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사. 옛순례길 답사기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설레임. 그랬다 작은 설레임으로 출발한 길이었지만 여느 답사와는 달리 흥분된 마음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기억 저편 내유년의 한 장면을 찾아가는 발걸음이기 때문일까? 그리움. 가슴 저미는 이성간의 애틋한 그리움 못지않게 닫혀진 봉암사를 그리워 했다. 초파일은 개방했지만 그날은 할머니. 어머니를 원찰에 모셔야 하기에 보고픔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날이었다.
들리고파, 보고파 유려한 문장과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구구절절, 견강부회 논리를 전개하여 방문 목적을 봉암사에 메일을 송부했지만 한결 같은 메세지 "처사님. 초파일 날 인연을 지으십시요" 였다. 먼날 아주 먼날 내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날 희양산문이 내게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염원, 그 바램은 뜻밖에도 빨리 찾아왔다.
대구소재 한국불교대학에서 주관하는 문경 삼사 순례단의 일원으로 두어달전에 신청 후 몇날을 설레임으로 보내야 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설레이고 들뜨있던 마음이 희양산을 바라보고 진입하는 동안 차분하게 안정이 되었다.
열린 산문이라면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저자거리화된 저급한 사하촌의 요란함에 산문이 닫히기를 바랬던 가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젠가 봉암사 답사를 못해 아쉽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3년전 소풍을 끝내고 귀천하신 선친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다. "야야! 너 초교 입학전 봉암사에 여러번 들렸었다."
선친의 초임 발령지가 문경농협이었으며 나도 7살때 1년간 점촌에 거주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철길, 대장간, 일본식 가옥,만두집, 서울로 간다는 고갯길 등 우리집 주변의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다.
처음가는 답사지도 너무나 눈에 익어 깜짝 놀랐던 '데쟈뷰' 현상도 무수히 경험했기에 봉암사에서도 혹 기억의 실타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주의깊게 살피고, 유심히 관찰해보아도 아무런 단서를 찾을 길 없다. 흘러간 시간이 45년인데..."..2007.08.26 / 옛님의 숨결 725~727
그리고 2013년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다시 찾은 봉암사. 단체 순례길에 놓쳤던 경내의 부도를 만난 기쁨은 물론이고 백운암, 월봉스님 토굴을 들려 그 즐거움은 이루 형언 할 수 없었다. 경사는 겹친다고 했던가? 어제 저녁 문화재청에서 봉암사 일원을 명승으로 지정한다는 반가운 뉴스도 들렸었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은 가슴에 간직하고 두릅 새순이 돋을 즈음 해후를 기대하며 이번에는 문화재이야기를 발췌하여 올리겠다. (참고자료/돌베개 답사여행의 길잡이. 문경시청. 문화재청. 한국전통사찰관광정보.봉암사.창비사 나의문화유산답기기. 문경신문. Daum)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 도헌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쌓인 것이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 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신발끈을 동애매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일주문을 통과하여 경내로 진입하는 동선은 익숙치 않다. 경내 진입 후 부도전으로 먼저 방향을 잡았다.
공양간 맞은편 산길을 올라서면 눈에 들어 오는 조선조 석종형부도와 원구형 부도. 원구형 부도는 월봉스님의 부도이다. 월봉스님은 2011년 세수 101세로 입적하신 근세의 대선사이시다.
월봉스님이 머무셨던 봉암사 월봉스님 토굴
석종형부도
부도는 땅 위로 드러난 사각 받침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두고, 큼지막한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한다. 탑신의 밑둘레에는 선으로 새긴 듯한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전한다.
많은 사람들이 유홍준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와 더불어 답사의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돌베개사의 답사문화 길잡이에 설봉대사 부도로 설명되어 있어 넷상에는 대부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봉암사 사적기에 목우자牧牛子 즉 지눌知訥의 부도, 태고 보우太古 普愚의 부도라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 공인된 설은 아니어서 지정명칭이"봉암사 석종형 부도"이다.
상봉대사탑비
정진대사 부도비 옆에 자리한 부도탑비. 역시 앞에서 언급한 돌베개사의 책에 설봉대사 부도비로 글은 백하 윤순의 작품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책을 검토 없이 배낀 많은 여행작가 또는 답사기에는 가공의 인물인 설봉대사부도비로 무분별하게 인용되고 있다.
문경시청 학예사 엄원식님이 문경신문(2011.8월)에 올린 기사를 살펴보자. 상봉당대사의 비는 봉암사 일주문의 개울 건너편에 외로이 서있다. 원래 자리인지는 모르지만 지증대사적조탑비와 정진대사원오탑비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위치이다.비문은 대제학을 지냈고 대문장가인 이덕수(李德壽:1673~1744)가 찬하였다. 대체적으로 비문을 짓게 될 때는 대상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거나 잘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덕수도 상봉당과는 분명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서로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상봉선사 비는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적조탑비나 정진대사원오탑비처럼 귀부와 이수부분이 화려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물론 시대적인 양식적 차이가 있겠지만 창건주와 중창주와의 차별을 두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도비는 시대를 거듭하며 작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양식적인 면도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현격히 소략해 지는 부분이 많다 할 수 있다. 특히 상봉선사비의 비신 부분은 중간부분이 갈라진 것을 보수해 놓았다. 비신의 색깔이 틀리는 것은 아마도 비신이 갈라진 후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상봉대사(광해군13. 1621 - 숙종35. 1709) 정원은 속성이 김씨이다. 부는 김계선, 조부는 김세철인데 모두 유교를 업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며 꿈에 해월을 감득하고 명나라 천계 7년(天啓 7, 조선 인조 5년 정묘 11월)에 영변부의 중양마을에서 탄생하였다.일찍 선천장로에게 머리를 깎아 구족계를 받았고, 완월과 추형 두 대사에게서 경론 공부하였으며, 30세때 풍담대사 의심에게 법을 받았다. 그 뒤 나라안의 명승지와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니, 따르는 학인이 매우 많았다.
상봉대사 부도? 환적당 부도
전傳상봉대사부도
부도탑비까지 조성한 상봉대사의 부도는 어디에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조선조 석종형 부도는 원래 위치가 아니어서 일단 제외하면 환적당 지경탑과 나란히 서있는 석종형 부도를 상봉대사부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돌베개사 책자의 오류도 어쩌면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1권 초판본 봉암사 편에서 오타(?)로 발생한 문제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탑비는 상봉대사 탑비로 설명했으면서도 부도를 설명하면서 난데없이 설봉대사를 언급하였다. "상봉선사가 이곳에 주석하여 경전에 주석을 달고 목판본을 찍어내기도 하였는데 화재로 타 버리고 만다. 설봉의 부도는 환적당 곁에 있는 초라한 석종형 부도라고 생각되며 봉암사 일주문 옆 계곡위에 두동간 난 비가 그분의 비이다."
직접 답사하하였으나 유홍준 교수 글의 오타를 그대로 배껴 돌베개사에서는 상봉대사탑비와 부도를 설봉대사로 둔갑시켰으며 우리나라의 수많은 잘 나가는 답사단체. 여행전문가, 답사꾼들은 다시 마구잡이로 카피하여 가공의 인물 설봉대사를 탄생시킨 것이다.(나의 주관적인 해석이므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환적당 지경탑
부도 하기단에는 8각에 맞추어 복련을 새겨두었다. 중대석과 상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 한 면에는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이라 새겨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기왓골이 없는 옥개석은 윗면에 여덟 모서리 선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2단의 8각받침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옆에 있는 함허당 부도를 모방한 조선시대의 흔치 않은 팔각원당형 부도로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양식에 충실한 양식이다.
환적당(1603∼1690). 자는 지경이며 16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31년간 곡식대신 솔잎·밤·대추 등을 먹으며 지내었다. 88세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을 마치었다. 부도는 봉암사 외에 춘천 문수사, 충주 월악산 덕주사, 대구 용연사, 태백산 각화사, 거창 연수사, 가야산 해인사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정골은 의성 대곡사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함허당 득통비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로,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 하였는데,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함허당득통지탑(涵虛堂得通之塔:) ’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액자 모양의 윤곽을 두른 후 그 위아래에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지붕돌 윗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는 양끝이 위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일부 없어진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중엽에 세운 것으로, 당시의 8각 부도 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함허당의 부도는 봉암사 외에도 가평의 현등사, 강화도의 정수사, 평안도 자모산 연봉사 등 네 곳에 세워져 있다.
조선 전기의 승려. 본관 충주. 속성 유 이름 수이(守伊). 법호 득통(得通). 당호 함허(涵虛).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회암사로 가서 무학왕사에게 법요를 배운 후, 여러 곳을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에 가서 홀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 뒤 공덕산의 대승사, 천마산의 관음굴, 불희사 등에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자모산 연봉사에 들어가 함허당(涵處堂)이라 이름하고 3년간 수도를 계속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가서 여러 성인들을 공양하고 월정사에 있을 때 세종이 청하여 대자어찰에 머물렀다. 4년 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공덕·운악 등 여러 산을 편력하다가 31년 희양산에 이르러 봉암사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저서에 《원각경소)》 《금강경오가해설의》 《현정론》 《반야참문》 《윤관》 등이 있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의 시문집. 규장각본은 목판본, 국립중앙도서관본은 활자본. 1권. 표제는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1988년 경인문화사에서 간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에 실려 있다. 1440년 문경 봉암사서 간행. 전여필의 서문과 제자 야부의 행장이 있다. 1940년 월정사에서 활자본으로 중간하였는데, 여기에는 권상로가 첨부한 <금강경서>와 <법화경후발> 및 출가시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행장, 천가법어 27편, 찬·송·가·음 12편, 시문 92수, 시중·권념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가법어·제문·헌향·수어 등은 모두 죽은 자를 위한 법문이나 제문이다.
<원각경송>과 <법화경송>은 《원각경》과 《법화경》의 중심 내용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종풍가>는 7언 20구로 된 게송으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사상적인 풍조를 축소해 놓은 듯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경음>은 4언 80구로 부동지, 평등성지, 일초칙입여래지에 이른 자신의 심경을 가식없이 표현하였다. 그는 <미타찬>과 <안양찬>에서 아미타불에 대한 염불의 효험을 극구 찬양하였다. 조선 전기 배불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현정론》 《유석질의론》 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념적으로 유교와 불교의 공존을 모색하고자 노력했음에도 수많은 사원들이 헐리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승려로서의 심회를 노래한 시가 <유감(有感)>이다.
有感유감...함허당
聞說諸方壞佛廟 문설제방괴불묘 無端兩眼淚潸然 무단양안루산연 但慙我輩都無德 단참아배도무덕 合掌傾誠敢告天 합장경성감고천
어쩔 수 없이 흐르는 두 눈의 눈물 우리들 덕 없음 부끄러울 뿐이라 장으로 우러러 하늘에 호소하는 정성.
서암종정 부도와 부도비
초계종 8대 종정 서암스님 우연히 산에 올랐다가 문득 스님이 되고픈 소년이 있었다. “스님, 저도 절에서 살고 싶어요.” “중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소년은 끊질기게 스님에게 매달렸고 드디어 허락을 받는다. 3년 동안 절에서 머슴살이하는 조건으로. 이리하여 서암 스님은 불가와 인연을 맺는다.
1914년 경북 영주에서 나신 서암 스님은, 1935년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8·15광복 전에는 금강산 일대의 제방을 두루거쳤고, 철원의 심원사에서는 강사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봉암사 조실을 거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지냈다.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봉암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87세, 법랍 68세.
정진대사 원오탑
서암종정의 부도를 지나 내려서서 고개를 들면 산자락에 보인다. 봉암사 경내에 있는 지증대사부도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에 회자되는 것 중의 하나가 속편이 더 좋은 영화는 없다고 한다. 또한 남도 부도 순례길에 연곡사를 가장 뒤에 답사하라는 이야기도 이제는 진부한 레퍼토리가 되어 버렸다. 미인을 먼저 만나면 다른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논리지만 글쎄다? 우리 할머니의 빛나는 어록중의 하나가 "남자는 열 여자 마다 않으며, 숫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아직 밉고 못생긴 옛님을 보지 못했고 숫가락 들 힘만 있어도 옛님을 찾을 것이다. 옛님은 다~~~ 좋다!!!
이거야원. 이야기가 오끼나와로 빠지는 구먼!!! 나와같은 무지렁이에게는 심미안이 없어 구분이 모호하여 평가할 능력도 없지만 현재의 자리로 평하자면 지증대사 묘자리보다 훨씬 더 좋다.
정진대사(878~956) 원오탑. 부도는 고려초기의 양식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한 팔각원당형이다.정진대사가 입적한 해인 956년(고려 광종7)과 정진대사원오탑비가 세워진 965년(고려 광종16)에 걸쳐서 10여년의 세월을 두고 세워졌다.
하대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의 각 면에는 1구씩 안상이 조각되었고 안에는 귀꽃이 피어 있다. 상단에는 떠다니는 구름문양이 새겨진 갑석이 놓여 있다.갑석위에는 다시 구름 문양이 조각된 1단의 괴임대가 있고 위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했다. 표면에는 또한 구름문양을 새겨 넣었다.
달?
해?
상징성은 무엇일까? 칠성여래와 약사여래의 협시로 일광. 월광보살이 봉안되는 사례로 해석하면 될는지 모르겠다.
여의주를 문 용
사리기
16개의 앙련을 새겨 넣은 상대석 부도의 중앙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로 모서리기둥과 난간이 조각된 괴임대가 탑신을 받들고 있다.
탑신의 높직한 8각 몸돌은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조각이 있고, 앞쪽면에 자물쇠를 모각하였다.
기와골을 한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연꽃봉우리의 앙화석과 보륜만 남아 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
965년(광종16)에 건립되었다. 비는 고려 초기의 석비형식으로 귀부와 이수는 통일신라 양식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가 장단열이 썼다. 글씨는 2cm 정도 크기의 해서체이다.장단열은 고려 광종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그가 쓴 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와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의 명문을 통하여 한림원서박사를 거쳐 군부경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폐허가 된 봉암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정진대사 긍양(878~956) .이몽유가 찬한 그의 비문을 보자.“대사의 휘(諱)는 긍양이요, 속성은 왕씨, 헌강왕 4년(878년) 공주에서 출생. 조부는 숙장이요, 부는 양길이니, 아울러 인을 받들고 의를 밟아 자기의 마음에 사무침이 있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덕과 공을 많이 들이어 후손의 업적에 끼쳐서 점수하는 것을 귀중히 여긴지라, 근골을 수고로이 하여 복직하고 상설과 같은 청심을 품어 주리에서 장자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고 원근에서 어질다는 칭찬을 들었다.”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유학을 공부하다가 한계를 느껴 20세에는 계룡산 보원정사에서 중이 되고, 이듬해에는 서혈원 양부선사의 제자가 되니, 양부는 지증대사의 제자였으므로 훗날 그가 봉암사로 오게 되는 계기를 여기서 맺었던 것이다.23세 되는 900년 중국에 유학하여 24년 후인 924년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선사가 주석하던 강주 백엄사에 있다가 935년 봉암사로 오게 되었다.
귀부
극락전
지난번 단체 순례 동선에 따라 움직여 놓였던 봉암사 부도를 주마간산식으로 뵙고 다시 경내로 들어 왔다. 막간을 이용하여 꿀맛같은 점심 공양은 답사의 백미였다면 자랑일까? 오버일까?
극락전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법당으로서는 2층 전각이다. 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극락전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처 지금에 전한다. 서까래 모양이나 건물의 구조가 특이하다.내무에는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아미타불상과 1904년에 조성한 극락회상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상층의 중앙에는 석조 노반과 보륜을 가설하여 전체적으로 탑의 형식을 채용하였다.
아미타불
봉암사 극락전은 건립, 소실, 중건 등을 거쳤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실시된 정밀실측과 문헌조사를 통해 봉암사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유일하게 신라때부터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로 확인 되었다. 극락전은 879년(헌강왕 5)에 지증국사가 창건시 전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935년(태조18) 정진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임란을 거치면서 극락전과 일주문만 남기고 그 많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산령각 대웅보전
정면 7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치미에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으며, 전각 앞 4마리의 사자상이 수호를 하고 있다. 창호에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꽃문살로 장식되어 있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처리 하였다. 안에는 근세 제작된 후불목각탱을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신중목각탱, 석가불좌상, 관음입상, 대세지입상, 소종 등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관음과 대세지를 협시로 모셨다. 주불과 대세지보살은 근세에 조성되었으나 관음보살은 조선전기의 소조불로 전한다.
대웅전 앞 2기 노주석
석조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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