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보다 1시간 먼저 도착. 빈 들판의 당간지주가 보고싶어 가는 도중에 황복사지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답사기도 조심스럽지만 경주에 소재하는 문화재에 대한 글은 걱정이 앞선다. 자료도 넘쳐(?) 나거니와 전문가들이 많고 각종 단체도 왕성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역시 30년전 답사 초기에 경주에 빠져들어 오랫동안 마냥 좋았었고 다른 지역은 안중에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경주의 문화재가 대한민국 전체의 문화유산은 아니거늘... 아직도 모천회귀의 꿈을 꾸지만 연어 처럼 쉽게 돌아올 여정은 아닌듯하다. 황복사지석탑에 대한 2006년 글이다. 그때도 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듯 보인다. 서라벌은 어렵다!!!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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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글
의상대사. 원효와 더불어 답사 현장마다 만나는 화엄종의 종조다. 스님은 당의 침공을 감지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 부석사 창건을 비롯 백척간두 신라를 구하고 통일신라 통치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그런 치열했던 삶을 살고 간 의상대사가 약관의 나이에 구족계를 받은 사찰이 황복사지라고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高僧).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 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랐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 어 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청하였다. 지엄은 전날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鳳) 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 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 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 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 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그뒤 부석사 (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 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 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 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 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 (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 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 (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 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 신림(神琳)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 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법융의 <법융기(法融記)>, 진수의 <진수기(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 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 (一乘發願文)> 등이 있다.]....선사열전
저문 태양에 반사되는 형언할 수 없는 저 빛을...
황복사는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706년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한 신라황실의 원찰로 자리매김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앞가슴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데, 그 안에 대각선으로 걸쳐 입은 속옷이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위자료는 문화재청 자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황복사지 삼층탑에서 발견된 두개의 국보 답사는 우리님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2006.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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