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강진군

강진...병영성.성동리 은행나무.병영마을 옛담장

임병기(선과) 2012. 12. 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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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 병영성은 조선조 500여년간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던 곳으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것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 장군이 축조한 것이며, 꿈속에 계시를 받아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 하였다고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총 연장은 1,060m이다.


1599년(선조 32) 도위수 권율의 상소로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당초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제주도에서 표류 중이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7여 년 동안을 억류되어 있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복구가 되지 못하고 폐영되었다. 전라 병영성은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어 오다가 1997년 국가사적으로 다시 지정되었다.

 

진남루 옹성

 

 

[전설의 보부상 병영상인]병영성에 사람과 물자가 몰렸다 ...주희춘 기자 ju@gjon.com

 

강진읍에서 병영면 소재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옛 병영상고 교정이다. 멀리 수인산 봉우리를 뒤로하고 위풍당당히 서있는 모습이 당당하다. 병영상고는 1965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4천89여명의 학생들을 배출하고 지난해 병영정보고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이 조금한 면 단위에 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병영상고의 설립은 병영주민들의 삶속에 상업이란 업종이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병영주민들이 유치위원회를 구성해 "병영에 반드시 상고를 세워야 한다"고 정부를 상대로 집요한 유치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병영의 상업역사는 조선 태종 17년(1417년) 전라병영이 이곳에 설치됐을 때부터 시작됐다. 이어 조선왕조 500년을 지나 일제시대를 거쳐 1970년대 후반 대대적인 이농이 이뤄지기 까지 장장 600여년 동안 전국의 시장을 주름 잡았다.그래서 이런말이 생겼다.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 한양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그 유명한 개성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고 남쪽에는 병영상인들이 패권을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개성상인들과는 달리 병영상인의 존재는 역사 속에 한줄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경강상인이니, 의주상인 등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병영상인, 그들의 존재는 컸으나 역사적으로 늘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병영성은 1417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강진 병영면으로 옮겨 오면서 바로 축성이 시작됐다. '강진군지'나 '조선환여승람'등에는 마천목장군이 병마절도사로 부임해서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강진에 갑자기 거대한 토목공사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영성의 규모는 둘레가 2천820척, 높이는 18척 정도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따지면 길이가 약 1천 60m, 높이가 5m 정도의 규모다. 여기에 관아와 누각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단계적으로 거대한 병영이 모양을 잡아갔다.
 
병영상인의 역사는 병영성이 축조되던 이 시기부터 시작됐다는게 대부분 향토사학자들과 주민들의 시각이다.병영의 향토사학자인 송은 김흥연 선생(2009년 4월 작고)은 2008년 6월 펴낸 '진실한 삶을 위하여'라는 책을 통해 '병영성을 축조할 때는 전국적으로 상업이 발전하지 않아 각 지방이 자급자족의 형태로 산물거래가 이뤄졌으나 병영에 갑자기 큰 성을 쌓느라 수년간 수백~수천명이 징발되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물자 소비가 폭증하고 이에따른 수요가 증가해 병영사람들이 전국에서 물건을 공급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 한 것은 보통 1700년대 후반으로 본다.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왕조의 봉건적 지배질서가 급격히 동요됐고, 이 과정에서 상업이 발달하고 상업의 규모도 커지게 되면서 상업계 전반이 급격히 팽창했다는 것이다.이같은 우리나라의 상업역사와 비교하면 병영에는 상업적 토대가 비교적 빠르게 형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병영성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모양을 갖춘 병영성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지역 53주 6진을 관할하는 거대한 병마절도사영이었다.조선대학교가 지난 1999년 강진군으로부터 의뢰 받아 발간한 '전라병영사연구'란 책에 다르면 당시 병영성에 소속된 군인은 1만122명 이었다. 이중 군관과 군병, 장인 등 515명이 돌아가면서 병영에 들어와 근무를 했기 때문에 병영은 전라도 53주 6진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여기에 병사들을 면회오는 가족들의 발길도 이어졌을 것이고, 병마절도사영에 각종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전라병영사연구'에 따르면 병영성을 중심으로 이뤄진 재정은 크게 중앙의 각 관청에 상납하는 세금과 병영 자체에서 필요한 세금으로 나뉘었다. 강진 병영에서는 해마다 비변사를 비롯해 중앙의 5개 관서에 부세를 납부했고, 자체경비는 주로 미곡, 포목, 현물 등을 거두어 들였다. 현물은 가족과 땔감, 약재, 종이 등 열 여덟가지에 달했다고 한다.병영성은 또 강진관내에 별도의 관할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들에게 세금을 내는 대신 병영내의 각종 부세에 대한 부담을 지게 했다. '병영영지'란 문서에 따르면 병영성이 관할한 직할 면은 옴천면등 5개면 2천20가구, 6천21명에 달했다.

특히 직할면에 소속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군정을 침탈하지 말라는, 이를테면 병역면제 조치를 해줘 5개면으로 모여드는 인구가 폭증하게 됐다.이는 사회문제로 비화돼 조정에서 걱정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영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영에는 성에 붙어사는 가구가 2천호 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군정을 침징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 고을과 다른 각 고을의 백성들이 역을 피해 차차 유입해 들어와 이제 병영에 속한 4개면의 가구에 4천여 호나 됩니다.

 

당초 설치한 목적은 병영을 위해 백성을 모집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대로 가다가는 1만호, 2만호나 되어 강진의 다른 면은 텅텅 비게 될 것입니다. 2천호에서 더 늘지도 줄지도 않도록 조치를 내려야 합니다'병영성을 중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에따라 얼마나 많은 물자의 수요가 발생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서울에서 내려 온 직업 관료들의 가족들도 상당수에 달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984년 발간된 '병영양로당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병영이 설치된 이후 서울의 양반가문 출신의 대소관헌들이 부임했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서울의 선비들이 병영으로 많이 내려와 정착했다. 또 병영의 상류계급이 병영성의 업무에 참여했으며 서민들은 병영의 소요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상인이 되었다. 이 상인들이 전국 각지를 누비면서 경향간에 인사 교류는 물론 물자가 유통되어 이 고장의 문화와 경제는 다른 곳 보다 훨씬 선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병영성 주변에 강력한 생활권이 형성되면서 예술인들도 모여들었다. 남종화의 대가인 미산과 그의 아들 남농이 진도에서 병영으로 이사를 와서 13년 동안 살았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일이다.미산은 당시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생활고를 겪은 천재 중의 한명 이었다. 그는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1912년 어린 남농을 데리고 병영면 성동리 40번지로 이주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산선생이 진도에서 목포도 아니고 광주도 아닌 강진의 병영을 찾아 정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런저런 정황을 봤을 때 목포나 광주보다는 병영이 그림을 팔아 생활하기에 좋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앞 광장에는 병영성에 억류되었던 하멜의 기념관이 있다. 하멜표류기가 단지 우리나라를 유럽에 소개한 도서로만 알고 있었는데 하멜 표류기'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고 한다.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큼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라인강의 지류인 왈강이 네덜란드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왕래가 잦았으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쿰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취업하였고 선박의 포수로 자카르타에 건너갔다. 당시 바타비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멜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서기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이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하멜 일행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멜은 조선의 임금인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으며 자신이 포를 다루는 포수의 경험 때문에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는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문물과 지식이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하멜은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서 이들을 담당하기가 힘겨워지자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마침내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로 건너가서 나가사키로 탈출하였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 국내에서는 '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두산 백과사전

 

 

병영성 소나무

 

성동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강진읍에서 북동으로 14.8㎞ 떨어진 병영면 소재지 동성마을 중앙에 우뚝 솟아 마을의 상징목으로 되어 있으며 수고 30m, 흉고둘레 6.75m, 수관폭은 중심에서 동쪽으로 16.5m, 서쪽으로 13m, 남쪽으로 10.9m, 북쪽으로 3.5m나 뻗어 있다. 나무의 크기나 마을의 역사성으로 볼 때 수령은 500년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여름철에 폭풍이 휘몰아쳐 큰 은행나무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많이 부러졌다. 이를 보고 받은 병사가 부러진 큰 가지를 성안으로 가져오게 하고 이로써 많은 가구를 만들게 했다. 이 때 목침도 만들어 이것을 병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목침을 베고 잠을 자던 병마절도사는 그날로 병이 나서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의원도 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백약이 무효인지라 끝내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굿)를 하고 점도 쳐보니 은행나무 목침을 병사가 사용한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지가 부러진 은행나무에 제사를 올리고 목침을 다시 붙어 주어야 완쾌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무당의 말을 따라 그대로 하였더니 병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옛담장

 

한골목은 835번 지방도와 동쪽 도로의 병영천 사이에 위치한다. 성남리 118번지 앞에서 지로리 회관 앞까지 약 1.5km의 골목을 가리키며, 골목이 크고 길다 하여 ‘한골목’이라 불렀다. 한골목은 병영성이 설영된 후 촌락이 형성되면서 만들어졌다.

 

 

특히 한골목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할 때 통행하던 길이었는데, 이 길의 담장이 높이 쌓아졌던 것은 병사들이 주로 말을 타고 이 길을 다니므로 집안이 다 보여 이를 가리고자 했던 것으로 전한다.

 

 

한골목의 담장은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빗살무늬 방식으로 쌓아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명 ‘하멜식 돌담’이라 하여 하멜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농촌 개발이 확산됨에 따라 돌담이 훼손되고 점차 한골목의 원형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하여, 한골목은 2006년에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마을 중앙 민가 정원의 문인석

 

 

 

병영면 일원에는 매년 4월 '전라병영성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축제는 조선시대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 육군을 총 지휘했던 전라병영성의 국가사적지(제397호) 지정을 기념하고, 옛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지난 1997년부터 매년 개최해오고 있다고 한다. 행사 기간 중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는 병마절도사 입성식과 60명으로 구성된 군악대의 시가행진이 병영면 시가지를 거쳐 행사장인 하멜 전시관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20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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