에 의해 처음 유입된 이후, 혜가 - 승찬 - 도신을 거쳐 홍인을 기점으로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으로 나뉘어진다. 신수의 북종은 오래지 않아 법맥이 끊어지고, 혜능의 남종만이 번창해 5가(家) 7종(宗)을 내었고, 원나라,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다른 종파들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으나, 남종만은 오히려 번성했다. 한국에 유입된 선종의 초기 흐름은 두 갈래이다. 하나는 중국선종의 4조 도신(道信)의 법을 받고 귀국한 법랑(法朗), 그리고 그의 제자 신행(愼行)이 당나라에서 북종의 지공(志空)으로부터 법을 받고 귀국해 남악(현재의 지리산) 단속사(斷俗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개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종의 지장(智藏)의 법을 이어 귀국한 도의(道義), 홍척(洪陟), 혜철(慧徹) 등 조사선(祖師禪)의 흐름이다. 신라시대 선불교의 특징은 '북산의 남악첩'(北山義 南岳陟)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북산은 설악산을 의미하는데, 도의가 이곳의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간 일을 말한다. 또한 남악이란 지리산으로 홍척이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산의 남악첩'은 당시에 유행하던 화엄계 일색의 교종불교와 경쟁관계를 띠면서 새로운 불교의 흐름을 펼쳐 놓았다. 이들과 함께 신라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불교가 부흥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산문별 요약 1) 실상산문(實相山門) : 전북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 신라 흥덕왕 때 선사 홍척이 세운 선문. 헌덕왕때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으로부터 법을 받음. 흥덕왕때 귀국. 홍척은 가지산 조사 도의와 같은 스승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받았으나 도의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지만 산문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았으므로 구산선문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한 선문. 그의 문하에 편운과 수철 등 수백명의 제자가 배출, 법을 이음. 2) 가지산문(迦智山門) : 전남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의 보림사. 도의국사가 세운 선문. 도의는 일찍 출가하여 784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서당지장에게서 법을 이었기 때문에 혜능의 4대 법계이다. 또 혜능의 남돈선법을 가장 먼저 신라에 전한 선사. 그 정통 선법은 해동에서 계승하였다는 뜻으로 寶林寺라는 이름을 붙임. 서당지장의 법을 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신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염거에게 법을 전함. 염거에게 법을 전해받은 보조체징은 공주사람으로 일찍 출가하여 억성사에서 염거에게 배움을 받아 크게 얻은 바가 있었으며, 837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본 그는 師祖인 도의가 물려준 법 외엔 따로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당나라에서 840년에 돌아온 후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우고 많은 도제를 양성. 도의 국사 제자로 염거, 보조체칭이 있으며, 삼국유사의 저자 보각국사 일연도 가지산문의 승려이다. 3) 사굴산문(捨堀山門) : 강릉 하구정면 굴산사지 문성왕때 범일선사가 개창한 선문. 범일대사. 831년에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폄. 이곳에서 4년을 살면서 산문 밖을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그는 경순왕, 헌강왕, 정강왕, 진서여왕 등 국왕의 존경과 믿음을 받음. 일찍이 당나라에서 스승 염관제안으로부터 '진실로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은 바 있는 범일은 진귀조사설(眞을歸祖師設) 남김. 많은 제자 가운데 개청, 행적 등 9대 제자가 배출, 문풍을 크게 떨침으로써 사굴산의 선파가 이루어지게 됨.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위세를 떨쳤으며 고려 중기에 선을 중흥시킨 지눌도 사굴산문 출신. 4) 동리산문(桐裡山門) :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 신라 문성왕때 선사 혜철이 세운 산문. 혜철은 출가 후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814년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에게 공부. 그는 스승의 입멸 후 서주 부사사에서 3년을 공부하다가 839년에 귀국하여 동리산에 태안사를 세우고 선법을 펼침. 그의 문하에는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 여대사 등 수백의 제자가 있었으며 여대사가 스승의 선맥을 이어 태안사에서 법을 펴다가 광자 윤다에게 선맥을 전함. 윤다는 스승 여대사에게 법을 받고는 문풍을 크게 떨쳤으며 고려 태조의 존경과 믿음을 받음. 5) 성주산문(聖住山門) : 충남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지. 신라 문성왕때 선사 무염이 개창한 선문.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설악산 오색석사와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서 법을 얻음.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어 무설토(無舌土 ; 禪을 五惠門(오혜문) 無說門(무설문) 不淨不穢門(부정부예문)으로 나눈 선법을 말한다.)의 법문을 열어 선법을 크게 펼침. 그 문하에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남. ※ 무염국사는 ‘말에 얽매이거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으며 곧장 심법에 직입한다’는 '무설토론(無說土論 혹은 無舌土論·선과 교의 토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염국사는 “교(敎)는 문무백관이 그 직책을 지키는 일이고, 선(禪)은 제왕이 팔짱을 끼고 침묵을 지키고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며, 순수한 조사(祖師)의 견지에서 무상(無相) 무위(無爲) 무전(無傳)이라야 선(禪)이다”라고 주장했다. 6) 사자산문(師子産門) : 영월군 수주면 흥녕사(현재 법흥사). 신라말의 선사 쌍봉화상(雙峰和尙) 도윤의 제자인 절중이 헌강왕·정강왕·진성왕 때에 사자산(강원도 영월)의 흥녕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門風을 크게 선양함으로써 이루어진 산문. 사자산문의 조사가 되는 도윤은 825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도일의 제자인 남전 보원에게서 법을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다가 전남 능주 쌍봉사에서 크게 선법을 펼쳤으므로 쌍봉화상이라고 한다. 그의 뒤를 이은 절중은 헌강왕때부터 사자산 흥녕선원에 자리잡고 스승으로부터 이은 선법을 크게 선양. 그의 제자 가운데 여종(如宗), 홍가(弘可), 이정(理靖), 지공(智空) 등이 있다. 7) 희양산문(曦陽山門) : 경북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희양산 봉암사. 지증도헌이 개창. 도헌은 일찍 출가하여 혜은(惠隱)에게 선을 배워 그 법을 이음. 혜은은 尊範에게, 준범은 神行에게, 신행은 法朗에게서 법을 음. 신라의 법랑은 중국 선종의 제4조 雙峯 道信(580∼651)으로부터 법을 받음. 신라 최초의 선법 전래자 법랑(法朗)의 제자인 신행(神行 : 704∼749)은 중국으로 들어가 다시 北漸禪의 神秀계통인 志空에게서 법을 받아옴. 그러나, 도헌은 4조 도신의 법을 받은 法朗과 北宗계통의 志空 두 스승으로부터 선법을 받아 전한 신라 神行의 曾法孫이 됨. 도헌이 희양산 선문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치자 그의 법손이 되는 정진긍양(靜眞兢讓)이 선풍을 일으키는데 긍양의 비靜眞大師비에 의하면 희양산이 開山祖가 긍양이라고도 한다.
긍양(878∼956)은 국왕으로부터 받은 尊號가 奉宗大師(신라 경애왕으로부터)와 證空大師(고려 光宗으로부터)의 둘이다. 西穴院 楊孚에게서 배움을 받았는데 양부는 도헌의 법을 이은 제자. 긍양은 900년(효공왕 4년)에 중국으로 가서 谷山 道綠에게 법을 얻고 942년(경애왕 4년)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가 있던 康州 伯嚴寺에 머물면서 이름을 크게 떨쳤으며, 고려 태조 18년에 희양산으로 가서 이미 허물어진 봉암사터에 새로 절을 일으켜 鳳嚴寺라 하고, 제자들을 일깨워 佛祖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 逈超등의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희양산 선풍을 확립. 희양산문의 계보는 이와같다. 4조 道信 ― 法朗 ― 神行 ― 遵範 ― 惠隱 ― 智證道憲 ― 伯嚴楊孚 ― 精眞兢讓 ― 逈超 ― 圓空智宗으로 이어진다. 원공지종은 형초에게서 법을 받은 뒤에 중국으로 가서 永明廷壽로부터 心印을 얻고 國淸寺의 淨光 義寂으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귀국. 8) 봉림산문(鳳林山門) : 경남 창원 상남 봉림산사지. 신라말 선사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 현욱(玄昱)의 제자 심희(審希)가 효공왕(897∼912)때 봉림사를 세워 이루어진 선문. 봉림산문의 개조인 현욱은 헌덕왕(809∼826)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법을 받았다. 그 뒤 현욱은 837년에 귀국하여 처음엔 남악 실상사에서 지내다가 혜목산 고달사(高達寺)로 가서 선법을 크게 펼침으로부터 혜목산화상이라 불리웠다. 현욱의 뒤를 이은 심희(854∼923)는 시호가 眞鏡大師. 9세때 출가하여 혜목산으로 가서 현욱(圓鑑국사)에게 법을 배우고 효공왕때 봉림산에 절을 세우고 후학을 길러 종풍을 크게 선양. 문하에 景質·融諦 등 수백명의 제자들이 있다. 9) 수미산문(須彌山門) : 황해 해주군 금산면 광조사. 고려 태조 15년(932)에 이엄(利嚴 870∼936)이 선법을 펼침으로써 이루어진 산문. 이엄은 시호가 眞散大師이며, 12세에 출가하여 896년(진성왕 9년) 중국에 가서 운거도응의 문하에서 6년 공부하여 법인(法印)을 얻음. 911년(효공왕15년) 귀국하여 영동의 영각산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 스승의 예우를 받음. 태조(932년)는 해주의 북쪽 수미산 남쪽 기슭에 광조사를 짓게하여 이엄을 머물게 하자 많은 학인들이 모여 수미산문이 형성. 그의 문하에 處光, 道忍, 慶崇, 玄照 등 수백명의 제자가 그 선풍을 떨침. 위의 구산선문중 사굴산문(굴산사지), 성주산문(성주사지), 봉림산문(봉림사지), 수미산문(광조사지)은 터만 남아있다.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따라 잠시 걸으면 너럭바위가 펼쳐지고 그 곳에 마애보살님이 계신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은 환적 의천선사의 원불이라고 전해오며, 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 로 불두 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를 겸하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불두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얇게 처리하여 불두의 조각수법과 다르게 하였다.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가슴에 얹어 연꽃을 들고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무릎은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봉암결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봉암사 결사. 공동수행을 통한 청정 불교 회복을 소리없이 외친 봉암사 결사는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10여명의 수좌스님들이 청정한 수행을 실천에 옮기면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칙적인 외침’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결사의 성립과 내용에 이어 현대적 의미를 짚어봤다.
1947년 가을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이 총림생활에는 도서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당시 김법룡 거사가 소장하던 도서를 봉암사로 인수하면서 시작된 봉암사 결사. 이렇게 시작된 결사는 불법에 어긋난다며 우선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스님 스스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당시 봉암사 수좌스님들은 나무하고 물긷고 밭갈고 탁발하는 것을 일상화했다. 가사와 장삼, 발우 등의 개선도 시도했다. 이같은 제반규칙을 일컫는 ‘공주규약’에는 이외에도 참선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ㆍ자치 구현, 청규와 계율의 준수 등 17개 항에 달하는 규약이 포함돼 있다.
이같은 개혁을 시도한 것은 당시 불조교법이 파괴됐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왔다. 봉암사 결사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 으로 퍼져감에 따라 전국 각처의 수좌스님들은 봉암사에서 수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몰려들었다. 1948년 봉암사 대중은 30여명에 달했다. 청담, 성철, 자운스님을 축으로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응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스님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결사는 재가불자에게도 급속히 번졌다.
봉암사에 밀려든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살계 법회를 봉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스님-신도간 위계질서가 구축됐다. 재가자가 스님들에게 예를 표하는 삼배의례도 이 당시부터 정착됐다. 법회에서 법단 내 중단예불이 폐지됐고 〈반야심경〉 독송의례가 보편화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획을 긋게 된 배경이다. 보살계 법회 뿐 아니라 공양물의 평등성 등도 단적인 예다. 이처럼 결사는 불교의 근본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가운데, 당시 불교계 의 모순을 잡고 사상적 대안을 정립해 주었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미완성의 결사로 소멸되고 말았다. 2년여간 전개된 결사는 1949년부터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봉암사 인근에 빨치산이 출몰하면서 사찰 인근에 경찰이 자주 출입했고 급기야 수행생활에 지장은 물론 수좌스님들의 생명에 위협까지 받게했다. 끝내 1949년 9월 봉암사에 보관됐던 도서는 부산의 묘관음사로 이전됐고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봉암사 결사는 이처럼 외부의 요인에 의해 좌절됐지만 수좌스님들의 투철한 현실의식, 결사의 자생성, 규약에 나타난 원칙성과 규율성, 청정성, 간화선 중심 등을 표방했다. 현대불교사에 중요한 위상을 점한 이유도 여기에 근거한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 결사에서 시도된 의례의 지속성 등은 봉암사 결사가 한국불교에 남긴 상당히 의미있는 획으로 인식되고 있다.
마애불까지가 봉암사 답사의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를 안내한 분이 양말을 벗고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리더니 한겨울에 살을 애이는 계곡물을 건넌다. 아휴 전직 유격훈련조교 출신인가? 남자 체면 구기면서 등선화를 벗지 않고 건널 곳을 찾았으나 결국은 제일 마지막에 계곡물을 건넜다.
그분이 안내할 장소가 어디인지. 눈도 녹지 않고 가파른 길에는 얼음이 깔려 있어 위험 천만이지만 좀 전 계곡물에서 망가진 체면을 살릴려고 제일 먼저 밧줄을 잡고 올라왔다
멀리서 보이든 희양산 정상 하얀 바위아래 전각이 보인다.
백운대.흰구름이 머문 암자이다. 노둣돌 위에 검정고무신이 놓여 있거만 동안거중인 스님은 인기척에도 문을 열지 않아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관음전에는 작은 관음보살님을 모셨다.
그리고 다시 산길을 걷는다. 인적이 끊긴지 오래인듯 낙엽이 길위에 양탄자 처럼 쌓여 있다. 산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자꾸만 시선을 붙잡아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거짓말 처럼 눈 앞에 나타난 바위 아래 암자.
월봉 토굴
월봉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했던 토굴이다.
향곡스님 오도송
忽見兩手全體活 (홀견양수전체활) ....... 홀연히 두 손 보고 전체가 드러나니
겨우 몸을 누일만한 공간과 불단
태고선원
2시간 가량의 산행 후 돌아온 봉암사 선원. 스님은 안거중이고 넓은 중정에는 짧은 겨울 햇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인연 짓게 해준 김경식 교장선생님.우담바라님 그리고 동행한 연향님께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일주문/2007년 201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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