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문경...새재

임병기(선과) 2013. 11. 20.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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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치인리 마애불 번개 취소

 

오래전부터 벼루었던 새재길을  걷기로 했다.

 

새재는 입구 박물관 석탑과 1문 까지만 답사했었기에 이번에는 3문까지 다녀왔다.

 

편도 6.5km

 

가을을 민끽하고 돌아왔다.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 새로 된 고개의 「새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옛길 박물관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로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명승 제32호)가 있고, 우리나라 최고(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 옛길의 백미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명승 제31호) 또 영남대로 상의 허브 역할 담당했던 유곡역이 있습니다.

 

이러한 옛길관련 문화유적은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습니다. 옛길박물관은 이러한 문경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잘 나타내기 위하여 건립된 박물관으로 당초 향토사 중심의 문경새재박물관을 리모델링하여 2009년 재개관 하였습니다.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옛길박물관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지니고 다녔으며, 괴나리봇짐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과거길로 유명한 문경새재를 조망하면서 옛날 길 위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여행기와 풍속화, 중요민속자료 제254호인 문경 평산 신씨 묘 출토복식과 같은 문경의 문화유산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복원된탑.  사진 앞쪽 석탑은 문경읍 마원3리 우무실 마을 뒤편 금학사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문경새재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아래 탑도 금학사지 탑으로 알려져 두 기 탑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1층 몸돌과 옥개석은 본래 부재이며 받침은 3단이다. 몸돌에 우주를 모각하였고  초층과 2.3층 몸돌, 체감과 높이가 부조화로 키큰 서양여인이 개량한복을 입고 굽 높은 힐을 신은듯 어색하다. 2.3층 몸돌 높이를 줄이고 너비를 줄이는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초층 몸돌의 엔타시스로 미루어 5층탑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뒷쪽석탑. 금학사지 탑으로 알려져 있다. 사지는 문경읍 마원리 봉명산에 있었던 사찰로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금학사지에서 문경서중학교로 옮겼다가 옛길박물관 뜰로 이건했다. 멸실된 지대석위에 하기단 갑석,상기단 면석 갑석, 초층 몸돌, 1~2층 옥개석만 남아 있다. 기단면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 옥개받침은 초층이 4단, 2층은 3단이다. 초층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겼고, 상륜은 멸실되었다.고려시대 탑으로 보여진다.

 

1관문 주흘관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정면 3칸과 측면 2칸 협문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측이 400m로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오픈세트장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한국방송공사가 2000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위치해 있다. 19,891평의 부지에 궁 2동(고려, 백제), 기와 41동, 초가 40동이 들어서 국내 최초의「고려촌」이며 세계에서 5번째 안에 드는 야외 촬영장이다.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후백제의 왕 견훤의 출생이 문경 가은이며, 무엇보다 촬영장 뒤편의 병풍처럼 둘러선 조령산이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공사비는 한국방송공사가 세트건립비 29억1천8백만원을 투입하는 등 모두 33억4천8백만원을 투자 하였으며 한국방송공사가 10년간 무상으로 사용후 문경시에 기증토록 되어 있다.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촬영하였다.

 

 

선정비.불망비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성황당

지름틀 바우

 

기름을 짜는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교귀정

 

문경읍 상초리 조곡관과 주흘관의 중간지점인 용연위에 있다. 체임하는 신구관찰사의 교인처로 성종조 신승명이 건립했다. 유지와 김종직의 시가 전해 왔으며 1999년 10월 문경시가 중창하였다.

 

 

 

交龜亭上傲坤 교귀정상오건곤 : 교귀정에 올라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

斗覺상華點빈根 두각상화빈근 :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一水宮商風自激 일수궁상풍자격 : 한 가닥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부르고

千巖圖畵日將昏 천암도화일장흔 : 일천 바위는 그림 같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

時因寫景窮飛鳥 시인사경궁비조 : 내가 시로써 정치를 읆으매 날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漏蔿傷懷양斷猿 루위상희양단원 :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원숭이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

南路己消雙근후 남로기소쌍근후 : 남쪽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그모양 사라져만 가는데

明月今夜宿何村 명월금야숙하촌 : 아- 달 밝은 오늘밤은 어디에서 머물 것인고.

 

용추

 

새재 길 옆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경승지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에 의하면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在鳥嶺桐院西北一里, 有瀑布四面及底背石, 其瀑不可測, 俗傳龍騰處』

 

바위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는 "구지정 숙종 25년(1699)에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곳의 경관을 읊은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추...퇴계 이황

  •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를 해치니
  •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 갠 날 우뢰 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를 알리.
  • 면곡 어변갑(綿谷 漁變甲)
  • 큰 바위 힘이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네
  • 산 속을 물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었네.
  • 성난 듯 낭떠러지 입구따라 떨어져 옹덩이 되더니
  • 그 아래엔 먼 옛적부터 이무기 숨어 있네.
  • 푸르고 푸른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었네
  • 나그네는 유월에도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네.
  • 깊은 웅덩이 곁에는 국도가 서울로 달리고 있어.
  • 날마다 수레며 말굽이 끊이지 않는다네.
  • 즐거웠던 일 그 몇 번이며 괴로웠던 일 또 몇 번이었던가?
  • 하늘 땅 웃고 어루만지며 예와 오늘 곁눈질하네.

꾸구리 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바위를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김수근 타루비

 

문경읍 상초리 초점 교귀정 부근에 세워진 김수근의 타루비는 비신 높이 143㎝, 길이 55㎝, 두께 30㎝이고 비부는 높이 48㎝, 가로 108㎝, 세로 84㎝이다. 팔작형이며 비개는 비신과 함께 6.25의 총흔이 남아 비문도 일부가 훼손되어 있으나 이 비는 1855년(철종6) 9월에 안동부사로 재직 시 주휼 선정한 공로로 안동의 38방의 소민들이 세운 비이다.

 

김수근은 1798년(정조22)에 태어나서 1854년(철종5)까지 생존했던 현종 때의 중신으로 자는 회부) 호는 계산노초 시호는 문정, 본관은 안동이다. 목사 인순의 아들, 철종의 장인 문근의 형으로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이 되고 1834년(순조34) 문과에 장원급제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죽은 뒤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병국, 병학은 재상이 되고 동생 문근은 영은 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연보가 있다.

 

 

비는 상초리 산42-8번지에 있다.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2관문 조곡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 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關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草谷城 : 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하였다.그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지붕이다.홍예문은 높이가 3.6m, 길이 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책바위

 

문경새재 조령관에서 조곡관방향 500여미터 지점 책바위. 책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인근에 살던 어느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치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몸을 고치고자 수소문 끝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으니 "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라고 일렀다.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허약하던 몸이 어느새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 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미륵불?

제3관 조령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숙종 34년 : 1708) 때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성벽의 높이는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새재를 지나는 길에...점필재 김종직

 

나라님 부름 받아 새재를 넘자니

 

봉우리 꼭대기에 겨울 빛이 차갑구나.

 

벼슬길로 돌아가는 부끄러운 이 마음

 

개울 바닥 뒹구는 마른 잎 같아라.

 

대궐 안에 아부꾼들 멀어지면

 

조정엔 오가는 말 화락하리라.

 

근심과 걱정으로 십 년을 보냈건만

 

날 뛰는 금수무리 잡아내지 못하였네. 

 

 

산신각

 

문경새재 아리랑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 새재 넘어 갈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2013.10.12

문경새재도립공원 홈페이지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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