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강진...병영성 홍교

임병기(선과) 2012. 12. 7.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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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兵營은 군사주둔지가 그대로 지명이 되어 버린 예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자. "정식 명칭은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휘하의 거진巨鎭과 제진諸鎭을 통할했다. 고려 말엽의 도순문사영都巡問使營에서 비롯되었으며, 병마절도사의 전신인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조선 건국 직전에 설치된 이래로 그 근무지를 병영이라 불렀다. 병영은 각 도 국방의 요충지에 위치한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요새화된 성곽 안에 병마절도사의 하부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전임직으로서 임명되는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에만 병영을 설치했으며, 전임직 병마절도사가 없는 도는 겸병마절도사인 관찰사의 감영 소재지에 병영기구를 설치하여 주진으로 기능하도록 했다. 한편 도내에 전임직 병마절도사가 2명이 임명되는 함경도·경상도에는 각각 2개의 병영이 설치되었다.

 

각 도의 병영 소재지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조선 전기에 충청도는 해미, 전라도는 강진康津, 경상도는 울산(좌병영) ·창원(병영), 평안도는 영변, 함경도는 경성(북병영)·북청(남병영)이었으며, 조선 후기에 충청도는 충주, 경상도는 진주, 황해도는 황주, 평안도는 안주였다. 병영에는 병마절도사 이외에도 그의 참모격인 우후虞候와 평사評事, 각급 군관과 진무鎭撫 등 장교층이 근무했고, 수백 명의 직속 군사력이 배치되었으며, 영리를 비롯한 아전·공장·노비 등도 수백 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같이 방대한 기구를 통해 병영이 각도 육군 사령부로서 도내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행정을 총괄한 까닭에 그 재정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다량의 둔전屯田이 경영되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막대한 환곡還穀이 소속되어 운영됨으로써 커다란 폐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밖에 평안도·함경도에는 국방상의 필요에 의해 병마절도사가 병력을 이끌고 적침이 우려되는 시기에 최전방에 나가 주둔하는 이동 사령부로서 행영이 설치·운영되었다."

 

전라도 강진 병영. 조선 건국후 왜구의 침입이 그치질 않아 태종 17년(1417)년에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있던 전라도 병마 도절제사를 바다가인 도강현(병영면)으로 옮겼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강진 병영이 함락되어 성을 쓸 수 없게 되자 전라도 병영은 선조 32년(1599)에 장흥으로 옮겨졌다가 5년만에 다시 강진으로 돌아왔다. 그후 500여 년 동안 호남을 지켜온 군사 요충지였다. 갑오농민전쟁때(1894)는 농민군이 병영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듬해에 강진병영은 폐영되었다.

 

 

병영 홍교는 병영의 출입문이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 많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한 강에 설치된 무지개虹橋 다리이다. 병영의 관문에 설치된 홍교는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된 시절과 달리 예전에는 지역 제일의 장인, 자금, 인원이 총동원된 대단위 인프라 구축 사업이었을 것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홍교는 일명 배진강 다리라고도 하는데,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무지개처럼 쌓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리 하부 중앙에는 건축물을 더욱 공고하는 기능의 용두를 돌출 시켰다. 용두는 기능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용의 아홉 아들의 한 명인 '공하'로 물을 따라 잠입하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용두는 선암사, 송광사,여수 흥국사, 고흥 홍교, 논산 미내다리.원목다리, 벌교 홍교 등 우리나라의 많은 홍교에 설치되어 있다.

 

축조연대는 숙종 무인(1698년)에 가선동추, 경술(1739년)에 숭록대부가 된 류한계의 금의환향을 기념하여 양한조가 감독, 준공하였다고 한다. 국가의 재정지원이 아닌 민간에 의해 건설된 내역은 무엇일까? 병영성 근처 부잣집의 머슴인 유씨 총각이 주인 딸과 사랑에 빠져 아들 '류한계를' 낳았으며 그가 훗날 숭록대부가 되어 금의환향한 것을 기념으로 구축했다고 한다. 유한계는 실존인물이며 그의 부친은 유신방이며 장흥 출신의 학자 유호인의 후손이다. 유한계는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에 오른 것이 아니라 107세까지 장수하여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790년 숭록대부가 되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장승. 홍교의 수문장이다. 예전 장승은 도난당하고 복원된 장승이다. 장승도 병영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하며 사악한 무리들의 출입을 원천 봉쇄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타 장승처럼 무섭기는 커녕 개구장이 모습이다.

 

병영 민초들은 정월 보름날 목화씨앗을 가지고 홍교로 간다. 그리고 다리 위를 자기의 나이 수만큼 걸어 다니면서 씨앗을 사방으로 뿌렸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민속이 되어버려  의미가 전해 오지 않는다고 한다. 민속만 사리진 것이 아니라 홍교도 다리의 기능은 신작로에 넘겨주고 이제는 아득히 옛추억에 젖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병영면에서는 민속을 복원하면 어떨까? 물론 목화씨를 뿌린 상징성도  알아내고 행사도 재현한다면 홍교도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20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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