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번 들렸지만 이른 아침에는 처음이다. 보문사지 당간지주 뵈러 가는 도중에 멀리서 한 컷!!!
진평왕 신라 제26대 왕(재위 579∼632)으로 위화부 등의 관청을 신설해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으며, 불교를 진흥시켰다. 성은 김(金)이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백정(白淨/伯淨)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백정왕이라고도 한다. 징흥왕眞興王)의 손자이자 동륜(銅輪)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딸인 만호(萬呼, 萬內라고도 함) 부인이다. 왕비는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고, 승만부인(僧滿夫人) 손씨(孫氏)를 후비(後妃)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고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지가 밝고 활달하였다(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沈毅明達)”고 기록되어 있다.
2013.01.19
====================================================================================================== 2006년 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편. 구입한 날짜(1993.06.23)가 선명한 책을 오랫만에 펼쳤다. 소불선생과 유홍준 청장의 대화를 되짚어 보기위해서다.
-.자네 경주에서 좋아하는 유물을 차례로 대보게 -.석굴암.석가탑.고선사탑......
소불선생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장항사 절터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에밀레종 치는 거 직접 들어보았나? -.아니요 -.자네, 경주를 말하려면 꼭 이 세가지를 잘 음미해야 할 걸세.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세가지일세.
그리고 7년이 지난 어느 봄. 경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창밖의 보름달이 줄기차게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버스에서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바로 그것이었다. 진평왕릉은 7세기 전반, 장항리사지는 7세기 후반, 에밀레종은 8세기 중반 신라문화의 특질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람들 처럼 이책을 들고 유홍준교 신도가 되어 많은 곳을 답사했고. 사상누각에 불과하겠지만 오늘날 내집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자양분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은 진평왕릉을 들어서는 순간 가슴 뭉클한 기운이 전신을 감싼다.신라문화 특질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떼어내고 이시간 사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하는 해질녘 분위기, 잠시후 답사를 마치고 헤어져야 한다는 우리님들 마음속 간절한 그리움 때문일까?
화장기 없는 얼굴이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기품이 서린 고운 자태의 완숙한 40대 여인? 제기럴 씰데없는 군더더기군!!
진평왕(579~632). 오랜 재위 기간 만큼 숱한 설화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불교가 공인된 후 불교식 왕명을 가진 왕중에서도 딸인 선덕여왕과 함께 신라불교 황금기 기틀을 잡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공고히 다진 왕이다.
신라 왕은 초기 혁거세~지증왕까지는 신라고유 왕호를, 불교가 공인된 후에는 불법을 상징하는 法, 진리를 의미하는 眞, 善(禪)등 불교식 왕호를 사용하게된다. 즉 법흥-진흥-진지-진평-선덕-진덕의 왕호이다.통일후에는 당나라식 왕호를 붙였다고 한다.
왕중에서도 진평왕이 불심이 가장 돈독한 왕으로 여겨진다. 진평왕은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인 백정을 자신에게 붙히고, 부인을 마야부인이라 했으니 왕자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가?
근데, 남자가 더구나 전제권력을 손에 쥔 왕이 겨우 딸만 셋을 두고 말았을까? 부처의 아버지라고 여긴 왕이 왕자(부처)도 얻지 못한 것은 산부인과 문제인지 비뇨기과 문제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밭은 지천에 늘려 있었을텐데...
진평왕은 백명 왕자 부럽지 않은 세딸을 가졌다. (여러자료에서도 통일되지 않았지만) 첫째 덕만공주 선덕여왕, 둘째 김춘추 어머니 천명공주, 세째 백제 무왕 부인 선화공주가 그들이다. 세공주 모두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얼굴이다.
통일후 능 조성이 화려한 패러다임으로 변화하지만 선덕여왕은 왜 선왕의 능을 들판 가운데에 모셨을까? 선덕여왕이 죽기전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유언은 혹 진평왕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이런 상상은 어떤가? 진평왕은 신체적 장애로 인해 세명 공주를 얻은 후 후손 잉태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생전에 석가모니 아버지로 자칭하며 권력을 휘어 잡았던 왕으로서 왕자를 얻지 못한 것은 이미지 훼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름달이 교교히 내려 앉고, 귀뚤이 노래하는 어느 만추의 늦은밤 반월성 왕의 침소로 진평은 덕만공주를 은밀히 불러 훗날을 도모할 비기를 전해준다. "덕만아. 애비가 석가모니 아버지가 되는 길은 덕만이 네게 달려 있다. 네가 죽은 후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면 나는 저절로 정반왕이 된단다. 그리 해줄수 있겠지?
진평왕릉. 역사.설화 그 무엇보다 내게는 달콤한 추억이 남아 있는 첫키스의 장소다. 1979년 5월 어느날 밤... 2006.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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